출처 :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18620.html

장관이 총수 만나자고 하면 “급이 안맞아서…”
등록 : 2012.02.12 19:50수정 : 2012.02.13 09:52


0.1% 재벌의 나라 
①과도한 부의 집중

1986년 가을 골프장 풍경
신현확 전총리, 이병철 회장에 허리 숙여서 인사
경제권력, 정치권력 위에 올라서며 흔든 지 오래

1986년 가을 ‘안양 컨트리클럽’(현 안양베네스트 골프클럽). 신현확 삼성물산 회장과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은 이병철 삼성 회장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 회장은 골프 카트에 탔고, 신 회장과 홍 회장은 카트를 뒤따라 걸었다. 홍 회장은 이 회장과 사돈 관계, 신 회장은 1980년 국무총리에서 물러났다가 얼마 전 영입된 처지였다.

삼성과 가까운 한 대학교수는 “총리를 지냈던 분이 재벌 총수에게 허리를 굽히는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재벌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며 이 일화를 소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치 권력과 재벌 권력 사이 힘의 저울추는 이미 오래전부터 재벌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삼성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는 저서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이렇게 썼다. “노무현 정부에서 삼성에 불리한 것은 거의 없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제안한 정책을 정부가 채택한 사례는 아주 흔했다. 이학수(삼성 전 부회장)는 아침 모임만 하루 두번씩 가졌다. 호남 출신 주요 인사들 대부분이 삼성과 인연을 맺게 됐다. 정권이 바뀌어도 재벌이 주요 인맥을 장악하는 데는 1년이면 충분했다.”

실제로 매년 열리는 ‘호암상’ 시상식에선 각료회의를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지난해 6월 열린 시상식엔 김황식 총리 외에 현승종·이홍구·이한동 전 총리, 이귀남 법무부장관, 이현구 대통령 과학기술특보, 김도연 국가과학기술위원장 등 주요 장관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꾸로 총리나 장관이 총수를 불러 만나기는 힘들다. 현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과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해 동반성장을 설득하기 위해 재벌 총수와의 연쇄 회동을 제안했다가 몇몇 총수와의 비공개 만남에 만족해야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급이 안 맞는데 어떻게 공개 회동을 하나”라며 “대통령 주재 자리가 아니면 총수가 움직인 사례는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0년 이후 장관급 인사가 총수와 공개 회동을 한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다.

관료 사회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고위 관료 집단에 대한 재벌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고위 관료들의 재벌기업행은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송광수·이명재 전 검찰총장은 두산, 오세빈·이태운 전 서울고법원장은 현대차에서 각각 사외이사로 몸을 담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총괄했던 김현종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삼성전자 사장(해외법무 담당)으로 갔다가 지난해 자리를 옮겼다.

꼼짝 못하는 관료사회
평소 인맥관리 길들여져…퇴직 뒤엔 대기업행
규제 얘기 꺼냈다간 “경제 거덜내려 하나” 질책

경제 부처는 더 심하다. 경제정책 자체가 재벌 이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 등 몇몇 대기업의 주가가 주식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이들의 수출 실적이 무역수지와 외환시장에 바로 영향을 주다보니 경제 정책 자체가 이들 위주로 짜이는 것이다. 공정위 한 국장은 “부처 간 협의 과정에서 대기업 집단(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문제 삼으려고 하면 매번 ‘우리나라 경제 거덜내려고 하냐’는 식의 반응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고위 관료들이 이미 재벌기업에 의해 인맥관리를 당하고 있는데다 스스로도 재벌기업이 흔들리면 나라 경제에 큰일이 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요즘 관가에서는 재벌기업으로 갈 자리를 찾는 관료는 있어도 재벌 개혁에 손대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이동걸 전 금융연구원장(현 한림대 객원교수)은 “재벌이 배 불러야 경제가 좋아진다는 시각은 현 정권 들어 한 걸음 더 나갔을 뿐이지 그 이전에도 주류를 형성했다”며 “(현 경제구조상) 재벌 개혁은 단기적 경제 후퇴나 일시적 충격을 감수하고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일반 개인도 재벌의 힘과 영향력 아래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재벌의 행태에 혀를 차면서도 이들 기업에 입사원서를 내려고 구직자들이 몰리는 게 취업시장의 현주소다. 모든 경제 시스템이 재벌 중심으로 움직이고, 중견기업이나 중소기업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다 보니 어떻게든 재벌 기업에 입사하려고 몰려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1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천재론을 실은 서적 등은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현재 이 회장의 일대기와 경영 철학 등을 다룬 서적만 20권이 넘는다.

여론마저도 쥐락펴락
언론, 광고 의존도 커 ‘재벌논리 전파’ 나팔수로
일부 대기업은 전담팀 꾸려 SNS에도 개입나서

재벌은 여론의 형성과 향배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형의 힘이다. 10대 재벌은 지상파 3사 방송광고의 20% 이상을 차지한다. 신문이나 잡지도 재벌 의존도가 높기는 마찬가지다. 재벌 광고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언론 매체는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다. 재벌 광고에 의존하는 언론 매체들은 재벌의 전근대적인 세습 경영이나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 대한 지적보다 ‘오너 리더십’을 조명하는 등 재벌 체제를 합리화하는 데 많은 힘을 쏟는다.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정부, 언론 등은 공공연히 재벌의 논리를 전파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대기업이 성장해야 일반 국민이 먹고살 수 있다는 낙수효과(트리클다운) 이론이다. 이 이론은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되면서 실효성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재벌 논리에 포섭된 정책 당국자, 여론 주도층은 계속 이를 전파하고 있다. 청년실업과 사회양극화 대책 등은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김민기 숭실대 교수(언론홍보학부)는 “특정 대기업에 대한 광고 매출 비중이 확대됨에 따라 언론이 광고주의 눈치를 보게 되고 결과적으로 여론 왜곡이 빚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최근 일부 대기업들이 수십명씩 전담팀을 꾸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개입하는 것이 여론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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