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75899


우리 해군이 일본 바다에서 욱일기에 경례? 그보다 더 큰 우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자위대 관함식과 일왕

22.10.28 19:25 l 최종 업데이트 22.10.28 19:25 l 김종성(qqqkim2000)


2019년 4월 21일 중국 해군 창설 70주년을 맞아 열리는 국제관함식 참가 차 산둥성 칭다오항에 입항한 일본 해상자위대 호위함 '스즈쓰키'호에 달린 욱일기 옆에 수병들이 도열해 있다. 일본은 한국 해군이 2018년 10월 제주 앞바다에서 주최한 국제관함식에 일제의 전범기로 인식되는 욱일기 게양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하자 응하지 않고 아예 불참했었다.

▲  2019년 4월 21일 중국 해군 창설 70주년을 맞아 열리는 국제관함식 참가 차 산둥성 칭다오항에 입항한 일본 해상자위대 호위함 "스즈쓰키"호에 달린 욱일기 옆에 수병들이 도열해 있다. 일본은 한국 해군이 2018년 10월 제주 앞바다에서 주최한 국제관함식에 일제의 전범기로 인식되는 욱일기 게양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하자 응하지 않고 아예 불참했었다. ⓒ 연합뉴스


한일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윤석열 정부가 해상자위대 관함식 참가를 결정했다. 다음 달 6일 일본에서 열리는 국제 관함식에 해군을 참가시킨다는 방침이 27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정해졌다. 해상자위대 군기인 욱일기가 휘날리는 일본 바다에서 우리 해군이 그 깃발을 향해 경례하게 된 것이다.


2002년과 2015년에도 해군이 이 행사에 참가한 일이 있지만, 과거에 동종 사례가 있었다고 해서 이 행사의 위험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관함식을 포함한 관병식은 어느 나라 군대나 할 수 있는 행사이지만, 일본의 과거 전력과 향후 위험성을 고려하면 윤석열 정부의 결정이 과연 신중했는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한민족은 1945년 해방 직후까지 서울 용산 일본군영에서 휘날린 욱일기 밑에서 시련과 고통을 겪었다. 그런 민족이 욱일기 휘날리는 자위대 행사 참가를 이렇게 섣불리 결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우리 언론에서는 자위대 관함식이 주로 욱일기와 연관돼 보도되고 있지만, 일본 근현대사에서는 이 행사가 주로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왕(천황)과 관련해 인식됐다. 관병식이라는 행사의 기원 자체가 1868년을 계기로 강화된 일왕의 통치권과 관련이 있었다. 무스히토(메이지) 일왕이 즉위식을 하면서 교토의 육군부대를 사열한 것이 일본 관병식의 출발점이었다.


그 뒤 관병식은 일왕과 군대뿐 아니라 국민과 일왕을 매개해주는 기능까지 수행했다. 일왕이 관병식을 계기로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기회가 많아졌다. 일왕은 명절이나 자기 생일이 되면 관병식 기회를 빌려 국민들과의 접촉을 가졌다.


이 점은 나루히토(레이와) 일왕의 할아버지인 히로히토(쇼와)가 즉위한 1926년을 전후한 시점에 출생한 일본인들이 도쿄 요요기 연병장과 관련해 '쇼와 천황'이라는 글자를 떠올리곤 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쇼와(昭和)를 연호로 사용한 히로히토는 요요기 연병장을 자주 방문했다. 이곳에서 그는 육군 관병식을 열곤 했다. 일본인의 특성을 분석한 1981년 12월 23일자 <조선일보> 기사 '일본인 부(富)의 얼굴 제6회'는 "아마도 80 이상의 고령자들은 요요기라는 이름으로 원시림 같은 숲을 연상할 것이며, 70대는 백마를 탄 천황이 막강한 제국육군을 관병하는 연병장을 머리에 떠올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대중을 끌어모으는 관병식


일왕이 관병식 기회를 빌려 대중과 접촉한다는 사실은 1931년 1월 상하이 여인숙에서 김구를 만나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백범일지)라고 말한 이봉창 의사의 항일투쟁에도 활용됐다.


영원한 쾌락을 위해 살겠다는 말로 55세의 독립운동가를 뭉클하게 만든 이봉창이 1932년 1월 8일 선택한 '독립 사업' 방식은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4월 29일 아침, 자기는 이런 게 필요 없다며 고급 시계를 풀어 김구에게 건네고 김구의 값싼 시계를 착용해 55세 독립운동가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윤봉길 의사 역시 관병식을 활용해 의거를 일으켰다.


히로히토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하고자 상하이 일본인들이 훙커우 공원에서 개최한 행사의 제1부는 일본군 관병식이었다. 윤봉길은 관병식의 딱딱한 분위기가 제2부 축하 행사로 인해 흐트러지는 시점을 이용해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1932년의 두 의거는 한동안 침체됐던 독립운동 열기를 되살리는 한편, 중국 등의 국제사회가 한국 독립운동을 응원하는 계기가 됐다. 김구·이봉창·윤봉길이 관병식을 이용해 의거를 일으킨 것은 일왕과 연관된 이 행사가 일본 대중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병식에 담긴 그 같은 힘은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어 했던 패망 이후의 일본 우파에게도 당연히 인식됐다. 일왕을 관병식에 다시 끌어들여 군사대국을 재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패망 이후의 자위대 내에도 적지 않았다.


관병식 복구시키고 싶어 한 자위대 우파들

 

에 실린 "'벚꽃'은 다시핀다⑤ 나까소네 선언을 계기로 본 일본자위대 내막"">

▲  1973년 10월 13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벚꽃"은 다시핀다⑤ 나까소네 선언을 계기로 본 일본자위대 내막" ⓒ 조선일보

 

1973년 10월 13일자 <조선일보> 시리즈 '벚꽃은 다시 핀다 제5회'에 그런 군인들이 소개됐다. 자위대의 내부 분위기를 다룬 이 기사는 "자위대의 많은 간부들은 불평이 대단하다"며 "무엇 때문에 국가의 상징인 천황이 부대를 관병하지 못하느냐?"라는 불만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뒤 자위대가 히로히토의 관병식 참가를 관철시키려다가 실패한 사연을 이렇게 설명한다.


"71년 9월 히로히토 천황 내외가 유럽 방문길에 올랐을 때, 자위대는 하네다 공항에서 '국가의 상징'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환송 사열을 받자고 했지만 일본 내각은 이를 허용치 않았다. 여론이 두려웠던 것이다."


자위대 내의 우파들은 출국 길에 나서는 일왕을 위한 관병식은 관철시키지 못했지만, 언론이 덜 주목하는 행사에서는 그것을 성사시켰다. 위 기사는 "(일왕이) 비록 비공식적으로나마 자위대를 방문, 부대를 사열하기 시작"했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수년 전 어느 가을 히로히토 천황 부처는 일본 동북지방 시찰 길에 나섰다가 근처 자위대 기지를 방문한 것이다. 천황의 방문을 받은 부대는 물론 전 부대원을 동원, 자위대기로 천황에 대한 경건한 경의를 표했다. 이것은 전후 처음 있은 일로 당시 자위대로서는 체질 개혁을 위한 하나의 전기라고까지 평가되었다."


한국인들은 욱일기와 연관 지어 자위대 관병식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비해, 우파 일본인들은 일왕의 부재와 연관시켜 관병식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위 기사는 일왕이 관병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현실에 불만을 느껴, 욱일기 휘날리는 비공식 관병식이라도 열어 일왕에 대한 충성심을 표시하고자 했던 일본 우파의 욕구를 느끼게 한다.


일본의 대외침략이 본격화된 메이지 시대에 일왕의 관병이 시작됐다. 대외침략이 가장 활발했던 히로히토 시대에는 일왕과 요요기 관병식장이 합체되는 이미지가 강해져 이 나라의 군국주의적 단결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패망 이후에도 자위대 우파들은 일왕의 관병이라는 과거의 관행을 복구시키고 싶어 했다.


이런 점들은 일본군 관병식이 여느 나라 관병식과 달리 도전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반영한다. 자위대 관함식을 우려하는 것은 그곳에 욱일기가 휘날려서라기보다는 자위대의 움직임 자체가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해상자위대 관함식에 대한 국민적 우려는 물론이고 위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우리 해군의 참가를 결정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자위대가 갑자기 우리 옆으로 불쑥 다가오는 현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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