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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많았다”…판사 눈물 흘리며 32년만에 무죄 선고
5·18 시민군 기동타격대장 윤석루 씨의 ‘감동 법정 드라마’
“믿기지가 않습니다” 피고는 큰절로 존경 표시
동아일보 | 입력 2012.03.03 03:08 | 수정 2012.03.03 05:53

지난달 23일 광주지법 제201호 법정.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기동타격대장'을 맡았던 윤석루 씨(56)에 대한 내란중요임무종사 사건 재심 재판을 맡은 제2형사부 김태업 부장판사(44·사시 35회)는 공소사실을 읽어 내려가다 말을 멈췄다. 순간 재판정은 정적에 휩싸였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김 부장판사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검찰 측, 변호사 측 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죠. 지금부터 제가 (재판을) 주관하겠습니다"고 말을 이었다. 김 부장판사는 "참 고생 많이 하셨다. 이런 분들이 이젠 더 멍에를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김 부장판사는 "신군부의 잘못된 정권찬탈에 대해 피고인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정당방위를 한 것"이라며 "그동안은 '폭도'로 불렸지만 이제 더는 '폭도'가 아니다"고 밝혔다. 이날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이 군사반란 이후 행한 일련의 행위는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범죄로서 형법상 내란죄에 해당한다"며 "따라서 피고인의 행위는 헌정질서 파괴의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로서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라 할 수 있다"고 무죄선고 이유를 밝혔다.

최근 법원 인사로 사법연수원 교수로 자리를 옮긴 김 부장판사는 2일 통화에서 "당시 역사적 상황에 이해하면서 5·18 이후 긴 세월을 '폭도'로서 숱한 고초를 겪었을 피고인의 인생사를 접하고서 순간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5·18 당시 많은 시민이 희생되고 방송국이 불탔던 이야기를 들었던 동시대인으로서 우리 역사의 비극을 떠올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이미 유사한 재심사례가 있었고, 사실관계에서 충분한 조사가 이뤄진 만큼 다툼의 여지가 없어 형사소송 절차에 따른 '즉일(卽日) 선고(결심한 당일 바로 선고하는 것)'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일 오전 판결문을 받아보기 위해 다시 법원에 나온 윤 씨는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참 세상 많이 변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윤 씨는 "1980년 군사법정에서는 변호사조차 말 한마디 하기 어려웠던 분위기였다"며 "재판장이 제 처지를 이해하면서 무죄선고를 내린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그날 재판정에 나온 5·18 관련자와 함께 재판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로 큰절을 하기도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윤 씨가 32년간 무기징역의 멍에를 짊어진 사연은 1980년 5월 27일로 거슬러 올라간다.윤 씨는 그날 오전 1시 반경 대대적인 '폭도 소탕 및 광주 수복작전'에 나선 계엄군과 싸워야 하는 운명에 맞닥뜨린다. 그는 마지막 도청에 남은 200여 명 가운데서 시민군들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발포명령을 내린 당사자였다. 그는 도청 본관 앞에 세워져 있던 버스 밑에서 총을 들고 저항하다 생포됐다. 그는 505보안대 지하실과 헌병대를 거쳐 합동수사단에서 3개월간 조사 끝에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기소됐다. 군법회의와 대법원을 거쳐 이듬해 3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82년 크리스마스 특사로 2년 7개월 만에 풀려난 그는 2년 넘게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87년 홍남순 변호사의 추천으로 당시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수행원으로 들어가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그 후 건설업 등을 하며 서울에 정착한 그는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거쳐 지난달 한양사이버대 경영학부를 졸업하면서 새로운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윤 씨는 "무기 이상 중형을 받은 5·18 관련자 가운데 재심은 제가 마지막일 것"이라며 "늦게나마 젊은 날 항쟁의 뜻을 평가받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광주=김권 기자 goqu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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