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부대 집회 관찰기- 한남동이 스탈린그라드가 된 날
기자명 이진동 기자 입력 2025.01.12 09:22
[공희준의 메시지버스]
누구를 위해 성조기를 흔드나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가 예보된 날이었다. 신당역에서 한강진역 방향으로 가는 전동차를 기다리는 승강장에서마저 집에서 푹 눌러쓰고 나온 두툼한 털모자를 함부로 벗지 못할 정도였다.
2025년 1월 8일 목요일, 필자는 내란 수괴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이 과거 일본 적군파가 저질렀던 저 악명 놓은 ‘아사마 산장 사건’을 방불케 하는 일촉즉발의 위험천만한 농성전을 이어가는 중인 한남동으로 향했다. 태양이 중천에 뜬 덕분에 그나마 덜 추운 점심시간 무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장군의 위세는 맹렬했다.
한남동 언덕에 입지한 대통령 관저 방면으로 가려면 서울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에서 열차를 내려야만 한다. 지상으로 나가는 역 안의 에스컬레이터 앞은 탈 차례를 기다리는 노인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노인들 대부분이 윤석열을 지키겠다며 이곳에 왔음은 물론이다.
젊은이들이었다면 승강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지루하게 기다리느니 차라리 계단을 힘차게 걸어서 올라갔으리라.
그러나 한강진역의 계단은 노인들이 이용하기에는 너무나 길고 많았다. 노인들이 친위 군사쿠데타가 실패하는 바람에 관저를 차량 방벽과 철조망으로 둘러쳐 요새화한 다음 그 안에 들어앉은 현직 대통령의 인간 방패 역할을 자임하며 이 엄동설한에 무리 지어 집 밖으로 몰려나온 지금의 대한민국 시국 상황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부분 부분을 뜯어보면 응당 비극일 테지만, 전체적 그림을 조망하면 당연히 비극이었다.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 인근 한강진역 출구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윤석열 지지자.
한강진역 2번 출구로 나오자 제일 먼저 눈에 띈 풍경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판매하는 노점상들의 모습이었다. 해외로 관광을 온 건도 아니건만 남의 나라 국기를 기어이 돈을 주면서까지 사야만 하는지 의문이었다. 더군다나 성조기의 나라 미국이 윤석열과 소위 충암파 정치군인들이 일으킨 12·3 쿠데타에 분명하고 단호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음은 며칠 전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귀환한 필립 골드버그 전 주한 미국 대사에 의해 이미 확연히 밝혀진 터이다.
태극기 집회에 동참하러 그야말로 노구를 이끌고 한남동에 속속 도착한 윤 대통령의 골수 콘크리트 지지자들에게는 자신들의 몸 상태만큼이나 미합중국 행정부의 반응도 중차대한 고려 사항은 아닌 듯했다. 그들이 믿고 상상하는 세상 속에서 태극기 부대는 현직 특전사 요원들에 못잖게 날렵한 몸놀림을 뽐냈고, 미국은 윤석열의 영원하고 든든한 동지이자 후원자였다.
한남대로를 가로지르는 육교 근처에 다다르자 귀에 익은 음성이 대형 확성기를 타고서 고막을 마구 때렸다. 나와는 서로 서너 차례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극우 유튜버 신혜식씨의 목소리였다. 신씨는 이번 윤석열 탄핵소추 정국에서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 채널을 영악하게 활용해 거액의 후원금을 수금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시나 희대의 수완가는 수완가였다.
윤석열 일파가 뜬금없이 개시한 농성 투쟁 와중에 온도계의 수은주가 워낙 낮게 곤두박질을 친 까닭에 태극기 집회 참석자들은 그들이 종북좌파라 주장하는 세력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보다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매서운 겨울바람과의 싸움에 더욱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다.
윤석열과 김건희 부부를 응원하기 위해 보냈다는 무수한 숫자의 형형색색의 화환들은 집회 참가자들을 쉴 새 없이 괴롭히는 강추위를 녹이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뜨거운 물을 부어 나눠주는 컵라면과 커피와 각종 전통차들이 전장(?)에서의 실질적 효용가치는 훨씬 더 커 보였다.
순간 필자의 머릿속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분수령으로 작용한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소련군에게 사면초가의 형국으로 포위당한 독일군 병사들에게 식량과 의복 대신 콘돔을 보급품이랍시고 낙하산으로 공수해줬다는 유명한 후일담이 떠올랐다.
삶과 죽음이 무더기로 엇갈리는 치열한 격전지의 한복판에서 이러한 어이없는 착오가 왜 발생했을까? 히틀러가 장기간의 동계 전투를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기본적 군수물자를 전연 준비하지 못한 천둥벌거숭이 군대를 살인적 추위가 엄습한 한겨울의 황량하고 광막한 러시아 평원으로 내몬 탓이었다. 윤석열은 그의 지지층이 충분한 월동장구를 갖추고서 한남동 전선으로 출동했다고 몽상하는 것일까?
지난8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윤석열 지지자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평화롭되 잔인한 한남동의 낮
한남동 현장에 실제로 와보니 기성 언론의 보도에는 적잖은 선정적 과장이 섞였음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좌우를 막론하고 망국적이고 극성스러운 진영논리에 찌든 정치 유튜버들이 중계하는 내용은 곧이곧대로 신뢰할 게 못 되었다.
내가 직접 관찰한 바로는 윤석열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들과 여기에 반대하는 이들 사이에 당장 상대방을 잡아먹을 듯한 날 서고 험악한 기세의 막가파식 육박전은 빚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측 모두 경찰이 설치한 통제선 안쪽에 얌전히 머물며 충돌과 몸싸움을 자제하고 있었다. 이른바 슈킹을 목적으로 작정하고 상대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 한에는 친윤석열과 반윤석열 간에 볼썽사나운 멱살잡이가 일어날 일은 없었다.
나는 윤석열의 신속한 체포와 구속과 탄핵 인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이날은 순수하고 객관적인 관찰자의 자세와 시선을 최대한 유지하기로 결심한지라 양자의 집회 광경을 두루두루 살펴봤다. 촛불 즉 응원봉을 든 편에서는 한기를 물리쳐줄 열량 높은 초콜릿 바를 행인들에게 무료로 제공해줬다. 태극기 집회 측에 들르면 길게 줄을 서는 불편함을 감수할 각오만 돼 있다면 컵라면이나 따끈한 일회용 인삼차를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었다. 양쪽 전부 민심을 얻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표정의 차이는 뚜렷이 감지되었다. 승기를 잡은 촛불, 곧 응원봉이 패배를 예감하고 있는 태극기와 비교해 한결 여유롭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태극기 집회는 소리는 요란했을지언정 조금씩, 조끔씩 파장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극우 유니버스’의 편향되고 맹목적인 세계관에서도 윤석열의 몰락과 보수의 종말은 더는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기색이었다.
상당수의 진보 성향 언론매체들과, 젊은 누리꾼들이 주로 접속하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태극기 부대의 주력을 형성하는 장노년 세대를 겨냥한 공공연한 조롱과 혐오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태극기 부대의 모습을 가까운 거리에서 생생하게 육안으로 목격하니 그저 안쓰럽고 딱하다는 느낌이 일차적으로 들었다. 그리고 윤석열의 시대착오적 군사쿠데타로 촉발된 내란 국면을 조기에 종식·수습함으로써 그들이 집으로 빨리 무탈하게 귀가하도록 이끌어야만 할 필요성을 다시금 진하게 절감했다.
최악의 리더는 어떤 리더일까? 무능한 데 더해 무책임하기까지 한 지도자이다.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혹한에 시달리고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30만 명의 독일 제6군 장병들에게 한 치도 물러나서는 안 된다며 무조건 현지 사수를 지시했다. 그는 후방의 안전하고 아늑한 집무실에 머물며 그와 같은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후퇴 불허 명령을 반복해 내렸다.
윤석열은 수은주가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진 날에 차가운 길바닥 위에 앉아 있는 지지자들에게 끝까지 싸워줄 것을 연속적으로 호소하고 독려했다. 그러한 호소와 독려를 남긴 윤석열이 은신해 있는 한남동 관저의 실내는 따뜻하게 난방이 되고, 수도꼭지만 돌리면 뜨거운 온수가 콸콸 쏟아져 나올 게 뻔하다.
지지자들이 노상에서 컵라면과 물밥으로 허기를 달래는 바로 그때, 윤석열은 대통령 관저를 찾아온 40여 명의 국민의힘 소속 여당 국회의원들에게 함께 식사할 것을 제안했다. 고작 컵라면이나 끓여주려고 밥자리 제안을 하지는 않았을 게다.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과 스탈린의 볼셰비키 러시아는 스탈린그라드에 가진 것을 모두 탈탈 쏟아부었다. 후세는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가는 볼가강 강변의 조용하고 평화롭던 한 공업 도시를 주검이 난무하고 폐허로 가득한 생지옥으로 만들어버린 두 악독한 독재자 가운데 전자를 단연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스탈린은 병사들에게 최소한 식량과 의복과 연료만은 상대적으로 제대로 챙겨줬기 때문이다.
똑같은 한파도 젊은 육체와 견주어 늙은 신체에 압도적으로 모질고 혹독하기 마련이다. 설설 끓는 뜨끈뜨끈한 아랫목에서 이제는 마른 장작처럼 앙상해진 몸을 덥히고 있어야 어울릴 연령대의 계층을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가차 없이 적군의 총알받이로 몰아붙였듯이, 한남동으로 매정하게 동원·소환하는 윤석열을 후대의 역사가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윤석열이 만약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면 불법적이고 위헌적인 비상 계엄령을 야밤에 기습적으로 선포하지도, 국정농단과 비선실세의 의혹에 휩싸인 배우자 김건희를 무턱대고 감싸고 돌지도, 국정운영의 중요하고 필수적인 한 축인 집권당을 여의도 출장소로 무기력하게 전락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동토의 스탈린그라드에서 오래전에 불귀의 객이 된 병사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바이다. 현재 한남동에서 하루하루 건강을 잃어갈지 모를 어르신들의 조속한 귀가 또한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공희준은 “산업의 쌀이 반도체라면, 모든 콘텐츠의 쌀은 글”이라고 믿으며 정치평론과 인물비평을 중심으로 PC통신 시절부터 SNS 시대인 지금까지 글쓰기에 전념해왔다. '강남좌파', 먹고사니즘' 같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시대상이 담긴 촌철살인의 신조어를 만들어낸 진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수만 평전> <지금은 강남시대> <보수의 종말> <퇴진하라> 등의 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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