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부정론자들의 인디언 기우제…진실 아닌 불복의 명분
기자명 이중근 칼럼니스트 입력 2025.02.22 08:55
투·개표 조작 원천 불가능…선거부정 파고들 틈 없어
국힘은 음모론에 선 긋고, 시민들이 선관위 지켜내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진=연합뉴스)
1995년 6월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래, 지난 30년 가까이 언론인으로서 선거관리위원회를 지켜봤다. 대략 출입기자로 10년, 데스크로 10년, 자문위원으로 10년 동안 관찰하면서 숱한 일들을 목격했다. 2002년 12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민주당 후보에게 패배한 직후, 한나라당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한 일이 먼저 떠오른다. 대선 직후 이 후보 지지모임인 ‘창사랑’이 “나는 17년차 국정원 중간 간부입니다”로 시작하는 정체불명의 글에 자극받아 당을 압박한 게 발단이었다. 중앙선관위는 “한나라당이 돈을 내면 재검표할 수 있다”고 했고, 이에 대법원의 결정으로 전국 80개 개표구에서 100만표 넘게 재검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이다. 문제의 글을 쓴 범인은 국정원 요원과는 무관한 특수학교 교사였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는 ‘나꼼수’를 이끌던 김어준씨가 선관위의 부정선거론을 제기했다. 외부의 디도스 공격을 틈타 선관위 내부 직원들이 통신선을 끊어 유권자들의 투표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진보적 시민단체가 그 내용을 규명하자는 취지로 토론회를 열었고, 일부 전산 전문가들도 김어준의 주장에 동조한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이 선거부정 의혹은 사그라들었다. 사실이 이기는 모습에 선관위 직원들은 안도했다.
그런데 2020년 4월 15일 치러진 21대 총선과 함께 제기된 부정선거 주장은 이전과 달랐다. 종전의 선거부정론이 단편적·일시적이었다면 이후 주장은 전면적이고 연속적이었다. 사전투표에서 이상한 표들이 무더기로 나와 선거에서 졌다는 민경욱 전 의원이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하면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이듬해 1월 미국 대선에서 낙선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의 ‘STOP THE STEAL’ 주장이 겹치면서 음모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중국이 선거에 개입했다는둥 온갖 주장이 음모론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선거 부정을 저지르려면 누구를 위해 조작하겠다는 그 목적이 분명하고, 거기에 수단과 능력을 모두 갖춰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선관위에는 이 세가지가 없다. 선거부정론자들은 해킹을 통해 선거인명부는 물론 투개표 결과도 조작할 수 있다고 한다.
컴퓨터 상으로 조작이 가능한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손으로 집계해 표를 조작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개표는 손으로 하며, 마지막에 후보자별로 표가 제대로 분류되어 묶여있는 지도 계표기를 거쳐 손으로 확인한다. 곁에는 각당 참관인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투표에서부터 개표 숫자를 선거구별로 정확히 맞춰 조작하려면 신과 같은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서울 종로나 중구선관위 같은 곳은 직원이 8명, 송파구는 13명이다. 이들이 개표장마다 배치돼 있는 500명이나 되는 지방직공무원과 교사 등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여 득표 숫자를 조작한다고? 음모론대로 중국인 해커가 투표한 사람과 개표한 수를 다 조작해서 맞춰놓고, 선관위 직원이 가짜 표까지 만들어놓고 있다고 치자. 이런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조작된 표 수에 정확히 맞춰 가짜표를 투표함에 집어넣는다는 말인가? 중국인 해커와 선관위 직원은 어느 시간에 어떻게, 누구를 통하여 그 엄청나고 복잡한 일을 모의하고, 또 투개표장의 공무원들에게는 어떻게 지시한다는 것인가? 나아가 선관위가 특정 당이나 후보를 위해 선거 결과를 조작했다고 쳐도 결과가 매번 바뀌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건 숫제 한국인 전체를 바보 취급하는 주장이다.
이 대목에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있다. 탄핵 재판대에 선 윤석열의 변호인 도태우와 석동현이다. 둘은 민경욱 전 의원의 변호인으로 이름이 올라와 있다. 대법원이 수십명의 직원을 동원해 의심이 제기된 표 하나하나를 모두 재검표한 끝에 문제가 없다고 한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 결과를 믿지 않는다. 도태우는 그제 탄핵 법정에서도 민경욱의 선거에서 부정이 있었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런데 민경욱을 찍은 투표지 사진을 부정 사례로 제시해 만인의 실소를 자아냈다. 가짜 주장을 하려고 해도 최소한의 합리는 있어야 한다. 사법체계를 무시하는 것으로, 법조인 자격이 없다.
선거부정론은 점점 고약해지고 있다. 최근 스카이데일리라는 '듣보잡' 매체가 계엄 당일인 12월 3일 밤 “중국인 해커 90명이 수원 선관위연수원에 있다가 잡혀서 오키나와 미군 기지로 압송됐다”는 허무맹랑한 보도를 했다. 주한미군이 이를 공식 부인하자 이 매체는 옥중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게 들었다며 “(그 체포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버젓이 믿고 있다. 소위 식자층이라는 교수와 변호사들이 적지 않게 이런 부류에 가세해 있다. 역사강사 전한길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결국 이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하나의 주장이 허위로 판명나도 이들은 또다른 핑계를 대며 부정론을 주장한다. 인디언 기우제는 비가 내리면 끝난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선거부정론자들의 기우제는 끝나지 않는다.
동네 이장 선거에서도 투표를 해보면 재검표할 일이 생긴다. 2,000명 남짓한 선관위 현장 인력이 외부(투표사무원 20만명·개표사무원 10만명)의 도움을 받아 전국적으로 투개표를 진행하는데 실수나 착오가 없을 수 없다. 그런 걸 부정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비상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기 대선이 치러지고, 국민의힘 후보가 낙선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렵다. 정치학자 레오니 허디는 "신념에 포획된 사람들에게 이미 자기 주장의 근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나마 누그러뜨릴 방법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접촉을 유지하고, 정치지도자들이 앞장서 공격적 언어를 순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이 새겨야 할 말이다. 하나를 더하면, 시민이 나서 선관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선관위 자문위원을 마치면서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다.
이중근은 경향신문에서 34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2024년 퇴직한 뒤 뉴스버스 등에 칼럼 등을 기고하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경향신문 편집국에서 정치(정당·외교안보·총리실·중앙선관위·청와대), 사회(경찰·검찰), 국제부를 거친 뒤 논설실장·논설주간으로 경향신문의 논평을 책임졌다. 국가의 정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되고 집행되는지를 관찰한 것을 소중한 경험으로 여긴다. 글의 무거움을 절감하며 정파적 보도를 지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하자’는 게 '신조'이다.
※ 뉴스버스 외부 필자와 <오피니언> 기고글은 뉴스버스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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