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뉴스] 돌아온 주어, 집나간 목적어
▣ 하어영 [2012.03.12 제901호]
돌아온 주어. 놀라운 일이다.
≫ 나경원 전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3월1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나 의원의 남편인 김재호 판사가 검찰 쪽에 나 전 의원을 비방한 누리꾼을 처벌해 달라고 청탁했다는 의혹 제기와 관련한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저희 남편은 기소 청탁하지 않았습니다.”
2012년 마이크를 잡은 나경원 전 서울시장 후보의 말에 ‘남편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있었다. “‘남편이’ 기소 청탁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주어가 집 나간 것은 2007년 대통령 선거전 와중 BBK 공세가 계속되던 때. MB가 BBK를 설립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주어가 없다”는 그의 지적질은 ‘주어경원’이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그리고 MB는 대통령이 됐다. 그는 말장난이 정치공학적 기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주어가 돌아왔다. 5년 만이다. ‘남편’이라는 주어가 나 전 후보의 입에서 반복됐다. 서울시장 선거 패배 이후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돌아온 주어에 놀란 기자들이 물었다.
“그렇다면 남편인 김재호 판사가 박은정 검사와 전화 통화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돌아오는 답이 이상했다.
“기소 청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화 통화’를 물었다. ‘기소 청탁’이라는 답이 나왔다. 무슨 말일까. 기자들은 다시 묻는다.
“전화는 했는데 기소 청탁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나 전 의원은 다시 답했다.
“기소 청탁을 하지 않았습니다.”
헤매는 목적어. 난감한 일이다.
‘전화 통화’라는 목적어를 내쫓고 ‘기소 청탁’이라는 목적어를 가져다 놓으며 직답을 피한 것이다. 그는 주술 문법의 비급으로 다시 한번 승부를 걸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공학이 시대를 다한 것인가. 목적어는 갈 길을 잃었지만 주변에 어른거렸다. 어른거리는 목적어(‘전화 통화’)로 누리꾼들은 금세 들끓었다. “기소 청탁을 하지 않았다고만 말하는 걸 보니 전화는 했다는 것이냐” “남편 김재호는 그때 미국 연수 가서 청탁할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봉화 피워 소통하나”는 말이 나오는 건 당연지사다. 물론 여기에 나 전 후보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기소 청탁을 하지 않았다니까.”
5년 전 주어 상실 때와는 달리 상황이 묘하다. 강용석과 <나꼼수>를 나란히 놓고 거기에 1:1로 박원순과 자신을 대응해 상황을 모면하려 했던 피해자 드립은 목적어 드립과 더해져 꼬여만 간다. “(박원순과 당신이 같다면) 박원순 시장도 아들 MRI 공개했다. 나경원, 김재호. 통화 기록 공개하라”는 예상치 못한 공세로 기자회견을 안 하느니만 못하게 돼버렸다. “성추행이나 다름없다”는 드립도, “편향된 매체의 기획”이라는 드립도, 의혹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은 실패! “공인으로서 숙명으로 여기고 인내해왔지만 (앞으로는) 민형사상 모든 조치를 통해 책임을 가릴 것”이라는 선언만 남았다.
말장난으로 흥한 자 말장난으로 망한다.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은 그의 편일까. 최소한 말장난은 더 이상 그의 편이 아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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