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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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복군의 창설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할 무렵에는 중일전쟁이 중국대륙 전체로 확산되어 있었고, 유럽에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임시정부는 대일전쟁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고, 이를 위해 전시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가 전시태세를 갖추기 위해 추진한 대표적인 사업이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하 광복군으로 약칭)의 창설이었다.
임시정부가 광복군의 창설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기강에 도착한 직후부터였다. 임시정부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초급장교 양성과 1개 연대 규모의 군대를 편성한다는 군사활동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915)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지역이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중국대륙 여러 곳으로 옮겨다녀야 했고, 계획한 군사활동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기강에 도착하면서 이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복군의 창설은 한국독립당에 의해 계획, 추진되었다. 기강에서 3당이 통합을 추진하면서 광복군 창설을 주요 현안으로 결정하였다. 당이 추진해 갈 장단기 정책을 논의하면서 “국방군(國防軍)을 편성하기 위해 국민의무병역을 실시한다”(당강 6조), “장교 및 무장대오를 통일 훈련하여 광복군을 편성할 것”(당책 3조)이라 하여,916) 광복군 편성을 한국독립당이 추진해 나갈 당면 목표의 하나로 결정한 것이다.
광복군 창설 준비는 크게 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병력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에는 군대를 편성할 만한 인적 자원이 없었다. 1920년대 이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등을 비롯한 각종 군관학교를 통해 양성한 군사인재들이 있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청천(李靑天)·이범석(李範奭)·김학규(金學奎) 등과 같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이 중국관내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지만, 이들은 대부분 군사간부들이었다. 실제 병력이 될만한 인적 기반이 없었던 것이다.
임시정부가 병력을 확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안은 일본군 점령지역에 이주해 있던 한인청년들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군 점령지역인 베이징(北京)·텐진(天津)·스쟈좡(石家庄/石家莊) 등을 비롯하여 화북지역에는 약 20만에 달하는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다.917) 이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한다는 것이 임시정부의 방안이었다. 1939년 7월 국무회의에서는 일본군 점령지역에 들어가 한인청년들을 모집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기구로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구성하였다. 조성환(曺成煥)을 단장으로 한 군사특파단은 대부분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던 군사간부들과 중국의 군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그해 11월 섬서성 시안(陝西省 西安)으로 파견되었다. 시안/서안은 화북지역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특파원들을 일본군 점령지역으로 들여보내 한인청년들을 모집하고자 한 것이다.
서안에 도착한 군사특파단은 화북지역의 한인교포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招募活動)을 시작하였다. 1940년 6월 이준식(李俊植)을 주임으로 하여 노태준(盧泰俊)·안춘생(安椿生) 등의 단원들이 산시성(山西省)으로 진출하였고, 이들은 중국군 제2전구(第2戰區) 사령관인 옌시샨/염석산(阎锡山/閻錫山)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 제41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린펀/림분(临汾/臨汾)·커난포/극난파(克难坡/克難坡) 등지를 중심으로 초모활동에 들어갔다.918) 초모활동은 일종의 비밀지하공작이었다. 단원들이 비밀리에 일본군 점령지역으로 들어가 그곳에 거점을 확보하고, 이를 근거로 그곳에 있는 한인청년들을 포섭하여 오는 일이었다. 이러한 초모활동을 통해 병력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 초모(招募) : 불러서 모음. 의병을 모집함
둘째는 재정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재정의 마련은 주로 미주동포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임시정부는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면서 1940년 2월 외무부장 명의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비롯한 미주지역 여러 단체들에 공문을 보내,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한다는 것을 알리고, 이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기 시작하였다.919)
임시정부의 재정지원 요청에 대해 미주동포들은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국민회의 기관지인≪신한민보(新韓民報)≫는 “광복군 조직은 3·1운동 이후 처음 있는 큰 사건”이라며 광복군 창설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힘이 있으면 힘을, 돈이 있으면 돈을 내라”고 하면서,920) 모금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1940년 5월 한국독립당이 창당된 후 하와이 애국단(愛國團)과 단합회(團合會)가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로 개편되면서, 이들 단체는 그 조례에 “경제적 책임을 부담함”이라 하여921) 광복군 창설에 대한 경제적 후원을 자임하기도 하였다.
셋째는 중국정부를 대상으로 광복군 창설에 대한 인준과 지원교섭을 전개하였다. 중국 영토내에서 군대를 편성하는 데는 중국정부의 승인과 양해를 얻어야 했고, 또 광복군 편성과 운영에 많은 경비가 소요됨에 따라 중국측에 재정적 원조를 요청할 필요도 있었다. 중국과의 교섭은 주로 중국국민당의 한국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광복군 편성이 중국의 항일전(抗日戰)에 유익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김구는 주쟈화/주가화(朱家驊)를 비롯한 중국측 인사들에게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편성하여 대일전을 수행하고, 일본군에 있는 한적사병(韓籍士兵)들을 빼내면 적(敵)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과 “화북을 안정시키려면 먼저 동북(東北)을 수복해야 하고, 동북을 수복하려면 한국독립을 원조해야 한다”고 하면서,922) 광복군의 창설과 이에 대한 원조를 교섭하였다.
* 한적(韓籍) : 한국계
이러한 교섭은 중국의 한국담당자들에게 상당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주쟈화/주가화·쉬언청/서은증(徐恩曾)·캉저/강택(康泽/康澤) 등 한국담당자들 사이에서 오고간 공함들에서 “한적사병을 책동해서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한다면, 이것은 직접 우리 나라의 항일전쟁(抗日戰爭)에 유익할 것”이라는 것과 이를 위해 임시정부를 원조해주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던 것이다.923) 한국담당자들은 이러한 의견을 장제스/장개석(蔣介石)에게 보고하였고, 장개석은 이를 인준하였다. 한국담당 책임자인 주가화는 “한국의 여러 정당이 통일되기 전이라도 저들로 하여금 즉시 공작을 전개하도록 해주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라는 의견을 개진하였고, 이에 대해 장개석은 중국 군사위원회 참모총장인 허잉친/하응흠(何应钦/何應欽)과 접촉하여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924)
* 공함 : 공사(公事)에 관하여 왕래하는 문서나 편지를 통틀어 이르는 말
임시정부는 광복군 창설계획서를 작성하여 중국정부에 제출하였다. 1940년 5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 명의로<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韓國光復軍編練計劃大綱)>을 주가화를 통해 장개석에게 제출한 것이다.925) 이 계획대강의 핵심은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편성하여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으로 중국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전개한다는 것이고, 중국정부에 광복군 창설에 대한 인준과 재정적 원조를 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장개석은 이러한 계획을 승인하였다. 5월 중순 “한국광복군이 중국항전에 참가한다”는 전제하에 광복군 창설을 승인한다고 하면서, 중국 군사위원회 군정부(軍政部)로 하여금 이에 대한 조속한 조치를 하도록 지시한 것이다.926) 이로써 광복군 창설계획은 중국 최고 영수인 장개석의 비준을 얻게 되었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는 내부적으로 광복군 창설에 필요한 구체적인 작업을 진행하였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이청천·유동열·이범석·김학규 등을 중심으로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들로 하여금 광복군 창설에 대한 구체적인 실무작업을 추진하도록 한 것이다. 이들은 우선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만주독립군 출신의 군사간부들과 중국의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는 한인청년들을 소집하여 총사령부를 구성한다는 것과, 이를 기반으로 하여 1년 이내에 3개 사단을 편성한다는 부대편성 방안을 마련하였다.927)
광복군 창설 준비가 완료되자, 임시정부는 광복군 창설을 대내외에 공포하였다. 1940년 9월 15일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발표한<한국광복군선언문>이 그것이다.928) 이 선언을 통해 임시정부는 9월 17일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 그리고 1940년 9월 17일 총칭/중경(重庆/重慶)의 가릉빈관(嘉陵宾馆/賓館)에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임시의정원을 비롯하여 중국측 인사와 각국 외교사절들이 참여한 가운데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929) 총사령부성립전례식이 곧 한국광복군 창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광복군은 지휘부인 총사령부를 구성하여 창설된 것이고, 이후 병력을 모집하여 단위부대로 지대(支隊)를 편성해 나간다는 방침이었다. 창설 직후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3개 지대를 편성하였다. 총사령부는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지대장 김학규 등이 임명되어 단위부대 편제를 갖추었다. 당시 총사령부의 간부와 지대장들은 모두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군사간부들로서, 독립군 출신들을 근간으로 하여 광복군을 창설한 것이다.
* 지대(支隊) : 본 부대에서 갈라져 나와 있는 소규모 부대
주
915) 군사위원회는 ‘속성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최단 기간 내에 초급장교 200명을 양성하고, 기본군대로 1개 연대를 편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한 사업비로 37만 원의 예산을 책정하였다. 당시 37만 원이란 금액은 임시정부 1년 예산의 65%에 해당되는 것으로 임시정부가 군사사업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국회도서관,≪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247쪽).
916)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자료(資料)3(1968), 405쪽.
917) 거츠펑(葛赤峰),<조선혁명기(朝鮮革命記)>(추헌수/秋憲樹,≪자료한국독립운동(資料韓國獨立運動)≫1), 114쪽.
한지성(韓志成),<목전환경과 조선의용대금후공작(目前環境與朝鮮義勇隊今後工作)>(≪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제37기, 1940. 5).
918) <1942년 군무부 군사보고(軍務部 軍事報告)>(국회도서관,≪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고(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776쪽.
919) ≪신한민보(新韓民報)≫, 1940년 2월 29일.
920) ≪신한민보(新韓民報)≫, 1940년 6월 20일.
921) 김원용(金元容),≪재한한인50년사(在美韓人50年史)≫(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8, 1976, 734∼735쪽).
922) 1940년 2월 25일자로 쉬언청(徐恩曾)이 주쟈화(朱家驊)에게 보낸 공함(중앙연구원근대사연구소/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국민정부와 한국독립운동사료(國民政府與韓國獨立運動史料)≫, 대만, 1988), 206∼207쪽.
923) 1940년 2월 21일자로 캉저(康泽/康澤)이 쉬언청(徐恩曾)에 보낸 공함(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국민정부와 한국독립운동사료(國民政府與韓國獨立運動史料)≫), 205쪽.
1940년 2월 25일자로 쉬언청(徐恩曾)이 주쟈화(朱家驊)에게 보낸 공함(중앙연구원근대사연구소/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국민정부와 한국독립운동사료(國民政府與韓國獨立運動史料)≫), 206∼207쪽.
924) 1940년 3월 2일자로 주쟈화(朱家驊)가 장제스(蔣介石)에게 보낸 공함(중앙연구원근대사연구소/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국민정부와 한국독립운동사료(國民政府與韓國獨立運動史料)≫), 209쪽.
925) <한국광복군성립경과사실(韓國光復軍成立經過事實)>(≪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조소앙 편/趙素昻篇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26쪽.
926) <한국광복군성립경과사실(韓國光復軍成立經過事實)>:1940년 5월 18일자로 주쟈화(朱家驊)가 김구(金九)에게 보낸 공함(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6), 653∼654쪽.
927) 한시준(韓詩俊),≪한국광복군연구(韓國光復軍硏究)≫(일조각, 1993), 86∼87쪽.
928) 대한매일신보사,≪백범김구전집(白凡金九全集)≫6, 294쪽.
929) 한시준, 앞의 책, 89∼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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