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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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2. 산포수 의병부대의 결성과 항전
(5) 운승리(雲承里) 전투
갑산 전투에서 의병부대의 기계(奇計)에 참패한 일제의 위신은 크게 추락하고 말았으나 반대로 의병들의 활동은 더욱 고양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일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기계(奇計) : 기묘한 꾀
“금일에 이르러서는 설유(說諭) 기타 보통의 방압(防壓) 수단은 그 효과가 없고 형세는 날을 따라 나쁘다.… 일반의 상황은 금후 쉽게 평온해 지지 않을 것 같으며 우편 전신취급소는 수비대 구내로 이전하기로 협의 결정 하였다.”
-일본인 함흥 경찰서장의 통감부 경무국장에게 보내는 비밀 보고문서에서-
* 설유(說諭) : 말로 타이름
* 방압(防壓) : 하지 못하게 막고 억누름
갑산 전투 이후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이웃의 단천(端川)군을 습격할 계획을 짰다. 단천에는 일진회원 출신 유문경(劉文卿)이 군수로 있었으므로 삼수·갑산·북청 등지에서 피난한 일진회원들이 많이 몰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일진회원들이 사존이나 풍헌·촌장으로 활동하며 가렴주구에 앞장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군수 유문경은 부패·탐학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한 이유로 당시 단천에 살고 있던 일반 주민들 사이에는 의병부대가 습격해 올 지 모른다는 풍문이 많이 떠돌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 당국도 바짝 긴장해서 의병들의 동태 파악에 주목하고 있었다.
* 사존 : 향교의 제관 ?
* 풍헌(風憲) : 조선 시대에, 유향소에서 면(面)이나 이(里)의 일을 맡아보던 사람
* 가렴주구 :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음
* 탐학 : 탐욕이 많고 포학함.
홍범도와 차도선 등 약 200명의 의병들은 일진회원 응징 계획에 따라 단천으로 진출하였다. 그 뒤 홍범도는 휘하의 한 부대로 하여금 친일파가 행세하고 있는 곳을 색출하여 처벌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단천군의 수하사(水下社) 운승리(雲承里)라는 마을이 그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운승리의 촌장은 일진회원인 최성학(崔成學)이었고 운승리 원충동(元忠洞)은 마을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매국적 일진회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 수하사(水下社) : 수하면
마침내 1908년 1월 22일 단천의 친일 매국적을 처단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이 벌어졌다. 홍범도·차도선 막하의 한 부대 약 70명은 이날 운승리에 진격하여 촌장 최성학이 일제의 주구로 활동하며 받은 일본돈 50원과 은화 60원을 군자금으로 압수하였다. 또 이들은 원충동에 살고 있던 악질 일진회원 조정수(趙正洙) 등 4명을 처벌하기 위해 포박하였다. 의병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일제의 침략과 의병항쟁의 당위성을 설명하였으며 일제에 협력하는 자는 의병의 응징을 받는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의병들은 그 날밤 운승리에서 유숙한 뒤에 23일 아침 일진회원 4명을 호송코자 했다. 그런데 운승리에 있던 일진회원의 밀고로 23일 오전 9시경 일본군경 합동 약 30명의 ‘토벌대’가 불의에 내습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의병대는 약 두 시간을 완강하게 저항하여 적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히며 싸웠으나 전황이 불리하여 결박한 일진회원 4명을 그대로 남겨둔 채 퇴각하고 말았다. 이 때 의병 5명이 전사하였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운승리 전투 이후 철수해서 본대에 합세한 의병들과 함께 이들을 추격해 온 일제 토벌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요격하여 많은 피해를 주며 분전했다. 즉 운승리에서 서남방으로 약 2km 떨어진 가농리(加農里) 모란촌(牡丹村) 부근의 고지에서 적을 불시에 기습하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제 토벌대는 많은 손상을 보았지만 의병도 약 10명이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이 전투로 큰 타격을 받고 의병대의 야습이 무서워서 모란촌에 숙박하지 못하고 다시 운승리로 도망하여 주둔할 정도로 의병의 위세가 적을 압도하였다.
우리가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홍범도 의병부대가 단순한 항일투쟁만을 하지 않고 봉건적 수탈에 앞장선 부패 관리 등을 처벌하는 반봉건 투쟁도 동시에 벌였다는 사실이다. 즉 단천군은 친일 군수 유문경이 부임한 이래 같은 일진회원을 각급 관리로 임용하였기 때문에 부정이 마음대로 자행되어 군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그러므로 홍범도 의병대는 이들의 부정과 매판적 행위를 응징하고 그들이 착복한 자금을 군자금으로 압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의병들이 단천을 습격한 뒤 군수 유문경이 1908년 4월경에 부정 혐의로 함경남도 재판소에 체포되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특히 유문경이 군수 직책에서 파직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단천 군민들이 앞으로는 일진회원을 군수로 임명치 말라는 대대적 청원을 정부 당국에 올렸던 것도 주목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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