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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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2. 산포수 의병부대의 결성과 항전
 
(3) 삼수성(三水城) 전투
 
후치령 전투 직후 홍범도와 그의 아들 양순(홍양순)은 의병들의 탄환이 고갈되어 작전 수행에 지장이 초래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후치령으로 갔다. 왜냐하면 후치령 주위에 널려 있는 수십 명 일본군의 전사자 시체에서 탄환을 빼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일본군경이 시선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어서 대단히 위험했다. 두 부자는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밤에 전장에 침투하였다. 이러한 모험 끝에 범도(홍범도)와 양순(홍양순)이는 수천발의 탄환을 찾아서 의병들이 모인 장소로 가져올 수 있었다.
 
엄방동에서 70여 명의 의병대와 합류한 홍범도와 양순(홍양순)이는 의병들에게 186발 씩의 탄환을 지급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의병들의 전의를 크게 고무·추동시켰다. 홍범도와 차도선 의병부대는 후치령 전투 이후 상당한 병력의 손실이 있었지만 다시 주위에 격문을 발송하여 포수와 농민·해산군인 등을 모집하여 군세를 강화하였다. 후치령 전투는 어떤 의미에서 포수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단순한 화승총 탈환 투쟁으로부터 일제를 우리나라에서 몰아내기 위한 본격적인 의병항쟁으로 발전시키는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이 전투에 참가한 포수의병들은 실전을 경험하면서 보다 원활한 전투수행을 위해서는 의병부대의 철저한 조직체계 구성이 필요하고 참전 포수의병 개개인의 투철한 항전의지와 전투원으로서의 엄격한 자질이 한층 더 많이 요구된다는 귀중한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다.
* 추동 : 어떤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고무하고 격려함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의병의 수가 증가하고 앞으로 집요하게 의병들을 추적 ‘토벌’하게 될 일본군과의 접전을 예상하여 12월 초에 그들의 조직체계를 더욱 정연하게 재편성하였다.
 
후치령 전투 직후 홍범도 의병부대에 참가한 김병호(金炳浩: 1882년생, 당시 25세)의 회상과『홍범도의 일지』,그리고 일제의 정보문서에 따르면 재편성한 의병대의 가장 큰 변화는 부대 조직의 체계화 및 지휘부 감찰기능의 보강이었다. 즉 구한국군 편제를 참고해서 분대-소대-중대의 편제를 갖추었고 지휘부에는 군중기찰의 업무를 맡는 도검사(都檢事) 제도를 둔 것이었다. 도검사는 의병대오 내의 감찰과 군사규율을 취급하고 그 외에 민족 반역자인 일진회 회원 등을 체포하여 그 죄상을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의병장은 도검사가 조사한 사항을 근거로 의병 가운데 규율을 위반한 사람과 기타 외부의 범죄자들에게 적당한 처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의병대에는 이밖에 군량도감(軍糧都監)이 있어서 의병들의 식량보급을 맡았다.
 
이때의 편제를 보면 말단의 최소 조직에 25명으로 구성되는 분대를 두고 그 지휘자인 분대장을 하사(下士)라고 하였다. 그리고 2개 분대를 1개 소대(50명)로 구성하여 지휘자인 소대장을 오십장이라고 했다. 또 2∼3개의 소대로 1개 중대(100∼150명)를 이루게 하고 그 지휘자인 중대장을 참위(參尉)라고 하였다. 비록 민간 포수들의 집합체라고는 하지만 중대장 등 지휘관의 임명시에는 지휘자로서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일종의 임명장인 사령장(離令狀)을 주어 엄격한 격식을 갖추었다.
 
이와 같이 의병부대의 전열을 재정비한 홍범도와 차도선은 12월 중순 경에는 종전의 수동적인 진지 매복과 저격 위주의 공격에서 과감히 벗어나 능동적으로 기동하며 일본군을 기습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일본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후치령 전투 이후 의병들이 대폭 증모되었으나 거기에 소요되는 무기와 장비가 많이 모자랐으므로 일본군의 보급품을 빼앗아 군수품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미 12월에 접어든 개마고원의 날씨는 매우 추워서 월동장비나 피복·식량과 의약품 등이 절실히 필요했다는 점도 있었다. 이리하여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갑산의 상남사에서 북청의 안산·성대·덕성사 등지의 고산준령을 거쳐서 1907년 12월 중순에는 북청읍 부근까지 신속히 행군하여 일본군이 자주 출몰하는 지점을 선정하고 공격의 기회를 기다렸다. 약 일주일 내외 사이에 거의 100km가 넘는 거리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북청읍까지 온 것이다.
* 증모 : 정원보다 더 늘려 모집함
 
홍범도와 차도선 등 200여 명의 의병들은 마침내 그달 15일 북청읍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항리 근처에서 일본군 화물호송병과 우편물 호위병을 습격하여 병졸 아라이 모토요시(新井元吉, 신정원길) 등 3명을 살상하고 많은 물자와 무기를 노획하였다. 특히 이때 의병들은 일본군이 혜산 방면으로 운반하던 탄약상자 40여 개를 빼앗는 커다란 전과를 거두어서 의병투쟁에 큰 활력소가 되었던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의병부대의 장항리 승리 이후 북청에서 삼수·갑산·혜산 방면으로 가는 교통로가 일시 차단되어 북청을 거치는 일제의 우편물 수송이 상당기간 중단되었다. 이 사실은 북청 주변의 여러 고을에 순식간에 퍼져나가 주민들 사이에서는 글자 그대로 의병들의 의로운 투쟁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 수비대는 의병의 토벌은 커녕 그들의 보급품과 우편물이 위협을 받게 되자 16일 아오또(靑砥, 청지) 대위 이하 50여 명을 출동시켰지만 의병들은 이미 잠적해 버린 뒤라 거의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이무렵 홍범도와 차도선은 함흥 주변 지방의 포수들과 각 동리의 유지 및 연장자들에게 원수의 직책으로 자기들의 의진에 합세할 것을 권유 내지 명령하는 다음과 같은 격문을 발송하였다.
 
「함흥 상하의 원산·문천·영원·희천·고원·맹산의 각사(社)에 고하노라.」
 
“알리노니 무릇 의병이란 것은 자고로 있어왔던 법이다. 이제 북청에서부터 삼수·갑산·이원·단천·홍원·길주까지의 7읍은 의병진영을 이루었는데, 유독 함흥 각사의 포수들이 아직도 오지 않았은즉 이것은 무슨 연유이냐? (포수들은) 며칠 내로 속히 성진(成陣)하고 각사와 리의 존위와 도감은 대진(大陣: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를 말함) 가운데로 참가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각 사와 리의 유력자와 포수 등은 장차 포살당하는 지경에 이르리라. 그래서 이 글로써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혹시 각사와 리의 각처에 이 글이 도달하지 않아서 알지 못하는 폐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를 알리는 것이다.”
* 성진(成陣) : 진영을 만들다. 진용을 갖추다. 무리 짓다
 
홍범도와 차도선 등 의병들은 장항리 부근에서 많은 물자를 노획하고 일제의 치안을 교란하는 등 매우 큰 성과를 거둔 뒤에 재빨리 그곳에서 철수하여 깊숙한 골짜기인 삼수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일제는 의병대를 추적하여 ‘토벌’하려고 삼수와 혜산진 방면으로 병력을 출동시켰다. 즉 12월 18일 함흥 수비대의 가미쯔끼(上月) 기병 소위 이하 16기의 기병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홍범도 등은 삼수군 중평장(仲坪場)에서 그들을 요격하여 격전을 치른 끝에 상당한 손실을 입히고 다시 삼수 방면으로 이동했다.
* 가미쯔끼(上月) --> 고즈키(上月) ?
 
12월 하순에 이르러 홍범도는 원성택(元成澤)으로 중대장을 삼고 각지에 격문을 보낸 이후 모집된 상당한 숫자의 포수들을 의진에 편입시켜 군세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 결과 12월 하순에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거의 수백 명에 이르는 대부대원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제 의병들은 과감하게도 삼수성에 쳐들어갈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삼수성에는 상당수의 일본군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군수 유등이 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또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겨울 날씨에는 일정한 주둔지가 있어야 한다는 실질적인 동기에서의 필요성도 있었다.
 
마침내 홍범도 의병부대는 12월 29일 삼수성에 진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삼수성을 점령하였다. 그들은 일진회 회원을 색출하여 처벌하였으며 일제의 주구인 삼수 군수 유등을 효수하여 군내외에 의병들의 철석같은 의지를 과시했다. 삼수성에는 일본군이 국경 경비와 의병토벌을 위해 비축해 둔 많은 군수물자가 있어서 의병들의 무장강화와 식량 확보 등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의병들은 이때 삼수성에서 일본군의 소총 수십 자루와 탄약 100여 상자를 빼앗았고 이미 해산되었던 한국군 진위대 사용의 베르던식 소총 수십 자루, 탄환 15상자 등도 동시에 획득하였다. 특히 홍범도는 이때 빼앗은 베르던식 소총을 애지중지하며 이후의 전투는 물론 해외로 망명할 때에도 소지하고 건너가 거의 수십 년을 사용하며 절묘한 사격솜씨를 자랑하게 되었다.
* 베르던 --> 베르단 (Berdan)
 
삼수성을 점령당한 일본군은 성을 탈환하려고 연말인 12월 31일에 가미쯔끼(上月) 기병 소대 및 혜산진 수비대·갑산 수비대의 연합병력 70∼80여 명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홍범도 의병부대는 수적으로도 적을 압도한데다가 성을 점령하면서 얻은 근대적 무기를 보강하여 화력이 강화되었고 성이라는 유리한 건조물을 방어에 활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일본군이 아무리 잘 훈련되고 성능이 좋은 무기를 갖고 있다고 해도 성안에 있는 의병들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포위공격 해오는 일본군과 대치하여 2∼3일 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패퇴시켜 버렸다. 일본군이 성벽에 의지하여 맹공을 퍼붓는 의병들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 가미쯔끼(上月) --> 고즈키(上月) ?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절반이 넘는 병력이 살상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비겁하게도 어두운 틈을 이용하여 혜산진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의병들은 이 전투 직후 일본군의 소총 18정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는 이 전투 직후 보고문서에서 그들의 패배를 아래와 같이 호도하여 얼버무렸다.
 
“31일 혜산진 및 갑산의 수비대와 협력하여 삼수를 포위 공격했다. 차도선이 인솔하는 폭도 약 400명은 삼수의 성벽에 의거하여 완강히 저항하였다. 약 3시간에 걸쳐서 공격했으나 몰아내지 못하고 탄약결핍으로 암야를 이용, 혜산진으로 퇴각하였다.”
-『조선폭도토벌지』164면에서-
* 암야 : 앞이 잘 보이지 아니하게 어두운 밤
 
일제는 여기에서 의병들의 숫자를 400여 명으로 보고하고 있다. 물론 이 당시는 의병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이 보고서는 그들의 패배를 감추기 위해 의병의 숫자를 다분히 과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전투 시간도 줄여서 보고한 것 같다. 홍범도는 삼수성 전투가 3일 정도 계속된 것으로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본군의 허위보고에도 불구하고 삼수성에서의 참패는 그들의 위신을 말할 수 없이 떨어뜨린 반면에 의병부대의 사기와 자신감을 크게 고양시켰고 함경도 일대에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명성을 드높이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삼수성 전투에서 의병부대가 대승을 거두기는 하였으나, 사상자도 꽤 생겼다. 김동운·성태일·노성극, 새골에 사는 홍병준·임태준 등 5명이 부상하고 최학선·길봉순·이봉준·조기석·홍태준·오지련·박봉준·김일보·최영준 등 9명이 전사하였던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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