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쟁의 연원과 자유시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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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볼셰비키혁명 후 몇 해 동안의 시베리아사정은 볼셰비키·멘셰비키·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입헌민주당(立憲民主黨)·시베리아자치파·적군·백군의 난투장으로 화하였고, 여기에 체코군단의 반란과 외국의 무력간섭이 겹쳐서 실로 파란만장의 광란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어느 쪽이 반드시 이긴다고 보증할 수도 없는 정세 속에서 한인사회도 혼미와 분열을 면치 못하였다.
 
전러시아한족회(韓族會) 중앙총회는 러시아 한인사회의 단일 중앙자치기관이었는데 1918년 5월 니콜스크에서 제2차 대회를 개최하고 러시아 국내에 있어서의 한인의 정치적 중립을 선언했다. 전러시아한족회 중앙총회는 1917년 5월에 창립되었는데 창립총회에서 제2차 러시아혁명(1917년 3월) 후의 임시정부를 지지하여 축전을 보낸 바 있었다. 그로부터 5개월 후에 볼셰비키가 임시정부를 타도했기 때문에 한인사회는 얼마 동안 정관(靜觀)하다가 결국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 정관(靜觀) : 조용히 냉정하게 관찰
 
적·백파간의 국내전쟁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지방마다 정권이 생기고 그 정권은 지방마다의 세력 분포에 의하여 혹은 백이고 혹은 적이며 또는 사회혁명당과 시베리아자치파의 반적반백의 중간정권 그리고 백파와 중간파의 합작연합 또는 적파와 중간파의 잠정적 제휴 등등 실로 천태만상일 뿐만 아니라 전세의 변동에 따라 오늘은 백군, 내일은 적군이 들어오는 실정이므로 엄격한 의미의 중립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1918년 4월 일본군의 시베리아 조기상륙(早期上陸)으로 인하여 한인사회의 정치적 자세를 정립하는 데 또 하나의 어려운 장애요인과 조우할 수 밖에 없었다. 항일투쟁은 마땅히 전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제출병군의 위세를 도외시할 수는 없었다. 실로 복잡하고 곤란한 환경 속에서 일단 중립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각 지방에서는 그 지방의 대세에 따라 중립이 유린되고 말았다.
 
볼셰비키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 시베리아에서는 통상 민족좌익운동으로 불리는 방편적인 공산주의운동의 조직과 처음부터 볼셰비키당과 직결된 한인공산주의 조직이 출현하였다. 전자는 1918년 6월 26일 하바로보스크에서 조직된 이동휘·박진순(朴鎭淳)·김립(金立) 등의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말하고, 후자는 1919년 1월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金哲勳)·오하묵 등에 의해 조직된 이르쿠츠크공산당 한인지부를 말한다. 양자는 후일 상해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產黨)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대립하여 레닌정권에 경쟁적으로 접근하는 투쟁을 벌였는데 자유시사변은 바로 이 양파의 대립투쟁과 표면적으로는 직결되었다.
 
시베리아 한인사회의 정치적 중립선언은 러시아적군의 동점(東漸)으로 구체적으로 파괴되었다. 1920년 1월 26일 안드레이파의 적군이 니콜스크를 점령했는데 여기에는 약 200명의 한인무장대가 끼여 있었다. 이어서 같은 해 2월 5일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하는 볼셰비키계의 노문(露文) 신문은 레닌정부가 한국혁명을 촉진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말하면서 한국의 망명 인사들이 조국으로 환국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선동했다. 이 신문은 주장하기를 1919년 12월 7일 레닌정부가 러시아의 한인독립운동자들과의 밀접한 상호 제휴관계를 확인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고 했다. 즉
* 동점(東漸) : 점점 세력을 넓혀 동쪽으로 옮기어 감
 
현재 모스크바는 안정되고도 유일한 한인의 피난처이다. 한국국민동맹회(韓國國民同盟會)는 한국혁명을 촉구하며 독립회복의 목적을 가지고 러시아 내에 조직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원조하고 러시아 내에 거주하는 한인 노동자들은 자본가, 압제자와 대전하는 제3인터내셔날에 가입하게 되었다. 한국인민은 모두 일어나서 노농정부와 악수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통의 노력에 의하여 일본인을 블라디보스톡 및 한국으로부터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 날은 다가오고 있다. 한국인들이여 최후의 노력을 다하라.
* 구축(驅逐) : 쫓아냄
 
이상은 일제 조선총독부 경무국 「재외조선인개황(在外朝鮮人槪況 ; 1928년)」과 「고등경찰연표(高等警察年表)」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러시아 한인사회의 연구가 코로라즈의 『재소련한국인들의 생태』에 보면 일시 시베리아 한인사회의 총수적 기관이었던 대한국민의회의 권위를 계승한 것은 모스크바의 한인동맹(韓人同盟)이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블라디보스톡 노문신문에서 말하는 한국국민동맹회와 동일한 지의 여부가 궁금하다. 일제 조선총독부 자료(「고등경찰연표」)에는 한국국민동맹회와 한인동맹은 동일한 조직체로 나타나 있다.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2월 종래의 전러시아한인총회를 개칭한 시베리아 한인사회의 자치정부이다.
* 코로라즈 (W.Kolarz)
 
전선이 극동시베리아로 압축되면서 일제를 자극하는 장면은 날로 늘어났다. 1920년 2월 26일 그로데코프역전(驛前)에서 카자크 주민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집회에 참가한 한인들은 “우리도 총을 쥐고 일본을 타도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바 있고 같은 해 3월 1일에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에서 성대한 3·1운동 경축대회가 있었는데 이 식전(式典)에서는 당지 육해군총사령관 그라고웨쯔키장군의 축사가 그의 부관에 의하여 대독(代讀)되었다. 그 내용은 “한국혁명에 다대한 촉망을 걸고 본 사령관은 백방으로 지원할 것이다. 일본군을 시베리아에서 철수시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국독립이 혁명적 당에 의하여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언명되었다.
* 그로데코프 (Гродеково,Grodekovo) : 포그라니치니(Pogranichny, Пограничный)의 옛 지명
* 카자크 (Cossacks)
 
또한 3월 12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극동공산당 임시위원회의(極東共產黨臨時委員會議)에는 6명의 한인이 참가하였는데 이 회의의 결의사항에는 한인문제에 관한 다음 3개항이 들어 있었다.
 
1. 극동의 추요(樞要) 지점에 있는 한인의 각 단체는 연합하여 특별한 배일 기관을 조직할 것
2. 배일기관의 조직은 우라쏘브, 라쏘브, 쿠베르만 등 3인에게 위임한다.
3. 한인혁명당들과의 연락은 동양학원(東洋學院 ; 블라디보스록 동양대학/東洋大學 전신) 학생 우라쎄비치, 우쯔낀 2인에게 위임한다.
* 배일 : 일본 사람이나 일본의 문물, 사상, 언어, 정치 따위를 배척함
 
이 밖에도 1920년 4월 1일 일본출병군의 중심지인 하바로보스크에서는 볼셰비키의 시위행렬이 있었는데 여기에 500여 명의 한인이 가담 하였다.
 
볼셰비키혁명의 동점과 시베리아 한인사회의 이에 대한 가세는 일본 출병군을 더욱 초조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군의 분노는 폭발의 목표물을 찾기에 혈안이었는데 믿었던 반혁명세력(白軍)은 쫓기고 몰려서 이제는 연해주의 마지막 거점마저 붉은 바다로 화해 가는 터라 일본인의 특수한 기질은 마침내 폭발하였다.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톡의 모든 볼셰비키기관을 섬멸해 버렸다. 주변도시도 마찬가지의 운명이었다. 일제출병군의 작전은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을 비롯한 주변일대의 한인 밀집지대를 기습하여 눈의 가시였던 소위 불령(不逞) 한인단체들을 소탕했다. 이때 한인사회는 야만적인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 이것이 악명높은 ‘4월참변’이다. 일제의 기록에 보면 “1920년 4월 아군은 적군(赤軍)을 무장해제하고 불령선인들은 대부월(大斧鉞)의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불령거괴(巨魁)는 벽지로 달아났고 불령단체들은 하루 아침에 해산 자멸하였다”고 했다(「만주 및 시베리아지방에 있어서의 조선인 사정(滿洲及西比利亞地方における朝鮮人事情)」).
* 연해주 4월 참변 : 1920년에 연해주에서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학살한 사건
* 대부월(大斧鉞) : 큰도끼
* 거괴(巨魁) : 두목, 괴수
 
그러나 일제의 시베리아출병군은 빨치산의 저항과 극동공화국에서 편성된 인민혁명군(人民革命軍)의 공격으로 반혁명군(白軍)을 부지못하고 1920년 7월 25일에는 치따에서 철수했고. 10월 중순에는 자·바이칼 지역에서의 퇴각을 완료했다.
* 부지 : 멈추지 않다
* 치따 = 치타 (Chita, Чита)
 
볼셰비키의 전략에서 볼 때 시베리아 대륙에서 20만의 한인을 동원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며 현실적으로 유용한 인적 자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경우에 이동휘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다. 그는 이미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출중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관록을 수립하였다. 이 한 사람을 포섭하는 것이 한인사회의 반일민족주의 역량에 대한 볼셰비키의 영향을 심화시킬 수 있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단순히 한인의 민족주의를 한인사회당이라는 이름의 용기(容器)속에 집어넣어서 적당히 변질시킨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먼 장래를 위한 볼셰비키의 특설 용광로의 존재에 불과하다.
 
이동휘당은 볼셰비키의 의도와 현실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볼셰비키의 당면한 긴급성은 국내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반혁명세력을 공공연히 지원하는 일본출병군을 물러가게 해야 했다. 전투에 이기면서 외교를 병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에 시베리아 한인을 반일전선에 동원하여 러시아 반혁명세력을 공격하는 것은 간접적인 반일전쟁이었다. 일본출병군은 러시아 반혁명세력을 도와서 볼셰비키혁명을 좌절시키려 하기 때문에 볼셰비키로서는 대일전쟁을 벌여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시베리아의 한인이 일본군과 직접 충돌하는 것이 일제의 도전구실을 합리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레닌정권으로서는 고민이 없지 않았다. 일본과 전쟁하는 것은 레닌정권의 존명(存命)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일제의 도전구실을 막아야 했다. 이동휘당으로 하여금 한인사회의 친일화를 막고 볼셰비키와의 협동으로 일제의 지원 하에 있는 러시아 반혁명세력과 싸우게 하는 것이 레닌정권의 현실적인 한인정책이었다. 고루한 민족주의자이건 기회주의적 공산주의 자이건 어느 쪽도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일제의 무력간섭 하에서 소비에트방위전선에 동원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그 누구도 온정적으로 맞아들이고 또는 적극적으로 끌어넣도록 힘써야 했다. 이동휘당을 유용한 우군(友軍)으로 동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존명(存命) : 살아서 목숨을 유지함. 또는 그 목숨
 
한편 1919년 1월 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한 바이칼호 이서(以西)의 한인들은 이르쿠츠크공산당의 한인지부를 결성했다. 이르쿠츠크공산당은 러시아볼셰비키당이었으므로 한인지부는 민족별 별동조직과 다름없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독립적 민족별 조작일 수 없다. 다만 볼세비키당의 통제 하에서 한인사회에 대한 정치공작을 맡게 된 것이다. 이 집단의 초창기 간부는 김철훈, 오하묵, 남만춘(南滿春), 박승만(朴承晚), 조훈(趙勳), 윤협(尹協) 등이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러시아귀화인들이며 러시아의 문물에 익숙해 있었고 볼셰비키의 의지도 어느 정도 체득하고 있었다. 이 집단의 역할은 볼셰비키혁명전선에 한인을 직접 동원하는 일이 일차적 사명이었다. 한인들을 러시아적군에 응소(應召)케 하며 자체의 무장조직으로 백군과 싸우는 것이 당면과업이었다. 이 집단은 초기에 레닌정권을 위해 말썽없이 충성을 바쳤고 그 대가로 상당한 정치적 신임을 얻었다. 그 기초 위에서 1919년 9월 전러시아한인공산당을 결성했다. 이때부터 이 집단의 명칭이 말하고 있듯이 전러시아의 한인을 조직대상으로 한다고 양언(揚言)했으며 이로서 그 존재는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 응소(應召) : 소집에 응함
* 양언(揚言) : 공공연하게 소리 높여 말함
 
시기적으로 이동휘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부임하기 위해 시베리아를 떠난 것과 때를 같이 한다. 이동휘당은 사실상 상해로 이전하였고 조직적 활동도 자연히 상해가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전러시아한인공산당이 보리스·스미야스키의 직접적인 관여 하에서(그를 고문으로 하여) 결성되었기 때문에 초기부터 이동휘당의 경쟁적 존재가 되었다. 보리스·스미야스키는 바이칼 이서(以西)의 시베리아에서 볼셰비키혁명에 두각을 나타낸 자로서 그 공에 의하여 코민테른의 초대(初代) 극동대표에 임명되었다. 그가 코민테른의 동양비서부장(東洋秘書部長)에 취임하여 시베리아의 한인문제에 관여하게 됨으로써 이동휘 등의 상해파와 김철훈 등의 이르쿠츠크파 간에는 치열한 경쟁적 파쟁에 들어갔다.
 
코민테른은 귀화인집단인 이르쿠츠크파에 대해서는 일가와 같은 가족 관념으로 대해 준 데 반해 비귀화인집단인 상해파에 대해서는 원래(遠來)의 귀빈을 대하는 것 같은 온정으로 대하였다.
* 원래(遠來) : 먼 곳에서 옴
 
한편 극동공화국 수상 크라스노·슈티코프는 극동시베리아에서 처음부터 볼셰비키의 수령이었으며 이동휘 등의 한인지도자들과 재빨리 악수한 자이다.
 
문창범 등의 대한국민의회는 처음에 이동휘 등과 일가적인 반일민족전선이었으나 이동휘당이 상해로 이전한 뒤에는 이르쿠츠크집단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집단은 시베리아 한인무장대 및 간도지방의 한국 독립군이 자유시에 집결하게 되자 치열한 군권투쟁에 들어갔다. 자유시 사변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레닌정권, 코민테른, 극동공화국, 일제 시베리아출병군까지도 관련이 있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파쟁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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