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인무력의 자유시집결과 군권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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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는 레닌집단이 파견한 극동공작원 그레고리노프 형제의 후원으로 1918년 6월 하바로브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창립하고 레닌정권과의 교섭을 유지하면서 북간도의 미샨/밀산에 한국군사관학교(韓國軍士官學校)를 설립하여 신병(新兵)을 훈련시켜 시베리아로 보냈다. 전선이 매일같이 격동했고 특히 일본의 출병 상황 하에서 시베리아에 양병기관을 두는 것은 위험천만의 일이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훈련하여 시베리아로 투입하는 방도를 취했을 것이다. 이때의 그러한 사정에 대한 일제의 조선군 사령부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이동휘, 문창범, 황병길(黃丙吉)은 뛰어난 군사지도자들이다. 니콜스크에 있던 이동휘는 최근에 밀산으로 가서 한국군사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사관학교장이 되어 구한국군의 장교들을 모아 신병훈련의 교관으로 채용했다. 그는 또한 시베리아와 중국 전역에 있는 비귀화인으로 만21세 이상의 모든 한국인에게 소집영장을 발부했다. 20원(元)세 또는 곡물세가 이 지역의 모든 한인가구에 할당되었다. 신병을 동원하는 지부가 치따(이강/李剛), 니콜스크(문창범/文昌範·안명근/安明根), 블라디보스톡(엄인섭/嚴仁燮), 스챤(이동휘/李東輝)에 설치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약 4천 명의 한국인들이 이미 독립군의 기치 하에 집결했다.
* 치따 = 치타 (Chita, Чита)
* 니콜스크(Никольск, Nikolsk) :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 Ussuriysk)의 옛 이름
* 스챤(Suchan, Сучан) : 파르티잔스크(Партизанск, Partizansk)의 옛 이름
 
1919 년 6월 14일(상시 보고서/上記 報告書) 이전에 그토록 많은 독립군이 이동휘 휘하에 집결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으나 이동휘가 볼셰비키와 손을 잡고 한인무력조직에 분주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적지 않은 독립군이 연해주의 볼셰비키전선에 가담한 것도 사실이다.
 
1920년의 4월 참변으로 블라디보스톡의 볼셰비키기관과 적군이 북방으로 후퇴했는데 이때에 연해주의 한인의병대도 행동을 같이 했다. 비교적 존재가 알려졌던 ‘이만대’ 혹은 ‘이만군대’라 불리는 것과 ‘다반대’ 혹은 ‘다반군대’ 또는 ‘만니요대’, ‘만니요군대’로 불리워졌던 한인무장대들이다.
* 다반 : Хабаровская область, Лазовский район, Р.Н.А село Александро-Михайловка, 하바로프스크 주, 라좁스키 구역, 알렉산드로-미하일로프카  https://cafe.daum.net/shogun/2DR/4914 
 
‘이만군’의 사령관은 김(金) 뾰똘, 부사령관은 박개서(朴介瑞)·김덕보(金德甫)였고 ‘다반군’의 사령관은 최(崔) 니콜라이였다. 오광선의 증언에 의하면 이 집단의 병력수는 각각 200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밖에 연해주의 한인부대로서는 ‘독립단군대(獨立團軍隊)’ 혹은 ‘독립군(獨立軍)’으로 불리는 한인무장대가 있었는데 사령관은 박(朴) 그레고리, 부사령관은 최(崔) 빠사이다. 이 집단의 병력수도 200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연해주의 한인무장대들은 임시흑룡주(黑龍州) 정부가 극동공화국으로 강화되고 볼셰비키세력이 확고해짐에 따라 자유시로 집결했다. 이것은 한인무장대의 자유시집결을 제의한 대한국민의회의 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한국민의회는 이 시기에 시베리아 한인사회의 정부로 자처하고 있었다.
 
1920년 3월 20일 알렉쎄프스크(자유시/自由市로 개칭/改稱)에서 흑룡주한인총회가 조직되고 발족과 동시에 군대모집에 착수했다. 당시의 흑룡주한인사회는 정세가 볼셰비키 편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이제는 한국독립운동의 안전지대가 흑룡주에 마련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흑룡주한인총회는 바로 이와 같은 정세의 상징이었다. 군대에 응모하는 사람이 속출하여 단시일 내에 약 400명의 1개 대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 자유시 = Alexeyevsk (Алексеевск) : 스보보드니 (Свободный, Svobodny)의 옛 지명
 
이 부대는 처음부터 러시아적군의 제도를 따랐는데 군정위원은 군대의 정치문화를 담당하고 지휘관은 군사면만을 담당했다. 군정위원에는 전희서(田希瑞) 대대장에는 승훈(承勳), 참모장에는 안훈(安勳)이 취임했다. 1920년 7월 1일 흑룡주한인총회는 제2차 대표회의를 소집하고 블라고베셴스크〔黑河〕로 이전해 온 대한국민의회를 봉대(奉戴)하기로 결의하고 군대를 이 기관에 인도하게 되었다.
* 블라고베셴스크 (Благовещенск. Blagoveshchensk)
* 헤이허(黑河) : 블라고베셴스크에서 아무르 강 건너편 남쪽에 있음    https://maps.app.goo.gl/9XeFYCjWJBdh9URdA 
* 봉대(奉戴) : 공경하여 높이 받듦
 
「고려혁명군대연혁」에는 “대한국민의회가 군대에 대한 일반교육의 급무를 위해 원동정부(遠東政府) 제2군단과 교섭하고 본 군대를 그 군단의 특립대대(特立大隊)로 편입하여 관할을 받게 하고 다만 정신적으로만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에서 지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일단 러시아적군에 편입된 이상 ‘정신적 지배’도 볼셰비키측에 있지 대한국민의회에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당시 대한국민의회는 볼셰비키세력권 내의 편의적 한인정부로 표면화된 존재이기 때문에 이 존재를 볼셰비키화하여 형식상의 민족무력일 뿐인 특립대대와 정신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은 있을 수 있다. 사실상 그렇게 되고 말았다.
* 원동정부(遠東政府) : 소련공산당 원동정부
 
러시아적군 제2군단 소속 특립대대인 자유시의 한인부대는 간부진을 개편하여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로 칭하게 되었다. 대대장에는 오하묵, 군정위원장에는 최고려(崔高麗)가 임명되었다. 오하묵은 당시 러시아적군 제2군단 제6연대장 겸 블라고베셴스크수비대장으로 있다가 수비대장을 겸한 채 한인보병 자유대대장으로 취임했다. 최고려는 대한국민의회 의원으로 있다가 군정위원으로 취임했다. 이때부터 자유대대는 의무적으로 공산주의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각 중대마다 공산당의 세포조직을 두게 되었다.
 
1920년 한 해 동안에 흑룡주의 한인사회는 볼셰비키화에 일보 더 구체적인 일정에 들어서고 있었다. 특히 군사조직에 있어서의 볼셰비키화는 더욱 촉진되었다. 자유시의 한인보병 자유대대는 연해주의 한인무장대나 간도의 한국독립군과는 달리 볼셰비키군대로서의 한인부대라는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점이 자유시에 집결하는 한인무력계에 심상찮은 갈등관계를 가져온 요인이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시베리아의 한인무장대 가운데 내부사정이 가장 복잡한 존재는 니항군대(尼港軍隊)이다. 이 군대는 처음에는 한인니항군대(韓人尼港軍隊)로 불리다가 자유시에 이동한 뒤에 사하린의용대로 개칭되었다. 사할린〔가라후토도/棒太島〕출신의 의용군이라는 뜻이다. 국내에서는 보통 사하린부대로 알려져 있다. 이 군대는 일본의 시베리아출병사(出兵史)에 유명한 니콜라예프스크사변〔니항사변/尼港事變〕과 더불어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 니항(尼港) = 니콜라옙스크 나아무레 (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 Nikolayevsk-on-Amur) 
 
1920년 1월부터 적색빨치산은 빈번히 니콜라예프스크를 습격했다.
 
이 때문에 반혁명세력인 백군은 일대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일본수비대는 백군을 엄호했으나 같은 해 2월 말 백군은 전원이 참살되고 말았다. 적색빨치산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일본군에 강박(强迫)하여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같은 해 3월 12일 양자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일본 해군부대는 쫓겨서 일본영사관에서 농성하게 되었는데 적색빨치산의 맹포격을 받아 석전(石田 ; 이시다) 영사부처 및 삼택(三宅 ; 미야께) 해군소좌(小佐) 이하 전원이 몰살되었고 육군부대 역시 5주야의 격전 끝에 전멸하고 말았다. 극소(極少)의 일본인 생존자는 일단 투옥되었다가 5월말 적색빨치산의 철수시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학살되었다. 이때의 적색빨치산의 두목은 뜨라삐찐이었다.
* 강박(强迫) : 강요하다, 핍박하다
* 뜨라삐찐 : 트랴피친 (Тряпи́цын, Tryapitsyn)
 
니콜라예프스크(이하 니항이라 함)에는 한인독신노동자들이 많았는데 1917년 3월 러시아 2월혁명 직후에 박병길(와실리 박/朴)을 회장으로 하는 고려인민회(高麗人民會)와 고려청년회(高麗靑年會)가 조직되어 반일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뜨라삐찐이 니항에서 적색빨치산을 조직하게 되자 박병길도 380여 명의 한인부대를 조직하여 뜨라삐찐과 협동관계를 취해 오다가 전술한 백군 및 일본인전멸작전에 가담하였다.
 
일제는 북부연해주파견대 제3함대의 주력 및 제3수뢰전대(水雷戰隊)의 출동과 하바로보스크에서 하강(下江)하는 육상군이 협력하여 1920년 6월 3일에야 니항을 점령하게 되는데 뜨라삐찐은 산길을 타고 퇴각하였고 박병길의 한인부대 역시 2대로 나뉘어 퇴각하였다. 1대는 흑룡강을 따라 남하하다가 일본군과 조우하여 격전을 벌였으나 인명피해는 적었다. 같은 해 8월 인에 도착한 이 1대는 3명의 대표(고명수/高明秀, 선우격?/鮮于墼외 1인)를 블라고베셴스크의 대한국민의회에 보내어 껠비(자유시 동북 700노리/露里에 있는 러시아인 촌락)를 향해 떠난 자기들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자기들을 오하묵의 한인보병 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라 함)에 임시로 편입하여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한국민의회는 즉각 자유대대에 소개하는 동시에 극동공화국 군부에 연락하여 이 군대를 자유대대의 1개 중대로 편입할 것을 알선했다(「고려혁명군대연혁」, 이하「고혁군」이라 함).
* 하바로보스크 -> 하바로프스크/하바롭스크 (Хаба́ровск, Khabarovsk)
* 노리(露里) : 러시아 거리 단위.  * 1노리(露里) = 1,066m
* 케르비 (Керби, Kerbi) 이메니 폴리니 오시펜코 (и́мени Поли́ны Осипе́нко, Imeni Poliny Osipenko)의 옛 지명
 
한편 뜨라삐찐과 함께 갔던 니항군대의 본대는 흑룡주 지대에 들어서면서 극동공화국의 제2군단 제19연대 제3대대로 편입되었다. 대대장은 임호(林虎)이고 실력자인 박병길과 박이리아는 제19연대의 참모로 뜨라삐찐과 같이 행동했다. 제19연대는 다름아닌 뜨라삐찐의 군대이다. 즉 뜨라삐찐의 적색빨치산부대가 극동공화국 제2군단의 제19연대로 편입되는 것과 동시에 한인의 니항부대는 뜨라삐찐연대의 제3대대가 된 것이다. 제19연대가 극동공화국의 방침에 의하여 자유시를 향하여 가는 도중에 뜨라삐찐은 정부와 공산당으로부터 그가 니항사건에서 일본 거류민(居留民)과 러시아 양민을 5천여 명이나 불법살륙했다는 규탄을 받고 총살되었다. 일설에는 일제의 압력에 의해 처형되었다고도 하고 행군 도중 부대반란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한다.
 
니항군대의 책임자는 당연히 박병길이어야 하지만 그는 니항사건 당시 뜨라삐찐의 ‘만행’에 양심적인 반감을 품고 있었고 또한 행군 도중에 뜨라삐찐의 민폐(民幣)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에 반해 니항군대의 제2인자이면서 사실상의 실력자인 박이리아는 뜨라삐찐의 행위를 절대지지하는 자이며 박병길의 유약성을 공공연히 지탄하고 있었다. 이런 관계로 박병길과 박이리아 사이에는 심상치 않은 반목이 조정되고 있었다. 모략에 능한 박이리아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낀 박병길은 껠비에서 대열을 이탈하여 단신으로 자유시에 갔다.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대대측에서는 박병길을 자유대대의 비서장(행정처장)으로 맞아들였다. 이것이 자유시사변을 유발하는 하나의 요인이 될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1920년 10월 9일 일본군의 간도파병에 관한 중·일교섭의 성립은 같은 해 12월 중국의 번의(飜意)에 의해 무산되자 일제는 자위상 부득이하다는 구실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출병을 강행하게 되었으니, 그 목적은 한국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한 소위 간도토벌이었다. 시기적으로 일제의 시베리아출병군이 치따와 자바이칼 지역에서 완전 철퇴를 당한 시기와 일치하였다.
* 번의(飜意) : 먹었던 마음을 뒤집음
* 자바이칼 (Забайка́лье, Transbaikal)
 
일제의 야만적 ‘토벌작전’은 한인사회에 대한 원천적 회진말살(灰塵抹殺)을 감행하면서 맹렬을 극(極)하게 되었는데 한국독립군은 역사에 유명한 청산리·봉오동(鳳梧洞)전쟁의 기적적인 대첩을 거두면서 일본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하여 노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첫 집결지는 이만이었다. 이만은 하바로프스크의 적군과 블라디보스톡에서 스파스크까지의 일본군과의 완충지대에 들어 있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지대일 수 있었다.
* 회진(灰塵) : 남김없이 소멸하거나 멸망함을 비유
* 이만 (Iman) : 러시아 연해주 달네레첸스크(Дальнереченск, Dalnerechensk)의 옛 지명
* 스파스크 : 현재 스파스크달니 (Спасск-Дальний, Spassk-Dalny)
 
이만으로 넘어가는 이들 한국독립군은 일단 미샨/밀산에서 독립군의 대동단결체인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각기 소속되어 있는 부대별로 노령으로 넘어갔다. 「청천장군투쟁기(靑天將軍鬪爭記)」에는 간도 안투/안도현(安图县/安圖縣)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은밀지에서 봉오동전쟁의 쓰라린 경험을 가진 홍범도(洪範圖)의 국민회군(國民會軍)과 이청천(李靑天)의 서로군정서 간에 합작이 성립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이 바로 대한독립군으로 불리워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참가자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곧 뒤이어 김동식(金東植)의 광복단(光復團), 김혁(金赫)의 흥업단(興業團), 신포(申砲)의 야단(野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낙오소대(落伍小隊)인 함희(咸熙)부대가 이만으로 넘어갔다고 증언했다(吳光鮮)·북로군정서의 김좌진(金佐鎭)도 예하부대를 인솔하여 이만으로 넘어갔으나 그는 자유시를 향하여 떠나지 않고 미샨/밀산으로 되돌아왔다. 이범석(李範奭)도 김좌진과 행동을 같이 했다(이범석 증언).
 
「고혁군」에 보면 시베리아와 간도로부터 한인무력이 자유시로 집합한 것은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있은 일이다. 그리고 각 군대의 총병력수는 1천 9백여 명이었고 각 군대명과 영솔자명은 다음과 같다.
 
◇ 노령 각 의병대
이만군대 : 김뾰똘·박개서·김덕보
다반군대 : 최니콜라이
독립단군대 : 박그레고리·최빠사
니항군대 : 임호·고명수
자유대대 : 오하묵·최고려·황하일(黃河一)·전희서·유수연(兪洙淵)·류선장(柳善長)·최주동(崔柱東)
 
◇ 간도의 각 의병대
통군부(統軍府)군대 : 최진동(崔振東)·허재욱(許在旭)·이택(李澤)·오병묵(吳秉默)
국민(國民)군대 : 안무(安武)·정일무(鄭一武)·김광(金匡)·김규찬(金奎燦)·강석진(姜錫鎭)
독립군군대 : 홍범도·이청천·이병채(李秉采)
군정서군대 : 김좌진·서일(徐一)
 
한인무력의 자유시집결은 자유대대와 니항군대 간에 정면대결을 야기시켰다. 자유대대는 대한국민의회를 봉대했고 니항군대는 상해 임시정부를 봉대했다. 대한국민의회는 당시 오하묵·최고려 등의 이르쿠츠크파가 장악하고 있었고 이에 대하여 시베리아에서 임시정부를 대표하고 있는 자는 이동휘계의 박애(朴愛)·이용(李鏞) 등 상해파였다. 이 양자는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을 자파세력 하에 두려고 자유대대와 니항군대간의 군권투쟁에 개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시사변으로 비화(飛火)하게 되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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