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시사변 발생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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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사상 세칭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은 수많은 한국독립군이 시베리아 설원(雪原)에서 무참이 죽어간 너무도 불행한 참변이었다. 일명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전해지기도 하는 이 참변은 사건의 현장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자유시에 집결했던 한국독립군 일부가 러시아적군(赤軍)의 포위공격을 받고 쓰러진 참변인데, 이에 이르기까지의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자유시 : 스보보드니 (Свободный, Svobodny)
일제의 시베리아출병과 간도(間島) 토벌작전, 레닌정권과 코민테른의 대 한인이중정책(對韓人二重政策), 그것의 실천으로서의 극동공화국정부(極東共和國政府) 및 볼셰비키 현지당(現地黨)들의 한국독립운동계에 대한 참견,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한국독립운동계의 민족파와 준공산파 또는 공산파와의 이중적 관련을 유지하면서 한인의 민족적 항일정력(抗日精力)을 총체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그 모든 요인들의 모순이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폭발된 것이다.
일제의 여러 정보문서에는 러시아적군이 한국독립군을 계획적으로 대량학살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고, 친로파(親露派)의 이르쿠츠크집단에서는 민족파의 상해집단(上海集團)을 이 참변의 배후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참변에 관련이 있었던 참고인들의 증언은 부분적인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므로, 그것들이 그대로 전부의 진실일 수가 없다.
예컨대 자유시 참변의 주요관련세력인 극동공화국정부(치따정권)만 하더라도 이것을 레닌혁명정부에 대한 무장간섭국인 영·프·미·일의 수립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닌은 제8회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서 “사태는 극동공화국이라는 형태의 완충국가(緩衝國家)를 필요로 하고 있다. 시베리아의 일본인이 얼마나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만행으로 참화를 돌보지 않는가를 시베리아농민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 전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레닌정권을 수호하기 위한 임시적 완충국가로서 극동공화국이 창설되었던 것이다.
* 치따 = 치타 (Chita, Чита)
모스크바의 국립정치도서출판소에서 출판된『극동에 있어서의 국제관계』를 보면, 일제는 1920년 3월 31일 “일본 신민(臣民)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위협” 및 “만주·조선평화에 대한 위협”이 존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시베리아에 대한 무장간섭과 연해주(沿海州) 북부에서의 군대주둔의 구실을 만들었으나, 극동공화국의 인민혁명군과 빨치산부대의 백위군(白衛軍) 공격을 막을 명분이 없어 극동공화국정부와 자바이칼 전선에서의 군사행동정지에 관한 조약에 응하고 1920년 7월 25일 일본군은 치따를 철퇴했다. 같은 해 10월에 세미요노프를 우두머리로 하는 러시아백위군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 분쇄되어 만주(滿洲)로 도망갔다.
* 자바이칼 (Забайка́лье, Transbaikal)
* 철퇴 : 거두어 가지고 물러남
일제의 시베리아출병군은 러시아백위군을 지원하면서 반일독립(反日獨立)의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인무장대(韓人武裝隊)를 소탕하고자 했기 때문에 시베리아에서 발생한 한국독립군은 적·백파간의 러시아내전에서 러시아적위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정치사상적으로 레닌정권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일제와의 항일독립투쟁을 위해서는 일제의 시베리아출병군과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레닌정권과 코민테른 및 극동 공화국정부와 볼셰비키당의 현지기관들이 한인의 민족적 반일정력을 소비에트방위전선에 총동원하고자 한 정책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자유시참변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한 오광선(吳光鮮)과 이지탁(李智鐸)은 당시의 시베리아 한인독립운동계에서 연해주를 한인의 자치주로 보장받는 조건으로 러시아적위파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설을 믿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증언했는데, 이것은 한인무장대가 왜 자유시에 집결하게 되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친러적 이르쿠츠크파의 문건(文件)으로 보여지는 「고려혁명군대연혁(高麗革命軍隊沿革)」에는 시베리아와 북간도의 독립군이 자유시로 향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시세(時勢)와 기회를 틈타 노령 각 방면에서 고려의병대(高麗義兵隊)가 봉기하여 러시아군대에 일부 편입된 것을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서 제2군단과 교섭하여 자유시에 집합하게 되니 즉 1920년 11월경이었다. 이와 동시에 북간도에서도 고려 각 의병대가 일본군대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퇴각하여 노령으로 향한다는 보도가 있으므로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文昌範), 재무부장 한창해(韓滄海), 자유대대장 오하묵(吳夏默), 비서 박병길(朴秉吉) 등 4인은 같은 해 12월 초순경에 하바로브스크 제2군단 본부에 가서 간도 각 의병대가 노령으로 오는 사정을 해당 군단과 교섭한 후 한창해를 요하(饒河)에 파견하여 의병대 임시주둔지에 관한 것을 준비하고 각 의병대에 인원을 파견하여 전쟁과 원로(遠路)에 피로한 군심(軍心)을 위안 겸 환영하며 또는 제2군단과 교섭한 결과를 알려주고 길을 인도하여 자유시로 향하니 1921년 1월 중순이었다.
시기로 보아 대한국민의회가 재무부장 한창해를 북간도 요하에 파견하여 북간도의 한국독립군부대를 시베리아로 맞아들이기 위하여 러시아 적군 제2군단과 교섭한 결과를 한국독립군부대에 전달한 내용이 무엇인가는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없으나 혹 ‘장차 시베리아의 연해주를 한인자치주로 보장받기 위하여 한국독립군부대가 러시아적군과 협동작전을 전개하기로 협약했다’는 것을 비공식적으로 유포시켰는지도 모른다.
청산리(靑山里) 독립전쟁이 있은 뒤 미샨/밀산(密山)에 집결한 한국독립군 부대가 러시아령 이만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있은 일이라면 한국독립군단은 장차 연해주에 한인자치정부를 수립하고 이것을 기지로 하여 반일 독립운동을 전개하리라는 희망과 흥분을 품고 이만으로 넘어 갔는지도 모른다.
* 이만 (Iman) : 러시아 연해주 달네레첸스크(Дальнереченск, Dalnerechensk)의 옛 지명
1920년 12월 10일 『오오사까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은 한로공수 동맹(韓露攻守同盟) 체결을 보도하는 충격적 정치기사를 통하여 조약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1. 조선정부는 공산주의를 채용하고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선전사업에 종사할 것.
2. 러시아노농(勞農) 정부는 동양에 공고한 평화를 수립하기 위하여 한인독립활동을 원조할 것.
3. 시베리아에서의 조선군대의 훈련과 집결을 허용하고 이에 필요한 군수품은 노농정부에서 제공할 것.
4. 시베리아의 조선군대는 노농정부에서 지정한 러시아사관의 지휘 하에 두고 시베리아의 일본출병군에 대항하는 행동에 대하여 노농정부와 공동행등을 취할 것.
5. 이상의 사무를 관리하기 위하여 노조(露朝) 양국 연합국(聯合局)을 설치하고 그 위원은 양국정부에서 임명할 것.
6. 조선정부에 의하여 영수(領收)되는 군사보급과 기타 원조는 장차의 적당한 시기에 보상될 것.
* 영수(領收) : 돈이나 물품 따위를 받아들임
이상의 기사에서 느껴지는 것은 늦어도 1920년 12월 이전에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의 부하들과 레닌정부 관리들 간에 어떤 기본적인 합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3, 4, 5의 각항은 그 후 시베리아에서 전개된 상황 곧 한인무장대의 자유시집결, 동 무력의 관리문제, 한인부(韓人部)의 설치 등과 일치하는 것이 있다. 요컨대 시베리아 한인무장대는 러시아적군 사령부에 소속되어 적군과 공동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며 그 대가는 한국독립운동의 지지와 군사적 보상인 것이다.
그러나 1920년 2월 30일자, 재상해한국공보국(在上海韓國公報局 ; 상해 임시정부 기관일 것임)의 성명서 형식으로 발행되는 중국신문 『대륙보(大陸報)』에 의하면『오오사까아사히신문』기사는 한인사회를 음해(陰害)하려는 일제의 모략이라는 것이다. 즉
간도에 있는 일본군대의 행동에 관하여 도코(東京) 육군성이 발표한 문서를 읽었다. 우리는 한인의 소위 과격파적 경향에 대하여 동 육군성문서가 애써 세시(細示)한 점과 또 과격성이 마치 한인의 고유성(固有性)인 것처럼 인상지으려 한 것은 다름아닌 한인학살을 정당화하려는 책략임을 안다. 이와 같은 가정에 입각하여 『오오사까아사히신문』은 12월 10일 한국이 러시아와 공수동맹을 체결했다고 말하면서 그 조약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다(조약문은 전기한 것과 같음). 이상 조약문은 모두가 진실인 것처럼 들릴 것이다. 만약 이것이 믿을만한 소식통으로부터 입수되었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당지의 중국신문들이 이것을 그대로 게재함으로써 여관응접실의 화제로까지 번지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일제 선전(宣傳)의 계속적인 습격을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 세시(細示) : 상세히 나타내다
과거 수년간의 일본외교책략은 한 민족을 전혀 무가치한 도배(徒輩)로 묘사(描寫)하여 왔다. 이제 또 그들은 과격주의가 열강의 적대물로 되어진 것을 보고나서는 한인을 과격주의로 몰아부침으로써 열강의 증오를 사도록 중상모략을 시도하고 있다. 1919년 3월의 독립운동 개시 이래 한인이 모스크바의 혹자(或者)와 결맹을 했다든가 혹은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하여 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모략은 비일비재하다.
* 도배(徒輩) : 함께 어울려 나쁜 짓을 하는 무리
* 혹자(或者) : 어떤 사람
* 결맹 : 연맹이나 동맹을 결성함
김홍일(金弘壹)의 회고(자유시사변전후/自由市事變前後)에 의하면 1920년 7월 임시정부 대표 한형권(韓馨權)과 레닌정부 사이에 한국독립운동지원에 관한 협정이 다음과 같이 4항목으로 체결되었다 한다.
1. 소련정부는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다.
2. 한국임시정부는 점차적으로 공산주의를 채택한다.
3. 연해주와 만주 각지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시베리아에 집결하여 훈련할 것을 허가하며 이에 소요되는 장비 및 보급을 부담한다.
4. 한국독립군은 소련영토 내에 있는 한 소련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 모스크바와 상해파 사이에는 모종의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합의사항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대한국민의회파와 상해파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마침내 자유시사변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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