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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 길어 "6) 청산리독립전쟁"의 "(4) 어랑촌전투"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6) 청산리독립전쟁
 
(4) 어랑촌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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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독립전쟁의 네번째 전투는 10월 22일 오전 9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얼다오고우/이도구 위량/어랑촌 서남방 표고 874고지 남측에서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연합부대가 공동으로 일본군과 대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퇴한 어랑촌전투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천수평전투에서 일본군 수색기병중대를 섬멸한 후 숨돌릴 사이도 없이 다음 전투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천수평에서 도망쳐 간 4명의 일본군 기병이 어랑촌에 설치한 그들의 기병연대 사령부에 사태를 보고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일본군 대부대의 공격이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이에 적을 앉아서 기다리기 보다는 기선을 제압 하여 먼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서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이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어랑촌의 서남단 고지’註 066를 선점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어랑촌 서남단의 고지를 선점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을 때 일본군도 얼마 후에 이 고지를 선점하려고 달려 왔다. 그러나 이 때는 이 고지가 이미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선점하에 들어간 후였다.
 
그 결과 일본군은 고지 밑에서 고지 위에 있는 독립군을 공격하게 되고 독립군은 고지 위에서 일본군을 내려다 보며 응전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유리한 점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세와 화력의 우세였으나, 불리한 점은 지형이었다. 반면에 독립군의 유리한 점은 선점한 지형 뿐이었고 불리한 점은 화력과 병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였을 뿐 아니라 병사들이 연 이은 격전과 강행군으로 매우 지쳐 있었다는 점이었다. 일본군 동지대의 주력은 어랑촌에 진을 치고 이 근방의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고 있었으므로 어랑촌 부근의 일본군 병력은 무려 5천 명이나 되었으며, 기병연대나 포병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 동지대 예비대까지 가담하였다. 반면에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그 동안의 전사자·실종자·낙오자로 말미암아 어랑촌전투 때에는 600명을 하회하였다.
 
일본군은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믿고 기병 연대장 가납(加納:가노) 대좌의 지휘 하에 연대 병력으로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포위하여 22일 오전 9시경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유리한 지형에서 기어올라오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부근에 흩어져 있는 일본군부대들을 모두 불러 모았으므로 일본군의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이 전투를 전사할 자리라고 각오하고 혈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연대병력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대한 포위 공격은 그 들의 뜻과 같이 전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완루구전투를 치루고 서방으로 이동하던 홍범도연합부대가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혈전을 전개하고 있는 지구로 이동해 왔기 때문이었다.註 067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연합 부대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일본군 연대병력에 포위되어 혈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고 이를 지원하러 찾아온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홍범도가 거느린 독립군연합부대의 병력은 1천 400명에 달하는 막강한 것이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는 북로군정서가 선점하고 있는 고지 바로 옆의 최고표고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맹공격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포위했던 대병력을 나누어 홍범도연합부대의 독립군과도 전투를 전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표고 : 바다의 면이나 어떤 지점을 정하여 수직으로 잰 일정한 지대의 높이
 
북로군정서 독립군이나 홍범도연합부대 독립군이나 모두 지형이 유리했기 때문에 돌격해 올라오는 일본군을 내려다보면서 소총과 기관총을 퍼부었다. 일본군은 독립군과의 한 차례의 전투에서만도 격전 후에 300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내고 공격이 둔화되었다.註 068
 
그러나 병력과 화력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은 단념하지 않고 다시 독립군을 공격해 왔다. 일본군은 기병대로 천수평 서북방 고지를 따라 독립군부대들의 측면을 공격하고, 정면에는 포병과 보병으로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전투는 치열해졌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전투가 해가 기울 때까지 그칠 줄을 돌랐다. 독립군 병사들은 하루 종일 굶었기 때문에 부근 촌락의 동포들이 주먹밥을 지어 가지고 왔다. 독립군 병사들은 밥먹을 틈도 내지 못하여 동포들이 전투 중에 있는 병사들의 입에 주먹밥을 넣어 주는 형편이었다.
 
일본군의 공격은 치열했으나,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독립군부대들은 동포들의 성원에 한층 더 사기충천하여 더욱 용감하게 응전하였다. 독립군의 투지가 얼마나 충천했는지 하나의 사례를 들면, 북로군정서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崔麟杰)은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스스로 자기 몸에 기관총을 묶고 몰려 올라오는 일본군을 집중 사격하여 패주시킨 후에 기관총 탄환이 떨어지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註 069
 
만주의 초겨울 짧은 해가 져서 고지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일본군의 공격은 약화되었으며, 독립군은 이 치열한 전투에서도 승리했으므로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홍범도연합부대가 있는 고지의 최고표고로 집합시켜서 추격하려는 적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고, 어둠을 타 다시 부대를 나누어 안투/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함으로써 어랑촌전투는 일단 종결되었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는 어랑촌전투에서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가 다 함께 참가했음을 확인하여 공표하였다. 즉 그에 의하면 
① 김좌진부대(북로군정서)는 어랑촌 후방 고지를 점령하여 일본군의 진로를 차단하고, 홍범도부대(독립군 연합부대)는 같은 고지의 최고표고에 위치하여 지원대의 임무를 하였고, 
② 일본군과의 전투에는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가 각각 좌고지와 우고지에서 맹렬한 사격을 하여 모두 참가했으며, 
③ 독립군은 지형이 유리하여 승리했고, 
④ 철수할 때에는 홍범도부대가 이미 점유한 그 고지의 최고표고에 김좌진부대가 합류하여 일단 공동으로 철수했다가 다시 부대를 나누었다고 하였다.註 070
 
또한 일본군측의 비밀자료도 어랑촌전투에서 홍범도부대와 김좌진부대가 다같이 참가하여 자기들 군대와 전투를 했다고 보고하였다.註 071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랑촌전투를 비롯한 청산리독립전쟁의 전투들에서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는 구조적으로 매우 상호보완적이고 상호지원적이었다는 사실이다. 홍범도부대가 10월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 사이에 완로우고우/완루구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었을 때에, 김좌진부대가 10월 22일 새벽 5시 30분경에 첸쉐이핑/천수평 부근의 일본군 수색기병중대를 기습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부대 이동을 가져와 홍범도부대의 포위망 탈출과 부대 이동을 용이하게 하여 완루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지원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어랑촌의 서남단 고지에서 김좌진부대가 5배 이상 병력의 일본군에게 포위 공격을 당했을 때에 ‘완루구전투’를 치르고 나온 홍범도부대가 바로 김좌진부대(복로군정서)가 선점하고 있는 고지의 최고표고를 점령하여 일본군과 싸워 주었기 때문에 북로군정서도 포위망이 풀리고 패전을 면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승전했으며, 홍범도부대도 승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랑촌전투는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가 다 같이 참전했기 때문에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전투였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일본군은 어랑촌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기병 연대장 가노 대좌를 비롯해서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내었다. 북로군정서 사령부는 일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1천 600명으로 발표했으며, 중국 관변(官邊)은 일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1천 300여명이라고 추산하였다. 박은식(朴殷植)에 의하면, 일본영사관의 비밀보고에도 이도구전투에서 가노 연대장을 비롯하여 대대장 1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병사의 사상자가 800여 명에 달했다고 보고하였다고 한다.註 072
 
상해 임시정부는 어랑촌전투에서의 일본군의 전사자를 300여 명이라고 발표했으며, 부상자의 추계는 내지 않았다.註 073 이범석은 이 전투에서의 일본군 전사자와 부상자를, 가노 연대장을 포함하여 약 1천명이라고 하였다.註 074
 
한편, 독립군측도 그 동안의 전투 중에서는 어랑촌전투에서의 피해가 가장 컸다.註 075 이범석에 의하면 북로군정서의 전사자와 부상자만도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註 076
 
일본군은 그들의 모든 보고서마다 독립군을 패배시켰다고 하면서도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이 패전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다.註 077
 
청산리독립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규모가 큰 어랑촌전투는 결국 독립군의 대승리로 귀결된 것이었다.
 
 
 
 
註 066 『독립신문(獨立新聞)』(제98호/第98號), 1921년(年) 3월(月) 12일자(日字),「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2/二),「경전장교김중씨담(經戰將校金勳氏談)」.
 
註 067 「암호전보(暗號電報)」제(第)63호(號), 암(暗) No. 15825, 1920년(年) 10월(月) 22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319 참조.
 
註 068 『독립신문(獨立新聞)』(제88호/第88號), 1920년(年) 12월(月) 25일자(日字), 「북간도(北墾島)에 재(在)한 아독립군(我獨立軍)의 전투정보(戰鬪情報)」참조.
 
註 069 이범석(李範奭), 앞 책, p.71 참조.
註 070 주 68)과 같음
註 071 「히가시소장 인솔부대의 상황(東少將ノ率ユル部隊ノ狀況)」안호전보(暗號電報) 제(第)368호(號), 암(暗) No. 15894, 1920년(年) 10월(月) 23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293 ;「불령선인의 행동(不逞鮮人ノ行動)」비간청(秘間淸) 제(第)40호(號), 1920년(年) 10월(月) 27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376 참조.
 
註 072 박은식(朴殷植), 앞 책, pp. 672~673 참조.
註 073 『독립신문(獨立新聞)』(제88호/第88號), 1920년(年) 12월(月) 25일자(日字),「북간도(北墾島)에 재(在)한 아독립군(我獨立軍)의 전투정보(戰鬪情報)」참조.
 
註 074 이범석(李範奭), 앞 책, p.73 참조.
註 075 「간북시찰원보고(墾北視察員報告)」 고경(高警) 제(第)37231호(號), 1920년(年) 11월(月) 25일자(日字), 김정명 편(金正明編), 앞 책, p. 126 참조.
 
註 076 이범석(李範奭), 앞 책, p.73 참조.
註 077 「전보(電報)」조특(朝特) 제(第)114호(號), 1920년(年) 10월(月) 25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222 참조.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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