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이 길어 "6) 청산리독립전쟁"의 "(1) 백운평전투"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6) 청산리독립전쟁
(1) 백운평전투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Ⅰ.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3.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독립전쟁 > 6) 청산리독립전쟁 > (1) 백운평전투
청산리독립전쟁의 최초의 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1920년 10월 21일 일본군 토벌대의 하나인 야마다/산전보병연대를 산다오고우/삼도구 칭샨리/청산리 골짜기의 바이윈핑/백운평 부근에서 섬멸하여 최초의 승리를 획득한 전투였다.
청산리독립전쟁의 최초의 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1920년 10월 21일 일본군 토벌대의 하나인 야마다/산전보병연대를 산다오고우/삼도구 칭샨리/청산리 골짜기의 바이윈핑/백운평 부근에서 섬멸하여 최초의 승리를 획득한 전투였다.
일본군이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추격해 청산리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자, 1920년 10월 20일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은 피전책을 버리고 일본군과의 일전을 벌이기 위하여 부대를 2개 제대(弟隊)로 나누었다. 제1제대는 ‘본대’로서 비교적 훈련이 부족한 병사들로 편성하여 직접 사령관 김좌진이 지휘해서 제2제대가 잠복한 지점의 건너편 스방딩즈/사방정자(四方頂子)의 산기슭에 배치하였다. 제2제대는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李範奭)의 지휘 하에 사관연성소 학도들을 중심으로 한 300명의 여행대(旅行隊)로서 이를 후위대(後衛隊)로 하여 일본군의 추격에 대항하는 최전면을 담당하되 지리를 이용하여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 골짜기의 목에 잠복케 하였다. 북로군정서가 이와 같이 병력을 배치한 길목은 청산리 계곡에서도 폭이 2~3리로 가장 좁고 양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으며 그 골짜기의 중앙에는 공지(空地)가 되어, 단 하나의 오솔길이 이 공지를 통과하는 지점이었다. 이 곳은 매복하여 적을 기습하기에는 매우 적합한 지형이었다.
* 피전책(避戰策) : 전투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직접 교전을 회피하면서 안전지대로 이동하는 것
* 여행대(旅行隊) : 선발대
북로군정서 독립군온 일본군을 이 지점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백운평과 송링핑/송림평(松林坪) 등 이 근방 마을에 남은 한국인 노인들에게, 독립군이 보잘 것 없는 병력으로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일본군의 토벌에 낭패하여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져서 허둥지둥 계곡 끝으로 도망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이를 일본군에게 제공하도록 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 제2제대가 매복한 지형은 공지를 바로 내려다 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였다. 예컨대 이민화(李敏華) 중대가 매복한 우측 지구는 경사가 60도나 되는 산허리였고, 김훈(金勳)중대가 매복한 중앙정면은 경사가 90도나 되는 깎아지른 절벽이었다.註 054 이러한 절벽 위의 산에 밀림이 울창하여 아름드리의 쓸어진 나무등지가 널려 있으며, 그 위에 담요처럼 두껍게 푸른 이끼가 덮여 있어서 천연적 엄폐물을 만들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제2제대는 이범석의 명령에 따라 소나무 가지와 잣나무 가지로 위장을 하고 앞에 널려진 나무등지를 엄폐물로 하여 두껍게 쌓인 낙엽 속에 전신을 파묻어서 완전히 매복하였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적들도 이들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약 800미터 떨어진 곳에서 김좌진이 거느린 제 1제대도 동일한 전투 준비를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완전히 엄폐된 상태에서 매복하여 기습작전을 전개하려고 절벽 아래의 공지를 향해서 총구를 모으고 있었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은 바로 하루 전에 독립군부대가 행군해 온 길을 따라 백운평 위의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는 절벽 밑의 공지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 전위부대는 안천소좌가 지휘하는 선발 보병 1개 중대였다. 일본군 전위부대는 백운평을 점령하여 주민들로부터, 독립군이 패색이 짙어 하루 전에 도망했다는 정보를 수집한 다음, 절벽 밑의 꼬불꼬불한 단 하나의 소로를 따라 말똥을 채집하여 온도를 측정해 보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해 왔다. 말똥은 하루 전의 것으로 완전히 식고 많이 말라 있어서 독립군이 적어도 하루 전에 이 길을 지나갔음을 분명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일본군 전위중대는 독립군이 일전을 결의하여 돌아서서 매복한 채 대기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공지 안으로 들어섰다.
일본군 전위중대의 전 병력이 공지 안에 모두 들어서고 전면은 북로군정서 독립군 제2제대의 매복 지점으로부터 10여 보(步) 앞에 도달했을 때, 10월 21일 오전 9시 독립군은 일시에 기습공격을 시작하였다. 북로 군정서 독립군의 600여 정의 소총과 4정의 기관총과 2문의 박격포의 화력이 일시에 일본군 전위부대의 머리 위에 불을 토하며 쏟아져 내렸다.註 055
* 공지 : 집이나 밭 따위가 없는 비어 있는 땅
일본군 전위부대는 응사를 시도했으나 독립군이 어디에 은폐하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으므로 총탄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한 응사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20여 분의 교전 끝에 일본군 전위부대 200명은 전멸하였다.註 056 이것은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획득한 청산리독립전쟁의 최초의 완전한 승전이었다.
전위부대에 뒤이어 도착한 야마다/산전토벌연대 본대는 전위중대가 전멸한 것에 크게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해 왔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준과 목표가 명확치 않아서 화력만 허비하였다. 반면에, 나라를 빼앗기고 설욕의 날을 기다리던 독립군은 사기충천하여 정확하게 조준해서 화력을 퍼부었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군의 시체는 쌓여 갔다.註 057
일본군은 이번에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로 1부대를 편성해서 매복한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측면을 우회하여 독립군을 포위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절벽 위에서 정확하게 조준하여 사격하는 독립군의 공격에 막대한 희생만 내고 패주하였다.註 058
일본군은 이번에는 다시 부대를 정돈해 가지고 매복한 북로군정서 독립군 제2제대의 정면과 측면을 산포와 기관총으로 반격해 왔다. 그러나 독립군은 고지 위에서 완전히 은폐되어 있었으므로 일본군이 아무리 중화기로 반격을 해도 효과가 없었다. 반면에 독립군은 조준 사격을 정확히 했으므로 일본군은 여기에서도 계속 사상자를 낼 뿐이었다. 일본군 야마다/산전토벌연대 본대는 자기편의 시체를 쌓아 은폐물을 만들고 필사적인 반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1200~300명의 전사자만 낸 채 더 견디지 못하고 숙영지(宿營地)로 패주하였다.註 059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 백운평전투인 것이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백운평전투에서 크게 승전한 후 퇴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하여 10월 22일 새벽 2시 30분에 얼다오고우/이도구 쟈샨/갑산촌으로 철수하였다.
주
註 054 『독립신문(獨立新聞)』(제96호/第96號), 1921년(年) 3월(月) 1일자(日字), 「삼일절(三一節)의 산물(產物)인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참조.
註 055 박영석(朴永錫), 「일제하(日帝下) 만주(滿洲)·노령지역(露領地域)에서의 항일민족운동(抗日民族運動) :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병사(獨立軍兵士) 이우석(李雨錫)의 활동(活動)을 중심으로」, 『동박학지(東方學志)』제34·35집(1983) 참조. 이 연구에 의하면 이 때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무기(武器)는 체코인부대(人部隊)와 백군(白軍) 러시아인(人)들로부터 구입하여 운반해 온 것이었다.
註 056 『독립신문(獨立新聞)』(제88호/第88號), 1920년(年) 12월(月) 25일자(日字),「북간도(北墾島)에 재(在)한 아독립군(我獨立軍)의 전투정보(戰鬪情報)」참조.
註 057 이범석(李範奭), 앞 글 참조.
註 058 『독립신문(獨立新聞)』(제88호/第88號), 1920년(年) 12월(月) 25일자(日字), 「북간도(北墾島)에 재(在)한 아독립군(我獨立軍)의 전투정보(戰鬪情報)」참조.
註 059 박은식(朴殷植),『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상(上)(단국대출판부/檀國大出版部, 1975), p. 6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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