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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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2. 산포수 의병부대의 결성과 항전
(2) 후치령(厚峙嶺) 전투
후치령은 높이 약 1,335미터의 매우 험준한 고개로서 동해안 지방인 북청에서 내륙의 개마고원 지방인 삼수·갑산·혜산 등지로 통하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후치령의 정상에는 각지로 왕래하는 행인들과 짐꾼들의 유숙을 위한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약 70여 명의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22일 일본군과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개시하였다. 홍범도는 차도선과 함께 포수들을 인솔하고 갑산에서 북청쪽으로 가는 후치령의 정상 부근에 매복하여 무기를 싣고 북청으로 가는 일본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당시 포수의병들은 대략 세 군데의 진지에 배치되었으니 후치령 고개 아래의 노양지 앞추여머리 길목과 진갈구미 한복판, 후치령의 내메머리 거리의 3개소가 바로 그곳이다.
홍범도는 의병들로 하여금 위의 매복지점에 나무를 베어다가 견고한 포진(砲陣)을 구축케 하고 눈으로 그 위를 덮어서 위장하도록 했다. 11월 중순이었지만 후치령에는 벌써 상당한 눈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포진이란 화승총으로 적을 사격하기 위한 진지를 말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의병부대의 진지를 그렇게 불렀다. 범도(홍범도)는 포진에 여러 사격조로 된 전투대오를 배치하여 전투에 대비케 한 다음 파발리 방면에 ‘발동군(당시의 정찰병)’을 보내서 적정을 탐지하도록 했다. 이 때 전투대오의 편성에서 특이한 점은 사격조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격조는 당시 포수들이 주로 갖추고 있던 화승총 사용방법상의 특징때문에 짜여진 것이었다. 즉 하나의 사격조는 4명의 의병으로 조직되었는데, 화약을 장약하는 포수와 탄알을 장진하는 포수, 화승대에 불을 붙이는 포수, 그리고 준비된 총을 조준하여 발사하는 사수 등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총을 사격하는 한 사람 외에 나머지 세 사람은 일종의 조수라고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주도면밀하게 전투 준비를 끝낸 의병들은 이 포진에 의거하여 후치령을 왕래하는 일본군과 우편물 호위병, 목재창의 일본인 관리 등 일본 침략자들과 그들의 앞잡이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22일 오후 4시경 안산·안평 두 고을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가는 일본군의 행렬이 나타났다. 처음에 포수들의 총을 북청읍으로 반출하려던 일본군은 일본인 경찰 노우에(野上) 경부(警部) 등 경찰 4명과 상등병 이하 8명의 일본군 수비대원 등 군경 합동 12명과 한국인 첩자 한 사람의 인원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북청읍을 향해 가던 중 안산사의 황수원(黃水院) 북방 병풍동에서 4명의 일진회원이 피살되었다는 소식과 신풍리(新豊里) 부근에서 사냥꾼들이 모여 우선 일진회원을 살해한 뒤에 일본인도 처단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애초에 동행하던 경찰 일행과 상당수의 군인들이 이곳으로 급히 파견되었다. 그 결과 총기 호송 인원이 대폭 감소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일행은 일본군 병졸 두 명과 경관인 순사(巡査) 한 명, 그리고 수송용 말 3마리와 한국인 마부 3명, 위에서 언급한 한국인 통역 겸 첩자 1인으로 이루어졌다.
* 노우에(野上) : 노가미?(野上)
* 안산사 : 북청군 안산면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이들이 매복지점에 도달하자 일제히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일본 병졸과 순사 등을 모두 사살하였다. 이때 친일파인 한국인 통역은 머리에 쓰고 있던 관에 탄환이 명중되었으나 재빨리 도망하여 버렸고 마부 3명은 모두 생포되었다. 의병들은 짐을 싣고 있던 말을 잡아서 동료 포수들이 빼앗겼던 총을 그대로 다 되찾았다. 그리고 일본군경이 갖고 있던 신식 무기와 기타 장비를 노획하여 그들의 무장을 강화하였다. 사로잡힌 마부들은 아무런 죄가 없었으므로 의병봉기의 대의명분과 반일항쟁의 필요성 등을 잘 설명하고 타일러서 석방하였다. 이 때 사살된 일본군은 북청주둔 일본군 제 50연대 소속이었고 일인 경찰은 이름이 도꾸에이(德永權吉, 덕영권길)였는데 북청경찰서의 고문부 소속이었다.
* 도꾸에이(德永權吉, 덕영권길) : 도쿠나가 곤요시?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같은 날 석양 무렵에 갑산에서 북청으로 가는 우편물 호위 일본군 2명과 역시 북청으로 가던 혜산진 목림창 소속 반장 오끼하라(萩原守虎, 추원수호)란 자를 매복 포진에서 저격하여 모두 사살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 등을 노획하고 우편물도 빼앗았다.
* 오끼하라(萩原守虎, 추원수호) : 하기와라 모리토라?
포수의병들은 다음날인 11월 23일에도 같은 지점 즉 후치령에서 신점리로 내려오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북청에서 혜산진으로 가던 일본군 아라다니(新谷, 신곡) 소위와 그가 타고 있던 말, 병졸 2명을 저격하여 전멸시키고 무기와 탄약 등을 전리품으로 노획했다. 이틀 사이에 아홉 명의 일본인 군경과 민간인이 처단된 것이다. 홍범도·차도선의 지도하에 승리의 개가를 올린 의병투쟁의 첫 성과는 포수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 시켰다. 또한 이 같은 포수의병들의 승리는 주변 민중들의 반일 의병투쟁을 더욱 고무 시켰다.
일본군 북청 수비대는 위와 같은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계속된 투쟁에 놀라고 당황하여 일본군을 급히 출동시켰다. 즉 일제는 11월 24일 미야베(宮部, 궁부) 보병대위 지휘 하에 2개 소대 57명과 순검 5명, 헌병 4명을 급파하여 북청 방면에서 후치령 쪽으로 의병부대를 공격케 하고, 반대방향인 신풍리 방면에서 후치령 쪽으로는 아오또(靑砥, 청지) 보병대위 및 노우에(野上, 야상) 경부가 거느리는 일단의 군과 경찰을 출동시켜서 협공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우에 경부 등의 일행은 자기들의 인원이 소수이고 후치령에는 많은 의병들이 웅거하고 있다는 풍설을 듣고 자신이 없어 후치령으로 향하지 못하고 일본군의 분견대가 있던 신풍리를 경유하였던 까닭에 후치령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 노우에(野上) : 노가미?
한편 후치령의 며칠간 투쟁성과가 주변 마을에 크게 알려진 결과 많은 포수와 농민·광산노동자·해산군인이 합류하여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삼백 명의 규모로 군세가 확대되었다. 이 때 북청 진위대 병정으로 복무하던 도중 진위대가 해산되어 집에서 지내고 있던 송재원(宋才源)은 홍범도가 기병하면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대열에 가담한 사람이다. 그는 1884년 3월 5일생으로 당시 23세의 한창 때였다. 그는 포수들을 이끌고 의병대에 참가하라는 홍범도의 연락을 받고 자기가 살고 있던 북청군 니곡사(泥谷社) 인동리에 거주하고 있던 8명의 포수들을 이끌고 후치령 전투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 기병 : 군사를 일으킴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11월 24일 정찰병인 발동군으로부터 북청에서 다수의 일본군 수비대가 후치령 방면으로 출동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의병들은 후치령으로 침입하는 적을 쳐부수기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신중하게 기다렸다. 의병들의 포진을 보강하여 주공방향으로 병력을 집중시켰고 총을 쏠 수 있는 총안을 진지에 내서 포수들이 안전하게 총을 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이 기다린 보람이 있어 드디어 다음 날인 25일 12시경 일본군 수비대가 의병들의 포진 근처에 나타났다. 본격적인 후치령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이 전투는 오후 3시까지 약 세 시간 동안에 걸쳐 전개되었다.
의병들은 비록 낡은 화승총을 주로 갖고 있었지만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여 견고한 참호를 구축하고 있었고 사기 왕성한 가운데 철저히 미리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일본군은 우세한 신식 장비를 보유하였다고 하나 북청에서부터 수백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매우 피로한 상태에 있었으며, 아무런 엄폐물이 없이 노출된 상태에서 낮은 곳으로부터 고지를 향하여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지형적으로도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홍범도의 선제 사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피아간에 치열하게 벌어졌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약 세 시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서 그들을 패주시켜 버렸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절반이 넘는 30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고 의병진영에서도 김춘진·김문엽(홍범도는 이문엽으로 회상)·조강록·임승조·임사존 등 1등 사수인 다섯 사람의 포수가 전사하였으며 황봉준(黃奉俊) 등 다수의 부상자도 생겼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후치령 전투에서 일본군에 섬멸적 타격을 가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계속된 전투로 탄환이 거의 떨어지고 전투 직후 일본군 증원병이 올 것을 우려하여 후치령을 떠나 주력은 안산사의 신점(新店) 방면으로, 일부는 후치령 서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는 홍범도의 아들 양순(홍양순)이도 16세의 어린 나이로 참전하였는데 전투에 처음 참가한 일부 포수들이 당황하여 전투에 애를 먹기도 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가 첫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포수들만이 할 수 있는 정확한 사격과 대담한 작전, 그리고 일정한 성과를 거둔 뒤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재빠른 기동력이라고 하겠다. 홍범도 등 포수의병들의 이러한 특정은 맹수를 사냥하면서 얻은 풍부한 경험과 그들이 사냥하던 지역의 지리와 지형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술이 바로 치고 빠지는 유격전인 것이다.
일제 경찰은 후일 그들의 보고문서에서 일본군의 피해가 전사 3, 부상 4명 뿐인 것으로 피해를 축소하여 보고한 반면에 의병들의 피해는 크게 과장해서 전사자가 21명, 화승총 노획이 14정인 것으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들의 보고서에 출동 병력이 60명 이상이었으면서도 “아 병원(兵員)은 2개 소대이나 50명 이하이다.” 혹은 “적은 참호를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하였다고 한다.”라고 하여 자기들의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아서 의병들이 완강하게 저항한 것처럼 진술하였다.
특히 그들은 위와 같은 허위보고를 하면서 후치령 전투 이후 약 1주일이 지난 12월 1일까지도
“폭도(의병: 필자)의 종적은 불명이며 지금까지 1인도 체포할 수 없었음은 유감으로 하는 바이다. 계속 수사 중이다.”
라고 하여 전투 직후 재빨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린 의병들을 추적하는데 실패하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더욱이 후치령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큰 피해를 입었음을 증명하는 사실은 일본인 경찰까지도 전투 직후 일본군과 경찰 일행이 전멸한 것으로 알고 있었고(사실은 일본군이 전멸하지는 않았다) 신풍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분견소의 미끼(三木, 삼목) 소좌 등 일본군도 의병들의 신풍리 습격이 두려워서 갑산 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당시 후치령에서 25리 정도 떨어진 북청군 니곡사에 살던 정응섭(鄭應燮: 당시 27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왜놈들은 우리 동리에 와서 ‘폭도’와 교전하다가 4명의 부상자를 냈다고 했는데 실제로 가보니 사상자는 30여 명이나 되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같은 증언은 홍범도 의병부대의 승리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제는 후치령 전투에서 선발대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증원병을 파견하였다. 그러한 사정을 일제의 원산 경찰서장은 아래와 같이 통감부의 경무국장에게 보고하였다. 이를 통하여 일본군의 고전 상황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차(此)의 토벌로 북청 50연대로부터 1개 소대를 파견하였으나, 수백 명의 폭도가 고개 위에 집합하여 극렬히 방전(防戰)하여 병졸 7명이 부상하고 곤전(困戰)하는 상황이므로 다시 동(同) 연대로부터 1개 소대를 파견하고자 지난 26일 밤 신포 수비대에서 병졸 15명을 발탁하여 기관포 4문을 갖고 동(同) 방면으로 향한 모양인 바….”
* 곤전(困戰) : 어려운 싸움
이미 보낸 병력을 1개 소대로 축소하고 있으며 증원병에게는 최신 무기인 기관포까지 지급해서 출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일제가 포수 의병들의 봉기에 얼마나 급급해하고 있는가 하는 진실을 간파할 수 있다.
후치령의 3일간 전투에서 매복전을 전개하여 수십 명의 일제 침략자들을 처치한 홍범도 의병부대는 미야베 대위가 거느리는 북청수비대와 격전을 치른 직후에 신점을 거쳐 갑산 상남사(上南社)로 이동하였다. 12월 3일 그곳에서 이들은 일진회원 13명을 처단하고 부근의 이리산(伊離山)으로 들어가서 다음 전투에 대비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후치령에서 참패한 뒤에 의병을 색출한다는 핑계하에 그 부근의 무고한 한국인 민가 27호를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북청에서 혜산진에 이르는 사이의 장항리(獐項里: 노루목)·성문 내리(內里)·후치령·황수원·신풍리·갑산 등지에 일단의 보병과 기병 부대를 배치하여 의병의 내습을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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