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독립군의 근거지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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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패전에 충격을 받은 일본군이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군사작전을 수립하고 중국측에게 일본군이 간도에 출병하여 그들이 직접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대대적으로 위협을 가하자, 만주군벌 장쮀린/장작림은 이에 굴복하여 일본군 파견장교의 감시하에 중국군을 출동 시켜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1920년 7월 24일 일본군에게 약속하였다. 일본군이 8월 15일 이에 동의하게 되자 중국측은 주연길(駐延吉) 중국육군 제2혼성여단 보병제 1단장 멍푸더/맹부덕(孟富德)을 책임자로 하여 한국 독립군 토벌을 위해서 중국군이 출동하게 되었다.註 028
 
그러나 중국관헌의 간부 중에는 한국인들과 친분이 두텁고 한국인 독립운동에 대한 동정자가 상당수 있었으며, 일본군의 강요에 굴복한 중국군의 독립군 토벌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간도의 대한국민회는 중국군토벌대 편성의 정보를 입수하자 멍푸더/맹부덕의 중국군측과 비밀리에 교섭한 결과 양측의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註 029 그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註 030
 
1. 중국군은 일본군의 간도침입을 막기 위해서 이번에는 부득이 독립군 ‘수색’을 위한 실제의 ‘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독립군은 중국측의 체면을 세워주는 대책을 실시하여 상호 타협한다.
2. 독립군은 시가지와 평야지대에서 군인의 복장이나 무기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횡행해서 중국관헌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는다.
3. 독립군은 현재의 근거지가 일본군에게 알려져서 중·일간의 분쟁의 표적이 되고 있으므로 일본측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삼림지대로 근거지의 이동을 실행한다.
4. 중국군은 ‘출동’전에 독립군에게 출동 사실을 사전에 통보하여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준다.
5. 중국군은 독립군을 공격 하지 않으며 , 양측이 ‘피전(避戰)’을 약정하고, 독립군의 이동행군과 삼림지대에서의 새 근거지 건설을 방해하지 않는다.
* 피전(避戰) : 싸움을 피함
 
독립군과 중국군 사이에 이러한 ‘타협’이 이루어지자 대한국민회는 8월 22일부터 각 지방지회와 독립군부대들에게 이러한 타협에 의한 중국군 출동의 사실을 알리고 근거지 이동을 권고하였다.註 031
 
이에 따라 지린/길림성의 옌지/연길현, 훈춘/혼춘현(珲春县/琿春縣), 왕칭/왕청현, 허롱/화룡현의 4현에 근거지를 설치하였던 한국민족의 독립군부대들은 1920년 8월 하순부터 근거지 대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봉오동전투 후에 옌지/연길현 명월구(明月溝 ; 중국명 먀오고우/庙沟/廟溝/묘구)에 근거지를 설치하였던 홍범도가 인솔하는 대한독립군이 1920년 8월 하순 제일 먼저 근거지를 이동하여 1920년 9월 21일 경에는 안투/안도현(安图县/安圖縣)과 접경지대인 화룡현 얼다오고우/이도구(二道县/溝) 어랑촌(漁郞村) 부근에 도착하였다.註 032 뒤이어 일량구(一兩溝 ; 이란고우/衣兰沟/衣蘭溝/이란구)에 근거지를 설치하였던 안무가 인솔하는 국민회군이 근거지를 이동하여 9월 말경에 이도구에 도착하였다.註 033 봉오동에 근거지를 설치하였던 최진동이 인솔하는 군무도독부군은 북방으로 이동하여 9월 말경에 루오즈고우/나자구(罗子沟/羅子溝) 지방에 도착하였다.註 034 이 밖에 의군부, 신민단, 광복단, 의민단 등과 다른 독립군부대들도 모두 근거지 이동을 단행하였다. 왕칭/왕청현 시다포/서대파(西大坡)에 근거지를 설치하였던 가장 막강한 독립군부대인 북로군정서는 마지막으로는 9월 17~18일 근거지 이동을 실행하여 허롱/화룡현 산다오고우/삼도구 청산리(靑山里) 방면에 도착하면 안투/안도현계의 삼림지대에 새로운 근거지를 세울 것인가 또는 창바이/장백현(长白县/長白縣) 방면으로 향하여 서로군정서와 통합할 것인가를 정세를 보아 결정하기로 하고 10월 12~13일에 걸쳐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 도착하였다.註 035
 
중국군은 일제측의 요구에 굴복하여 대한독립군의 근거지였던 명월구에 9월 4일 도착해서 이미 비어 있는 독립군의 막사만 파괴하고 9월 7일 쥐즈지에/국자가(局子街) 옌지/연길로 돌아왔다.註 036 또한 중국군은 역시 일제측의 요구에 굴복하여 북로군정서의 근거지였던 서대파에 9월 19일 도착하여 이미 비어 있는 사관연성소 막사만을 불태우고 돌아왔다.註 037 다른 독립군부대들에 대한 중국군의 ‘토벌’도 이와 같은 형태였다.
 
중국군은 1920년 8월 28일부터 9월 27일까지 1개월간 한국 독립군을 수색·토벌한다고 출동해서 독립군부대들의 근거지 대이동이라는 결과만 가져온 채, 독립군 토벌을 하지 못하고 종결하였다. 맹부덕이 인솔하는 500명의 중국군은 독립군을 토벌할 의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의사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한국민족의 독립군은 이미 수천명의 막강한 군대로 성장하여 만일 전투를 한다면 중국군이 섬멸될 형편이었다. 그 결과 중국군을 동원하여 한국 독립군을 토벌해 보려던 일본군의 기도는 완전히 실패하게 되었다.
 
맹부덕의 중국군에 동행하면서 중국군의 독립군 토벌을 감시한 일본군 고급정보장교는 중국군의 독립군 토벌이 완전 실패이며 독립군의 토벌은 일본군이 직접 주체가 되어 실행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비밀보고서를 제출하고 임지로 돌아갔다.註 038
 
독립군의 근거지 대이동의 결과 최진동이 인솔하는 강력한 군무도독부군과 다수의 독립군부대들이 북방으로 나자구방면으로 이동해 갔지만, 다른 다수의 독립군부대들은 이도구와 삼도구 방면으로 집중하여 이동해 갔다.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의군부, 한민회군, 신민단, 의민단, 광복단 등은 이도구 방면으로 이동했으며, 뒤이어 북로군정서는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처럼 다수의 독립군부대들이 이도구와 삼도구 방면에 집중한 것은 사전에 상호 연락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중시한 때문이었다.
 
첫째, 독립군의 목표의 하나는 국내진입의 독립전쟁에 있었으므로 한국민족의 성산(聖山)인 백두산(白頭山) 기슭의 국경 가까운 밀림지대에 새로운 근거지를 설치하여 후일 국내 진입작전의 실행에 유리한 위치를 갖추려고 한 것이었다.註 039
둘째, 이 지역은 산세가 험준하고 밀림이 하늘을 가릴듯이 울창하여 독립군이 일본군의 공격을 분쇄하기에 유리한 지형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세째, 이 지역은 만주의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의 경계지대여서, 지정학적으로 길림성군이 독립군을 공격하면 필요한 경우에 신속히 요녕·봉천성으로 이동할 수 있고 봉천성군이 공격하면 신속히 길림성으로 이동할 수 있는 요충지대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註 028 「재정 제1호(齋情 第1號)」, 1920년(年) 8월(月) 25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95. 참조.
 
註 029 「멍사령관대표최홍조(孟司令官代表崔鴻釣)의 구춘선(具春先)에게의 서간(書簡)」,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pp. 122~123 참조.
 
註 030 신용하(愼鏞廈), 「독립군(獨立軍)의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의 연구(硏究)」; 신용하(愼鏞廈),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1985), pp. 403~404 참조.
 
註 031 「국민회통달문(國民會通達文)」호외(號外), 1920년(年) 8월(月) 22일자(日字)(대한국민회장대리부회장/大韓國民會長代理副會長 서상용/徐相庸으로부터 제일중지방회장/第一中地方會長에게),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p.94 ; 「국민통달문(國民會通達文)」국민발(國民發) 제(第)207호(號), 1920년(年) 8월(月) 23일자(日字)(대한국민회장대리부회장/大韓國民會長代理副會長 서상용/徐相庸으로부터 대한국민군사령관/大韓國民軍司令官 안무/安武에게) 강덕상 편(姜德相編), 27,pp.94~95 ;「구국단통달문(救國團通達文)」국발(國發) 제44호(第44號), 1920년(年) 8월(月) 28일자(日字)(대한구국단/大韓救國團으로부터 국민회/國民會에게),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p.95 참조.
 
註 032 「전보(電報)」, 1920년(年) 9월(月) 21일자(日字)(발신/發信 관동군참모장/關東軍參謀長, 수신/受信 차장/次長),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264 참조.
 
註 033 「불령선인의 상황(不逞鮮人ノ狀況)」비간정(秘間情) 제51호(第51號), 1920년(年) 11월(月) 1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385 참조.
 
註 034 「재정(齋情) 제22호(第22號)」, 1920년(年) 10월(月) 1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p. 113~114 ;「북로독군부와 국민회의 갈등 건(北路督軍府ト國民會トノ葛藤之件)」. 1920년(年) 8월(月) 29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p.398 참조.
 
註 035 「비간정(秘間情) 제13호(第13號)」, 1920년(年) 10월(月) 13일자(日宇)(간도일본총영사관/間島日本總領事館),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355 참조.
 
註 036 「중국군의 국민회탄압상황보고서(中國軍ノ國民會彈壓狀況報告書)」, 1920년(年) 9월(月) 9일자(日字)(대한국민회장대리부회장서상용/大韓國民會長代理副會長徐相庸),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p. 99 참조.
 
註 037 「간도지방에 있어서 지나관헌의 불령선인토벌개요(間島地方ニ於ケル支那官憲ノ不逞鮮人討伐槪要)」,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28, p. 94 참조.
 
註 038 「재정(齋情) 제(第)12~13호(號)」,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p. 105~116 참조.
 
註 039 이범석(李範奭), 「시산혈하(屍山血河)의 청산리전역(靑山里戰役)」,『신동아(新東亞)』1969년(年) 3월호(月號), p.230 ; 「간도지방불령선인단의 현황 및 일본군대의 출동에 대한 영향에 관한 건(間島地方不逞鮮人團ノ現況及 日本軍隊ノ出動ニ對スル影響ニ關スル件)」비간정(秘間情) 제8호(第8號), 1920년(年) 10월(月) 13일자(日字), (간도일본총영사관/間島日本總領事館),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350 참조.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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