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search.i815.or.kr/publication/yeoljeon/detail.do?id=9-HD0002-000
*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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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1. 산포수 생활
홍범도는 잠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발걸음을 함경남도 북청 방면으로 돌렸다. 그리로 가면 예전에 신계사에서 만났다가 뜻하지 않게 헤어진 단양 이씨를 혹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그 처녀의 고향이 북청이었다는 희미한 옛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또 함경도 개마고원의 험준한 산악지대에는 직업 포수들이 많이 있었는데, 자기도 일정기간 수련을 거치면 훌륭한 산포수가 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자기도 그곳으로 가서 한편으로는 밭을 빌어 농사를 지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냥을 하면 그럭저럭 생계유지는 될 것 같았다.
범도(홍범도)는 1897년경 북청에 정착해서 부자집의 농토를 소작하여 농사를 지으며 틈이 나는 한가한 초겨울에는 사냥에 나서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하는 등 얼마간 홀로 살았다. 이때 그의 나이 벌써 30을 바라보니 당시의 혼인 풍습에 비추어 보면 거의 홀아비에 가까운 노총각이었다. 세월은 무상하여 멈춤이 없이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범도(홍범도)는 북청에서 사냥과 농사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수소문하며 자기의 옛사랑을 찾아보았다.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몇 달이 흐른 뒤에 가까스로 범도(홍범도)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그녀의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단양 이씨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양순(홍양순)이라고 이름한 아들을 데리고 꿋꿋하게 그러면서도 외롭게 살고 있던… 양순(홍양순)이는 범도(홍범도)와 단양 이씨가 헤어졌던 1892년경에 외가집이라고 할 수 있는 북청의 자기 어머니 집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이때 양순(홍양순)이는 겨우 만 일곱살에 지나지 않았으나 후일 그의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십대의 어린 소년으로 의병에 참가하여 중대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범도(홍범도)와 단양 이씨, 양순(홍양순)이는 거의 7년 만에 눈물의 재회를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범도(홍범도)대로 이씨는 이씨대로 또 양순(홍양순)이는 양순(홍양순)이대로 얼마나 애타는 세월이었던가? 이제 범도(홍범도)는 나이 서른이 되서야 정식으로 장가들게 되었다. 뒤늦은 만남이었기에 그들은 서로가 너무나 소중했고 그러기에 세 사람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앞으로는 헤어지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면서….
홍범도는 이씨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이씨가 살고 있던 처가에서 살게 되었다. 처가는 북청군 안산사(安山社: 1914년 풍산군 안산면으로 개칭됨) 노은리(老隱里) 인필골에 있었다. 그곳은 북청에서 갑산쪽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인 후치령(厚峙嶺) 고개 바로 아래였다. 노은리 옆에는 높이 1,527미터의 송동산이 있어서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처음에는 주로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총을 들고 사냥에 나섰다. 범도(홍범도)가 사는 북청 등 관북지방은 함흥과 영흥 등의 일부 평야지대와 해안 연변의 작은 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높고 척박한 산악지대로 되어있어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대단히 노동집약적이며 고된 밭농사 위주의 농업은 소출이 변변치 않은 반면 야생동물의 사냥은 때때로 상당한 수입을 보장했던 것이다.
이 지방은 산이 높고 골이 깊을 뿐만 아니라 인구밀도가 희박해서 인적이 드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울창한 산림에는 호랑이·곰·멧돼지·표범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민가에 내려와 해를 끼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 중에서도 호랑이의 피해는 전통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이를 ‘호환(虎患)’이라 하여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맹수들의 습격을 물리치기 위한 자위수단으로서 덫을 설치하거나 직업 포수들을 고용하기도 했고 주민 자신이 무기를 갖추어서 스스로 수렵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사는 웬만한 청·장년들은 대부분이 농민이면서 동시에 사냥꾼이기도 했다. 사냥꾼들은 산사람과 같은 생활을 할 때가 많았다. 따라서 호탕한 기질과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생활을 했는데, 그런 생활이 범도(홍범도)에게는 잘 어울렸다.
함경도의 포수들은 대부분 여름이나 늦가을과 겨울에 사냥을 하고 봄·여름에는 농사를 지었으며 한겨울에는 한가하게 쉬는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1년 중 약 5개월은 사냥을 하고 7개월은 농업에 종사하거나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
홍범도는 사냥철이 되면 북청 이외에도 이웃고을인 삼수·갑산·장진·흥원 등으로 돌아다니면서 곰·호랑이·사슴·여우·사향노루·멧돼지·검은담비 등을 사냥하였다. 호랑이는 가죽과 뼈가, 곰은 웅담이라 불리는 쓸개가, 사슴은 흔히 녹용이라고 하는 뿔이 값이 많이 나갔다. 여우도 가죽이 쓸모 있었으며 사향노루의 사향은 비싼 약재로 유명했다. 담비는 이곳의 특산으로 널리 알려졌으므로 가죽이 중국으로 많이 수출되었다. 멧돼지는 사냥꾼들에게 별로 인기는 없었지만 밭의 농작물에 많은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농민들로부터 없애달라는 요청이 자주 있었다.
대개 관북지방의 포수들은 혼자서 수렵을 하지 않고 몇 명의 포수들이 협동하여 공동 작업으로 사냥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곰·호랑이 등 맹수가 이 지역에 많은데다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구식 화승총으로 그러한 맹수를 잡으려면 철저하게 잘 짜여진 공동의 협력이 없으면 오히려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또 가끔 식인 호랑이가 출현하면 그 호랑이를 잡을 임무가 부여되는데 그 때에는 평상시보다 많은 대규모의 사냥꾼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홍범도가 가족과 함께 정착한 북청군 안산사에는 포연대(捕捐隊)라는 직업 포수들의 동업조합이 결성되어 있어서 부근 지방까지 그 명성이 높았다. 포연대는 ‘안산사 포계(砲契)’라고도 불리었다. 그것은 사냥꾼들이 대거 참여하여 계의 형식으로 조직되고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범도(홍범도)는 농업과 사냥일을 겸하다가 탁월한 사격술과 우수한 사냥솜씨를 인정받아 이 직업 산포수대에 가입하게 되었다.
포연대는 함경남도 당국의 승인을 받은 합법 조직이었다. 포연대와 같은 사냥꾼들의 조합은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포수들 스스로가 조직한 측면도 있으나 동시에 이러한 조합의 결성에는 유사시에 포수들을 전투병으로 동원하기 위한 봉건정부의 의도가 크게 반영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관헌들은 이 조직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유사시에는 포수들을 정발하였던 것이다. 사냥꾼들의 계 형식의 협동조합 내지 이익단체의 성격을 띠는 이와 같은 조직은 사냥꾼들이 많은 평안도 강계, 함경도 삼수·갑산 등에 많이 결성되어 있었다. 병인양요(1866) 때 강계포수들이 대거 참여한 양헌수(梁憲洙)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던 사실은 포수들이 국방에 동원된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홍범도는 포연대에 가입한 지 얼마 후에 동료들의 신망을 얻어 이 조직의 대장으로 뽑히게 되었다. 포연대장은 지방의 관리들과 교섭하여 세금으로 내는 포획물의 양을 협상하고 이를 납부하는 직책이었다. 일정하고 정확한 포획의 성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수렵의 특성 때문에 지방관리와 포수들은 사냥의 성과물에 관한 협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이지방의 포수들은 대체로 빈궁했고 그들이 사냥 때 쓰는 수렵도구는 거의가 낡은 화승총이었으며 기타 탄약이나 장비도 별로 좋지 않았다. 포수들의 사냥 성과물은 대개 일정치 않았으며 심지어는 허탕치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군의 관청에서는 포수들에게 포획물에 대한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애써 사냥한 포획물을 송두리째 세금으로서 빼앗아 가기도 하였다. 즉 지방관리들이 호랑이 가죽이나 웅담·사향이나 녹용 등을 헐값으로 빼앗아 가는 사례가 자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이 지역에는 평안감사를 삼년하면 거지가 되어가고 삼수·갑산 군수 노릇 삼 년 하면 큰 부자가 되어 간다는 속담마저 전해지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포연대장으로서 동료들의 신임을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사냥을 해보았지만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던가? 사냥감을 쫓아서 수 십리 산과 들을 헤매고 때로는 목숨을 내걸고 사투를 벌이며 운이 좋아야 겨우 목표로 삼은 짐승을 잡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굳세고 강건한 북청 사냥꾼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그는 세금액을 낮추기 위한 과감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그는 포수들 사이에서는 더 큰 신임을 얻었으나 당국과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관리들은 그를 위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매수하려 했으며 더 높은 직책을 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범도(홍범도)는 이를 모두 단호하게 거부하고 완강히 투쟁하여 결국은 사냥꾼들에 대한 정부 당국의 세금을 낮추는데 성공하였다.
범도(홍범도)는 결혼 이후 약 8∼9년간 북청의 안산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이 후에는 안산사 포계의 포연대장을 겸하였다. 그가 포연대장의 직책을 맡은 뒤로는 농사보다는 사냥하는 일에 더 열심이었으며 동료 포수들을 위하여 한층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범도(홍범도)의 일생에서 이 시기가 제일 행복하고 단란한 때였을 것이다. 그는 이씨와 재결합 직후인 1897∼8년경에 두 번째 아들을 얻었다. 범도(홍범도)는 둘째의 이름을 용환[龍煥(홍용환)]이라고 지었다. 첫째 양순(홍양순)이는 범도(홍범도)가 없을 때 그의 부인이 자기 좋을 대로 지었는데 새삼스럽게 다시 개명하는 것도 어색해서 그냥 그대로 양순(홍양순)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둘째 아들 이름은 자기가 손수 짓고 싶었다. 자신의 이름에 호랑이를 뜻하는 음인 ‘범’자가 들어 있으니 아들은 범에 손색이 없는 용같은 씩씩한 녀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용 용자’에 ‘빛날 환자’를 집어 넣었다. ‘용환(홍용환)’ -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범도(홍범도)는 흐뭇하였다. 두 아들은 자기를 닮아서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무렵 나이 서른이 넘은 홍범도는 체격이 컸고 두껍고 새까만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이 때문에 그의 얼굴은 좀 넓어 보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약간 엄격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짙고 두터운 눈썹 아래 깊이 자리 잡은 눈은 차분하고 선량해 보였다. 이때는 단발령이 내린 뒤라 신식 하이칼라식으로 머리를 자른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당시만 해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상투를 틀고 있었다. 특히 북청과 같은 산골에서 사는 사람들은 단발한 사람들을 거의 친일파라고 단정하여 배척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범도(홍범도)도 이때는 상투를 틀고 있었다. 그는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여러 가지 애로에 부딪혀 1908년 말부터 1910년 초반에 걸쳐 만주와 연해주를 왕래하게 되는데, 이 무렵 상투를 자르고 턱수염을 깎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덟 팔(八)자 모양의 콧수염은 평생 자르지 않고 기르고 있었다. 40대 중반인 1912년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홍범도는 얼굴이 약간 길쭉하고 콧대가 우뚝하며 눈에 정기가 있고 입술이 좀 두툼해서 남자답게 잘 생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홍범도와 같이 살았고 뒤에 그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싸웠던 사람들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비교적 냉정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슬픔에는 동정적이었다고 한다. 또 그는 보통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그리고 다정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끌었고 그 자신도 기꺼이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범도(홍범도)는 우정을 존중할 줄 알았고 신의와 포용력이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그의 성품은 인자했고 태도는 겸손했으나 일처리에는 과감하면서도 빈틈이 없었다. 범도(홍범도)의 이러한 사람됨은 그의 동료와 다른 사람들을 그의 주변에 모일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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