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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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포수 의병부대의 조직과 항일무장투쟁
 
2. 산포수 의병부대의 결성과 항전
 
(1) 산포수 의병부대의 결성
 
되 나왔다 되 들어가는데
왜 들어왔다 왜 나가지 않노.
되 들어가 되 안 나오는데
왜 안나가고 왜 죽는거뇨.
 
청일전쟁(1894)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에 조선의 민중들 사이에는 이런 동요가 퍼져서 많이 불리우고 있었다. 이는 청(되)을 은근히 동정하고 일본의 조선 침략을 비꼬는 노래였다. 청일전쟁(1894) 이후 심화된 일본의 침투는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1904년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도발한 뒤에는 이제 노골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미 당시에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든 일본은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체결하고 이어 1905년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을 억지로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1907년에는 소위 ‘정미7조약(丁未7條約, 한일신협약, 1907)’을 통하여 일본인을 각부의 차관으로 임명토록 하였으며 얼마 되지 않은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시켰다. 군대해산 뒤 전국 각지에서는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 이후로 계속 되고 있던 의병들의 항전이 치열하게 재연되었다. 이 봉기에는 군대해산으로 군문에서 쫓겨난 해산군인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함경도 지방에서는 항일 의병투쟁이 1904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자료가 있다.『함경도지』277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904년 3월 21일 밤 함흥에 폭도(의병: 필자) 약 300명이 봉기하여 매우 위험한 순간에 원산수비대로부터 파견된 오꾸다[奧田(오전)] 대위가 인솔한 정찰대와 조우하여 동야반(同夜半), 즉 다음날 22일 오전 2시 반까지 격전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의병 봉기의 기록은 활빈당 같은 농민운동 집단이 의병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느 의병부대의 활동인지 또 그 후에 이들이 어떠한 행적을 보이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의병의 봉기가 함경도 지방에서는 러일전쟁(1904)이 개전된 직후에 일찍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홍범도는 그의 일지에서 러일전쟁(1904)이 한창이던 1904년 9월 초순에 다시 의병활동을 벌였다고 적고 있는데 위의 자료를 보면 그러한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그의 회상이 정확한지의 여부는 추후 면밀하게 조사해 보야 한다는 것이다.
 
1905년에는 함경북도 무산지방의 포수들이 의병대를 조직하여 부령과 회령 등지를 주 무대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항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기도 했다. 그 후 관북지방에서는 항일 의병투쟁이 일시적으로 잠복상태에 있다가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자행되는 1907년 중반부터 격렬하게 일어났다.
 
홍범도는 안산사 일대의 포수조직인 포연대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는 일제의 한민족에 대한 침략이 노골적으로 자행되자 1906년경부터 사냥꾼들이 주축이 된 의병대를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할 계획으로 민중들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였으며 그들을 자기 주위에 끌어 모았다.
 
일제 침략자들은 1905년 이후부터 그들의 침략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행정구역과 지방 행정조직을 개편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06년 9월 전국을 13도(道) 11부(府) 333군(郡)으로 개편하였고 일본인 참여관(參與官)을 두어 행정을 감독케 하였다. 이 무렵 함경도 지방의 행정체계는 군(郡)·사(社)·리(里) 또는 동(洞)의 단위체계로 되어 있었다. 군에는 군수가, 사에는 사존(社尊)과 풍헌(風憲) 및 도헌(都憲)이 지방행정의 책임자로 있었고, 리 또는 동에는 존위(尊位)와 도감(都監)이 있었다.
* 참여관(參與官) : 자문기관, 고문
 
일제는 이러한 봉건적인 지방조직을 자기들의 침략목적에 적합하도록 개편하였다. 즉 군에서 사를 폐지하고 몇 개의 사를 통합하여 몇 개의 면으로 만드는 등 일련의 작업을 거쳐서 행정체계를 뜯어 고쳤던 것이다. 또 군과 사·리·동 등의 행정책임자인 원(元)·사존·풍헌·도헌·존위·도감 등의 직책을 폐지하고 대신에 군수·면장·구장(區長) 등을 신설하여 그들을 일진회원(一進會員) 등 친일분자들로 임명하였다. 1907년 7월에는 보안법(保安法)을 제정하여 집회 및 결사(結社)를 금지하는 등 여러 가지 침략의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1906년 10월 압록강과 두만강의 삼림에 관한 한일합동조관(韓日合同條款)을 체결하고 뒤이어 이듬해 4월에는 영림창(營林廠) 관제를 공포하여 북부지방의 삼림에 관한 통제와 벌채권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1907년부터 삼수·갑산 지방에 삼림의 도벌을 주관하는 목재창(木材廠)을 설치하고 산림의 도벌과 반출을 본격적으로 감행하기 시작했다. 한국 북부지방의 산림에 관한 이러한 일제의 침략은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화전민과 포수들의 생계유지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화전민들은 산에 있는 나무를 벌채하거나 밭을 일구기 위해 불을 지르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처벌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또 울창한 삼림지대가 벌채됨으로써 야생 조수들이 격감하여 포수들의 수렵에도 상당한 손실을 초래하였다. 결국 시시각각으로 자행되는 일제의 침략으로 비교적 다른 지역보다 일제의 침투가 늦었던 북부지방의 주민들은 이제 직접적인 생계의 위협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더욱 부채질을 한 사건이 바로 같은 해에 서울의 군대해산 이후 마지막으로 진행된 북청 진위대의 해산과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의 강제시행이었다. 특히 일제가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강행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은 산포수가 많은 함경도 지방에 매우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07년 9월 3일 제정 공포된 이 법령은 한국 민간인이 갖고 있는 무기와 탄약 및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정부와 관아에서 거두어 들이도록 하고 위반자를 처벌토록 한 것이었다. 이 법은 민간인까지도 완전히 무장해제시켜 결국 의병투쟁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사냥꾼들이 보유하고 있던 수렵용 무기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 법률의 적용에 따라 포수들은 이제 그들의 생업이 위협을 받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는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함경도 지방에는 지역적 특성상 산포수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았기 때문에 무기도 또한 제일 많았다. 그러기에 일제는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함경도 지방 포수들의 무기를 빼앗는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일제의 무기·탄약 회수반이 함경도의 포수들을 찾아와서 총기의 납부를 요구한 때는 1907년 10월경이었다. 즉 일제는 북청의 파발교(把撥橋) 부근에 병력을 파견하여 각 면의 면장들을 앞세우고 포수들의 수렵용 총기를 수거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제의 북청수비대는 북청군의 안산사 내에 있는 포수들의 총을 빼앗으려고 일부 수비대를 그곳에 보냈다.
 
홍범도는 안산사 포계의 동료 포수들에게 총기와 탄약을 일본군에게 납부하라는 꼭두각시 정부와 일본군의 요구를 거부하도록 설득하였다. 나아가 그는
 
“안산사에 그대로 있다가는 왜놈한테 총을 빼앗기게 될 것이니 왜놈들을 후치령 이북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
 
고 주장하였다. 범도(홍범도)는 또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 봉기를 예로 들며 이 시기야말로 두메산골에서 사냥만 하고 지내는 우리일망정 자기의 생존권 및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역설하였다. 범도(홍범도)의 이러한 설득이 주효하여 당시 북청의 36사(社) 포수들은 대부분 그들의 총을 당국에 제출하였으나 유독 안평·안산 두 사의 총기 납부실적은 매우 부진하였다.
 
후치령으로 침입하는 일제 침략자들을 쳐부수고 자기의 생존권을 위하여 궐기하자는 범도(홍범도)의 강력한 권유는 동료 포수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한 범도(홍범도)의 주장과 설득에 동감한 포수들은 그들의 풍부한 사냥 경험을 자랑하며 항일의병대의 조직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범도(홍범도)는 일찍이 행하여 오던 의병조직 사업을 급속히 진행시킬 수 있었다. 그는 동료 포수들뿐만 아니라 차츰 일제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고 있던 화전민과 광산 노동자, 몰락한 빈농민 등을 망라하였고 또한 북청 진위대의 해산으로 실직상태로 있던 해산병도 받아들여 전투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홍범도 의병부대 조직 형성의 기반이 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통칭 안산사 포계라 불리우는 북청군 안산사와 안평사 두 사(후에 면으로 개칭됨) 포수들의 동업조합인 ‘포계’였다. 이 포계의 계장은 당시 임창근(林昌根: 70세)이라는 은퇴한 포수였다. 임창근은 연장자였기 때문에 조합의 장으로 추대되었고 실제로 이때 안산사 포계의 포수들을 고무, 추동하여 의병봉기에 가담시킨 사람은 애초부터 포연대장 홍범도였다. 또 홍범도 의병부대에는 차도선(車道善)을 중심으로 한 북청·삼수·갑산 등지 일단의 포수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홍범도는 차도선과 함께 포수들을 공동으로 지휘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이며 일진회원으로서 안평면의 면장이었던 주도익(朱道翼)은 안평면의 총기 회수실적이 신통치 못하자 주민들에게 단발을 강요하고 총기 등을 납부하라고 독촉하며 금품을 강탈하는 등 행패를 부려서 인근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특히 그는 22세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면장 유병갑(劉炳甲)을 쫓아내고 스스로 면장이 되었고 심지어는 면민의 결혼도 반드시 일진회원과 할 것을 강요하였으며, 주민들에게 일진회에 가입하라고 선전하여 신망을 잃고 있었다.
 
홍범도와 차도선의 인솔하에 약 70여 명의 포수들은 머리에 가죽관을 쓰고 1907년 11월 15일 북청군 안평사 엄방동(嚴方洞: 언방골이라고도 함)에서 모여 의병으로 떨쳐 일어날 것을 결의하였다. 이날이 바로 홍범도 산포수 의병부대의 봉기일이었다. 홍범도가 후치령 전투 전후 시기에 의병부대를 최초로 조직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국내외 대부분의 책 내용은 마땅히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봉기 당시 차도선은
 
“하늘이 일진회의 무리를 없애기 위해 나로 하여금 의를 안산(安山)에서 일으키게 하는구나! 이제 그들을 살륙함으로써 국운을 회복시키려 한다!”
 
고 하며 친일주구인 일진회원의 소탕을 선포하였다.
 
봉기한 포수의병들은 그 다음날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주구로서 가렴주구와 매국친일에 앞장서던 안평면장 주도익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 진목동에서 그를 처단함으로써 결연한 구국의지를 과시하였다. 계속하여 그들은 같은 달 19일에는 역시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파인 안산면장 이쾌년(李快年)과 그의 아들 이봉국(李鳳國)도 총살하여 버렸다. 이튿날인 20일에는 안산사에 거주하는 일진회 회원 최석우(崔錫禹)·이종현(李鐘鉉)·김창식(金昌植)·김창로(金昌魯)·이병필(李炳弼) 등 5명을 한꺼번에 처형하고 부근의 친일분자들을 소탕하여 본격적인 의병투쟁에 나섰다.
 
이러한 사태에 즈음하여 일제는 의병의 봉기라는 그 성격과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부 포수들의 일진회 회원에 대한 반발인 것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축소 해석하였다. 그래서 일제는 그 다음에는 기만적 술책으로 포수들의 총기를 빼앗으려고 했다. 즉 일본군과 경찰이 포수들의 총기를 압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총기에 이름표를 붙여 검사도장을 찍고 총기의 사용권을 합법적으로 인정해주기 위한 조치라고 강변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제 수비대는 산포수들이 파발교 옆의 일본군 병참주재소에 총기를 갖고 와서 이름표를 받은 뒤에 사냥총을 계속 사용하면 되는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속였다.
 
이 같은 기만적 선전에 속은 유기운(劉基云) 등 73명의 포수들은 파발리에 나와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총을 내놓으면서 총기 사용의 허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는 이번에는 총표의 도장이 북청 경찰서 본서(本署)에 있으니 면의 책임자를 데리고 가서 본서에서 날인을 받은 뒤에 총과 총표를 돌려주겠다고 또 속여서 68정(두 명은 총기를 납부하지 않고 도주함)이나 되는 포수들의 사냥총을 거두어 가버렸다. 일부 포수들이 완전히 일제의 계략에 그대로 속은 것이었다. 사냥총은 포수들에게는 실로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물건이었다. 총을 압수당하게 되면 그들은 살아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총은 곧 사냥꾼뿐만 아니라 그들 가족들의 생계가 매달려 있는 생명의 도구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홍범도는 김춘진(金春辰) 등 여러 동료들과 함께 그러한 사태의 심각함과 일제의 간악한 술책에 관해 논의하였다. 그는 안산사 포계의 동료 포수들과 같이 일제의 기만적 책동을 쳐부수기 위한 대책으로서 항일 의병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범도(홍범도)는 일찍부터 진행하여 오던 의병 조직사업을 급속히 진행시키는 한편, 총을 압수당한 포수들을 자기 휘하에 받아들여 일제의 간교한 술책에 속아서 빼앗긴 총을 다시 회수하는 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포수들의 사냥총을 압수한 일본군 수비대는 다음날 그 총을 말 3마리에 싣고 후치령을 넘어 북청으로 반출하려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일본군 수비대가 파발리에서 북청으로 가자면 반드시 후치령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포수들이 억울하게 빼앗긴 총을 되찾을 계획을 세웠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본격적인 의병항쟁은 바로 이 후치령의 길목에서 무기를 빼앗아 북청으로 넘어가는 일본군을 섬멸한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봉기 당시 조직은 약 70여 명의 7개 분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제가 후치령 전투 직후에 입수한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1907년 11월 15일경 홍범도 의병부대의 조직편제와 간부 및 의병대원의 명단·주소는 다음과 같다.
 
제1분대
분대장 차도선(車道善) 부독(副督)
홍범도(洪凡道) 부독
김춘진(金春辰) 참독(參督)
김문엽(金文葉) 정궁(正宮)
김홍윤(金弘允)
주필영(朱必英)
임승조(林承祚)
임용기(林用基)
 
제2분대
분대장 김규연(金奎淵) 안평 서상리(西上里)
김상준(金尙俊) 안평 중지경(中地境)
김기준(金基俊) 안평 진목정(眞木亭)
유용칠(劉用七) 안평 중지경
장양민(張良民) 안평 신점리(新店里)
김용학(金用學) 안평 노은수(老隱水)
이종호(李宗浩)
김상사(金尙社)
이춘덕(李春德) 안평 엄방동
임승수(林承秀) 안평 심포(深浦)
 
제3분대
분대장 임용락(林用洛)
김석필(金錫必) 배왕동(裵王洞)
박지응(朴枝應)
이지옥(李枝玉)
장윤택(張允澤)
조병민(趙丙敏) 미전동(米田洞)
황영팔(黃永八)
이종원(李鍾元)
조병록(趙炳彔)
이일권(李日權)
 
제4분대
분대장 나현서(羅鉉瑞) 엄방동
김학권(金學權)
김학용(金學用)
김달엽(金達葉)
나종수(羅宗洙) 안산 황수원(黃水院)
조광목(趙光牧)
김운용(金雲用)
김명순(金明淳)
신방일(申芳日) 지량봉(志良峯)
설인택(薛仁澤) 노은수
 
제5분대
분대장 김치환(金致驩) 양평(陽坪)
박중실(朴仲實) 양평
김택선(金澤善) 노경봉(老竟峯)
이득책(李得柵) 양평
이창록(李昌祿)
최석책(崔錫柵)
최창건(崔昌乾)
강우봉(姜禹鳳) 양평
정익영(鄭益永) 양평
김경신(金景信) 노양촌(老陽村)
 
제6분대
분대장 임윤석(林允石) 진목전(眞木田)
김운성(金雲星) 안평 심포
이명근(李明根) 위와 같음
송호수(宋虎秀) 위와 같음
이종성(李宗成) 위와 같음
김종인(金鍾引) 진목전
김봉익(金鳳益) 미전동
이종순(李鍾淳) 신점리
홍사영(洪使永) 진목전
김경당(金景棠) 노은수
 
제7분대
분대장 고응렬(高應烈) 노은촌(老隱村)
송석규(宋錫奎) 위와 같음
김준학(金俊學) 위와 같음
이봉재(李鳳在) 감토동(甘土洞)
이종수(李宗秀) 위와 같음
임교수(林喬秀) 안산 황수원
송홍익(宋弘益) 감토동
이성만(李成萬) 노은수
김홍원(金洪元) 서상리
신전태(申田太) 미전동
 
위의 표에 나오는 68명과 도독 1명을 합하여 69명이 1907년 가을에 봉기한 홍범도 의병부대의 간부진과 참가 의병인 것으로 파악된다. 위의 명단에 도독의 이름은 없으나 도독은 앞에서 설명한 안산사 포계의 계장인 임창근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군의 보고문서에는 후치령 전투에서 임창근이 전사했다고 적혀 있는데 그 사실여부는 확실히 단언할 수 없다.
 
위에서 주목되는 점은 제1분대가 지휘본부이며 차도선과 홍범도가 똑같이 부독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휘본부인 제1분대의 분대장이 차도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홍범도가 부독의 자리에 있었음은 궐기 당시 홍범도가 이 조직 안에서 차도선과 동일한 지휘자의 지위에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차도선이 분대장이라는 사실은 의병부대의 조직과정에서 차도선의 기량과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차도선이 홍범도보다 5살이나 연상인 1863년생이었다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홍범도가 자기보다 연장자인 차도선을 우대하여 분대장의 임무를 위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범도(홍범도)는 실제로 부대의 지휘를 차도선과 같이 공동 협의하여 했거나 아니면 서로 분담하여 수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도선이 한때 일제에 ‘귀순’하기 전까지의 이 부대를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홍범도·차도선 다음 제3의 지휘자가 참독인 김춘진이며 정궁의 직책을 맡은 김문엽은 아마도 이 세 사람의 참모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한에서의 한 연구(오길보의 논문 「홍범도 의병대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주중국이라는 17세 소년이 마을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홍범도가 기병할 당시에 포수들을 모집하는 과정에 동참하였다고 한다. 즉 주중국이 지원하는 포수들의 성명을 기록하는 서기의 일을 맡았다는 것이다. 주중국은 그에 관한 유고를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위의 표 제1분대에 있는 주필영이 그일 가능성이 있다.
 
위의 편제는 초창기의 조직인데 후일 각지에서 많은 포수와 농민·광산 노동자 등이 이 부대에 합류함으로써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급속히 팽창하여 부대의 편성은 몇 차례 개편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부대의 개편 내용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 무렵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의 주무기는 대부분 화승총이었다. 총에 소요되는 화약과 탄환은 처음에는 스스로 제조하여 상당기간 동안 자체조달하였다. 갑산에서는 질이 좋은 동(銅)이 산출되었으므로 탄환의 제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총이 없는 의병들은 원시적이지만 창과 도끼·도검 등으로 무장하였다. 하지만 차츰 일본군이 쓰던 근대적 소총을 노획해서 화력을 강화하게 된다. 의병들의 복장은 정해진 제복은 없었으나, 사냥 시에 입던 간편한 복장에 가죽 모자를 썼고 총은 각자 베로 만든 자루나 주머니에 넣어 이를 어깨에 메거나 등에 졌다. 그리고 탄약은 어깨에 두르거나 주머니가 달린 허리띠에 휴대하였으며 허리띠에다가 찐쌀을 5홉 정도 군량으로 두르고 다니기도 했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활동은 제1기(1907년 11월 15일∼1908년 3월 17일), 제2기(1908년 3월 17일∼1908년 11월), 제3기(1908년 11월∼1911년 3월)의 세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홍범도는 제1기에만 차도선과 같이 부대를 공동지휘하면서 싸웠고 그 이후 시기에는 도의병장(都義兵長)으로서 함경도 지방의 거의 모든 의병부대를 지휘했거나 연합해서 투쟁하였다. 그는 체계적인 학문의 소양이나 심오한 지식은 없었지만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후덕한 인품과 빼어난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휘하에 기라성 같은 수많은 명장들을 포섭하여 의병투쟁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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