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본군의 간도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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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중국군을 동원한 한국 독립군 토벌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그들이 이미 1920년 8월에 확정한 간도불령선인초토 계획에 의거하여 일본군이 직접 간도에 출병해서 독립군을 토벌하기로 최종적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간도는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여 간도에 침입할 구실이 없었다.
이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작해 낸 것이 소위 ‘혼춘사건(琿春事件)’이라고 부르는, 만주 마적단의 훈춘/혼춘성 습격사건이었다.
일제는 그들이 매수하여 조종하는 만주 마적단의 하나로 하여금 1920년 10월 2일 혼춘을 습격하도록 유도하였다. 약 300명의 만주 마적단이 10월 2일 새벽 4시 혼춘을 습격하여 상가를 약탈함과 동시에 혼춘에 있는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여 이에 방화하고 숙직 경찰관을 살해한 다음 8시에 퇴각하였다.註 040
일제는 혼춘사건의 조작에 성공하자 각본대로 일본군의 ‘간도출병(間島出兵)’을 실현하기 위한 공작을 전개하였다. 일본의 만주거류민회장(滿州居留民會長)에게 만주에 있는 일본인과 일본영사관의 보호를 위하여 일본군의 출병을 청원하는 전보를 발송케 하고, 이에 응하는 형식으로 일본군은 나남에 사단본부를 두고 있던 19사단 중에서 안부(安部; 아베)대대를 10월 2일 그 날로 혼춘에 파견하여 불법 주둔시킴과 동시에, 일본 육군성은 10월 6일부터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에 따라 일본군을 롱징/용정(龙井/龍井) 등 간도 각 주요지역에 불법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해당 각 사단에 하달하고 출병계획을 일본내각회의에 제출하였다. 일본정부는 1920년 10월 7일 내각회의에서 한국민족의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간도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註 041
일본정부의 이러한 결정에 따라 일본 육군참모부는 10월 7일 밤에 제 19사단과 시베리아에 출병 주둔해 있던 3개 사단의 포조(浦潮 ; 우라시오) 파견군에게 일본정부의 결정을 알리고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에 의거한 일본군의 본격적 병력 출동을 명령하였다.註 042
그러나 중국의 영토인 간도에 일본군을 출병시킨다는 것은 불법이었으며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반드시 먼저 중국정부의 승인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일본정부는 중국정부와 만주군벌에 온갖 교섭과 공작을 하고 압력을 가했으나 결국 10월 13일 중국정부로부터 최종적으로 거부되었다.註 043
일본정부와 일본군은 중국정부의 거부로 합법적인 ‘간도출병’이 불가능하게 되자 제국주의·군국주의자들의 본색을 드러내어 일본군을 중국영토인 간도에 그대로 출병시켜 군사작전을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4일 이를 선언하였다.註 044 이것은 중국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한 만행이었다. 일본군은 10월 16일 만주군벌에게 일본군이 10월 17일 0시를 기하여 간도에서 한국 독립군 토벌의 군사행동을 시작함을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일본군은 이와 함께 ① 일본군의 토벌작전지역은 동지철도(東支鐵道) 이남 20리 이외의 동녕(東寧)·혼춘·연길·왕청·화룡 등 5현으로 하고 ② 일본군대는 2개월의 최단시일에 군사행동을 종료할 것이며 ③ 일본군은 위의 지역 이외에는 출병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사항을 중국군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註 045 이것은 중국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하고 유린한 간도에 대한 침략이요, 침입이었다.
일본군이 불법적 간도침입을 자행하면서 한국민족의 독립군 토벌을 위하여 동원한 병력의 규모는 육군 5개 사단과 지원군으로서 관동군(關東軍)의 일부를 동원한 엄청난 규모의 것이었다.
일본군은 한국 독립군 토벌을 위하여 나남에 두었던 제19사단 사령부를 침입작전 기간에 회령(會寧)으로 이동 설치했으며, 용산(龍山)의 제20사단으로부터 1개 대대와 기타 보조병력을 차출하여 첨가하고, 시베리아의 제14사단으로부터도 일부병력을 차출하여 19사단에 편입시킨 다음, 제19사단 전부를 주력으로 동원해서 독립군과 직접 수색·전투에 들어간 다음 3개의 ‘토벌지대(討伐支隊)’를 편성하였다.註 046
이소바야시/기림지대(磯林支隊)
지대장 육군소장 기림직명(磯林直明:이소바야시 나오아끼).
보병 제38여단 사령부.
보병 제75연대(제1·제3대대의 각 2중대 및 제2대대 결여. 기관총 2개소대. 특종포대, 통신반(丙), 위생반을 부가).
보병 제78연대 제3대대(기관총 1개 소대, 통신반 4분의 1, 戊위생반을 부가). 기병 제27연대 제3중대(半소대 결여).
야포병(野砲兵) 제25연대 제2대대, 야포 1중대, 산포(山砲) 1소대(山砲는 추가하여 편성상 배속함).
공병(工兵) 제19대대 제2중대.
헌병 약간.
기무라/목림지대(木林支隊)
지대장 육군 보병대좌 목촌익삼(木村益三:기무라 마스미).
보병 제76연대(제1·제3대대의 각 2중대 및 제2대대 결여. 기관총 2개 소대, 특종포대, 통신반, 甲위생반을 부가).
기병 제27연대 제2중대의 1소대.
산포병 제1중대(1개소대 결여, 추가하여 편성상 배속함).
공병 제19대대 제1중대의 1소대.
헌병 약간.
히가시/동지대(東支隊)
지대장 육군소장 동정언(東正彥:히가시 마사히꼬)
* 원문과 일본어 검색 일부에서는 "아즈마"라 나오지만 일본어 검색 대부분에서는 "히가시"로 나오기 때문에 바꿨습니다.
보병 제37여단 사령부.
보병 제73연대(제1대대 및 제10중대 결여. 특종포대, 乙위생반율 부가).
보병 제74연대 제2대대(기관총 2개소대, 통신반, 丁위생반을 부가).
기병 제27연대(제2중대 1개소대 및 제3중대 결여).
야포병 제25연대 제1대대. 야포 1개중대. 산포병 1개중대(산포는 추가하여 편성상 배속함).
공병 제19대대 제3중대.
헌병 약간.
무산(茂山) 주둔 보병 1개대대 추가.
사단직할부대
보병 제74연대 제1대대 본부 및 제3중대.
비행기반.
무선전신반.
비둘기통신반.
위의 3개 지대의 병력은 모두 약 1만2천 명으로서 이소바야시/기림지대가 약 4천 명, 기무라/목림지대가 약 3천 명, 히가시/동지대가 약 5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동지대가 병력은 물론 화력에 있어서도 기병과 포병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가장 막강하였다.
일본군의 간도침입 동원 병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위의 3개 지대의 독립군에 대한 공격에 책응케 하기 위하여 시베리아 연해주 주둔군〔浦潮軍〕으로부터 제11사단의 1부대를 ‘바라바시’에서 투먼즈/토문자(土门子/土門子) 방면으로, 제13사단의 1부대를 산차커우/삼차구(三岔口)에서 라오헤이샨/노흑산(老黑山) 및 루오즈고우/나자구 방면으로 진군시켜 동북방으로부터 밀고 내려오게 했으며, 제14사단의 제28여단을 ‘포세트’만에 상륙시켜 훈춘/혼춘·량쉐이천즈/양수천자(凉水泉子)·쥐즈지에/국자가 부근을 거쳐 회령을 향해서 진군하면서 동방으로부터 밀고 들어오게 하였다.註 047 또한 용산의 제20사단에서 일부 병력과 조선헌병대와 조선총독부 경찰대를 동원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의 국경수비를 담당하면서 독립군의 국내진입을 막고, 필요하면 명령에 따라 강을 건너 독립군 토벌에 책응케 하였다.註 048 한편 관동군은 일부 병력을 동원하여 중국군과 합동으로 서간도에서 독립군의 이동을 막고 독립군에 서쪽으로부터 압박을 가하도록 하였다.註 049
* 바라바시 : 바라바쉬 (Barabash, Барабашское)
* 포세트 : 포시예트 (Posyet, Посьет)
그 결과 한국민족의 독립군 토벌에, 일본군은 제19사단 전부, 제20사단 일부, 제11사단·제13사단·제14사단의 일부 등 5개 사단에서 차출된 거대한 병력을 동원했으며, 그 실병력은 2만5천 명에 달하였다. 여기에 관동군까지 지원병력의 구실을 하도록 배치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 거대한 규모의 병력으로 독립군을 이중으로 포위하여 섬멸하려고 하였다. 즉 ① 일본군 5개 사단에서 차출한 2만5천 명의 병력과 관동군에서 동원한 병력으로 북간도의 독립군부대 전체를 동서남북으로 모두 넓게 포위하여 그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고, ② 그 포위망 안에서 다시 제19사단 주력의 3개지대의 1만2천 명의 병력으로써 북간도를 갑(琿春支隊)·을(百草溝支隊)·병(龍井·局子街支隊)의 3개 구역으로 나누어 각 지대가 오지에 들어가 내부에서 좁게 포위하여 독립군 각 부대를 수색해서 전투를 통하여 독립군부대들을 모두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북간도 오지에서는 ① 이소바야시/기림지대가 갑구인 훈춘/혼춘-차오마오딩즈/초모정자(草帽頂子) 지방의 독립군을 포위 섬멸하고, ② 기무라/목림지대가 을구인 시다포/서대파-하마탕/합막당(蛤蟆塘)-바이차오고우/백초구 지방의 독립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며, ③ 히가시/동지대가 롱징/용정-다취고우/대굴구(大屈沟/大屈溝)-국자가-토우다오고우/두도구(头道沟/頭道溝) 지방의 독립군을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註 050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의 작전 목표를 2단계로 나누어 설정하였다. 즉 ① 제1단계에서는 작전 개시일로부터 1개월 이내에 독립군 무장대를 철저히 색출하여 섬멸하고 반복토벌을 되풀이 실시하여 독립군을 전원 섬멸하거나 검거해서 독립군의 무장항쟁을 근원까지 철저히 박멸한다는 것이요, ② 제2단계는 제1단계가 끝난 후로부터 다시 1개월 이내에 촌락에 잠복하고 있는 독립군 ‘잔당’과 민간인 독립운동가를 철저히 색출하여 무장독립군 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비무장 독립운동까지 뿌리를 뽑겠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 작전 목표에 따라 10월 7일부터 간도에 침입하기 시작하여 집결한 부대들을 정돈해서, 이소바야시/기림지대가 10월 14일 훙춘/혼춘강 골짜기의 평야지대에 출동하기 시작했으며, 기무라/목림지대가 10월 17일 왕칭/왕청 방면으로 출동했고, 히가시/동지대가 10월 15일 롱징/용정에 도착한 후 10월 18일 산다오고우/삼도구에 있는 김좌진(金佐鎭)부대와 얼다오고우/이도구에 있는 홍범도부대를 찾아서 출발하였다.
이 중에서 우리가 이 글에서 고찰하는 청산리독립전쟁은 일본군 히가시/동지대가 산다오고우/삼도구와 얼다오고우/이도구 일대의 독립군부대들을 포위 섬멸하려고 시도하자 독립군이 반격하여 일어난 전투였다.
주
註 040 「전보(電報)」, 1920년(年) 10월(月) 3일자(日字)(발신/發信 조선사령부/朝鮮司令官, 수신/受信 육군대신/陸軍大臣), 김정명 편(金正明編)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Ⅲ, p. 185 참조.
註 041 「다이쇼(大正) 9년(年) 10월(月) 7일(日) 각의결정(閣議決定)」,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28, pp.184~186 참조.
註 042 김정주(金正柱), 앞 책, pp. 25~26 참조.
註 043 「간도출별에 관한 건(間島出兵に關する件)」, 1920년(年) 10월(月) 14일자(日字), 김정명 편(金正明編),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Ⅲ, p. 193 참조.
註 044 「간도출별에 관한 건(間島出兵に關する件)」, 1920년(年) 10월(月) 14일자(日字), 김정명 편(金正明編),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Ⅲ, p. 193 참조.
註 045 김정주(金正柱), 앞 책 , pp. 39~40 참조.
註 046 김정주(金正柱), 앞 책, pp. 41~43 참조.
註 047 김정주(金正柱), 앞 책 , pp. 43~44 참조.
註 048 「압록강대안불령선인토벌계획에 관한 건 통첩(鴨綠江對岸不逞鮮人剿討計劃ニ關スル件通牒)」, 1920년(年) 10월(月) 13일자(日字), 조선헌병대사령부부관(朝鮮憲兵隊司令部副官), 강덕상 평(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p. 198~203 참조.
註 049 「대신으로부터 관동군사령관에게 전신안(大臣ヨリ關東軍司令官へ電報案)」,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197 참조.
註 050 김정주(金正柱), 앞 책, p.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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