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봉오동대첩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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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의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한국민족과 일본군에게 다 같이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독립군의 봉오동대첩은 독립군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의 전체 독립 운동가들과 동포들의 사기를 크게 앙양시켰다. 독립군은 봉오동전투를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부르면서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를 대폭 강화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제측은 비밀리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우리 월강추격대에 반항하여 교전한 불령단(不逞團)은 그 전투(봉오동전투……필자)에서 비상한 대승리를 얻고 우리 대원(일본군……필자)을 조선측에서 격퇴한 것 같이 고취하고 있다. 또한 이를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칭하며, 금후 계속될 전투에 대해서 양식의 준비, 간호대의 조직, 병원(兵員)의 모집 등에 더욱 힘쓰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격문을 띄워 크게 선전에 노력하고 있으며, 금회의 전투를 교묘히 악용하여 기세를 높이고 있다. 봉오동 방면에는 다수의 불령단이 집합하고 있는 모양이다. 또한 이를 기회로 하여 각 단체 간의 결속을 굳게 하고 있다. 금회의 추격은 도리어 나쁜 결과를 후에 잉태한 것이라고 관찰된다.註 021
또한 일제의 조선군사령관은 봉오동전투 후에 한국 민족과 독립운동가들의 사기가 크게 고무되어 독립군이 더욱 증강되고 있으며 재전투 준비를 신속히 행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간도파견원의 보고. 우리 추격대의 철거 후 독립군의 각 단은 매우 민속하게 우리 군사와의 교전을 선전하고 있다. 도독부는 군정보(軍情報) 신보호외(新報號外)를 발행하고, 국민회도 인쇄물로써 독립군은 일병과 교전의 결과 적 150명을 죽이고 적을 선지(鮮地)에 격퇴하고 대승을 얻었다고 고취하며 독립기세의 흥진(興振)을 책모(策謀)하고 있다. 독립군 각 단체는 계속하여 교전을 예상하고 군사행동에 대한 각 단 연락 방법 및 식량, 장정 등의 재전투준비를 신속히 행하고 있는 것 같으며, 장정들이 속속 독립군에 들어가고 있다. 일·지(日·支) 합의에 의하여 교전지 피해조사를 위한 지나군대 보호하에 우리 경관 수 명을 2,3일 내에 피해지를 시찰시키려 하고 있다. 정보에 의하면, 앞서의 교전의 적은 두만강대안 독립군의 전부인 것 같으며, 우리 병사의 철퇴 후에 독립군은 강안(江岸)지대의 요점에 정찰대를 파견하여 대안정황을 정찰 중이다.註 022
* 민속하다 : 행동이나 일의 처리 따위가 날쌔고 빠르다
* 선지(鮮地) : 조선지역?
* 흥진(興振) : 떨치어 일어남. 또는 떨치어 일으킴
* 책모(策謀)하다 : 어떤 일을 꾸미고 이루어 나가다. 계획하다
* 일·지(日·支) : 일본과 지나(중국)
* 대안(對岸) : 강, 호수, 바다 따위의 건너편에 있는 언덕이나 기슭
* 강안(江岸) : 강물에 잇닿은 가장자리의 땅
한편 일본군은 봉오동전투에서의 패전에 큰 충격을 받고, 계속하여 더욱 증강되어 가는 독립군의 군세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봉오동전투에서 패전한 직후 그 전보 보고문에서, 봉오동에 있는 독립군부대가 정식의 군복을 착용하고 임명 등에 사령(辭令)을 쓰고 있으며 전적으로(정규군과 같은) 통일된 군대조직을 갖추고 있다고 경악하고 있으며, 중국측이 이를 묵인하고 있으므로 중국측에 경고를 줄 필요가 있다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 사령(辭令) : 임명, 해임 따위의 인사에 관한 명령 ?
금회 다음의 사실을 확인하였다. 대안불령선인단(對岸不逞鮮人團)은 정식의 군복을 사용하고 그 임명 등에 사령을 쓰며 예식을 제정하고 있는 등 전적으로 통일된 군대조직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나측은 이를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제 경고(警告)를 줄 필요가 있다.註 023
일본군은 3·1운동 후 간도에서의 독립군부대들의 편성 강화와 국내 진입 작전에 시달리면서도 일본정규군이 강을 건너 전투만 하면 독립군은 쉽게 ‘진압’할 수 있는 민병단(民兵團)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후에는 독립군의 막강함을 체험하고 독립군은 중국군경으로서는 이를 ‘진압’할 수 없는 막강한 군대이며, 독립군이 간도지방을 장악하게 될 뿐 아니라 독립군이 계획하고 있는 국내진입작전이 본격적으로 감행되면 일제의 식민지통치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일제측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간도에 있어서의 불령선인단의 위력은 더욱 강대를 가하여 무시할 수 없는 현세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하루 아침에 그들이 흉위(兇威)를 나타내기에 이르면 지방군경 같은 것은 도저히 이를 진정(鎭定) 할 수 없으며 홀연히 간도지방은 그들에게 유린될 것임은 명료한 것이다.…… 그들이 장정의 모집, 총기의 준비, 군량의 징발 등 극력 군자(軍資)와 무력 충실에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그들이 계획하고 있는 조선국경의 습격 및 간도지방 일본관헌의 취체(取締)에 대한 반항적 행동은 기회를 타서 감행하기에 이를 것이라고 관측할 수 있다.註 024
* 현세 : 현재의 정세. 또는 그 정세를 주도하는 세력
* 흉위(兇威) : 흉악한 위세
* 진정(鎭定) : 반대하는 세력이나 기세를 억눌러 안정되게 함
* 극력하다 : 있는 힘을 아끼지 않고 다하다
* 취체(取締) : 규칙, 법령, 명령 따위를 지키도록 통제함
일본군은 봉오동전투에서의 참패에 충격을 받고 한국 독립군부대들의 군세의 증강에 놀라 두 가지 대책을 세웠다. 그 첫째는 만주군벌 장쭤린/장작림(张作林/張作林)에게 압력을 가하여 일본군의 지도하에 중국군을 출동시켜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대책이었고,註 025 다른 하나는 1920년 7월 하순부터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이라는 일본군의 직접 출동에 의한 독립군 토벌계획을 입안하여 8월에 이를 확정한 것이었다.註 026 일본군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에 의거하여 일본군이 직접 간도에 침입해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하여 1920년 9월 2일 동원될 일본군 각 부대에게 출동준비를 계획하도록 통첩하였다.註 027
주
註 021 「전보 제166호(電報 第166號), 암제(暗第)8203호(號)」, 1920년(年) 6월(月) 15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p. 608.
註 022 「전보(電報) 조특(朝特) 제(第)45호(號)」, 1920년(年) 6월(月) 15일자(日字). 김정명 편(金正明編),『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Ⅲ, p. 178.
註 023 「전보(電報) 밀(密) 제(第)102호(號)」, 1920년(年) 6월(月) 15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p.585.
註 024 「금후에 있어 간도지방 불령선인단의 행동에 관한 관찰(今後ニ於ケル間島地方不逞鮮人團ノ行動ニ關スル觀察)」고경(高警) 제(第)21186호(號), 1920년(年) 7월(月) 21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篇), 앞 책, p.358.
註 025 김정주(金正柱),『조선통치사료(朝鮮統治史料)』제(第)2권(卷)(도쿄/東京 : 한국사료연구소/韓國史料硏究所, 1970), pp. 6~8 참조.
註 026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 1920년(年) 8월(月) 조표(調表), 강덕상 편(姜德相篇),『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28, pp. 116~121 참조.
註 027 김정주(金正柱), 앞 책, p.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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