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청산리독립전쟁"의 도입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개별 전투는 다른 글에 옮깁니다.
6) 청산리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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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독립전쟁의 첫 전투는 일본군 히가시/동지대가 김좌진이 영솔하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공격해 오다가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산다오고우/삼도구 칭샨리/청산리 바이윈핑/백운평(白云坪/白雲坪) 부근의 골짜기에서 북로군정서의 반격을 받은 전투이다. 여기서 시작된 전투는 얼다오고우/이도구 부근으로 옮겨지면서 1920년 10월 26일 새벽까지 약 6일간 10여 차례의 대소 전투들이 쉴새없이 전개되어 한국독립군이 일본군을 패전시키고 이도구와 삼도구에서 철수할 때까지 연속되었다.
* 東支隊(동지대)의 東은 근대사료DB에서는 "아즈마"라 옮겨 놓았으나 일본어 사이트에서는 "히가시"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청산리독립전쟁의 개념과 범위의 문제가 대두된다. 즉 삼도구 청산리의 바이윈핑/백운평 전투만을 ‘청산리독립전쟁’이라고 좁은 개념을 설정하고, 나머지 전투들도 모두 그것이 일어난 낱낱의 지명에 따라 각각의 독립된 개별적 이름을 붙일 것인가, 또는 산다오고우/삼도구와 얼다오고우/이도구 일대에서 벌어진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동지대 사이의 10여 차례의 일련의 전투들을 묶어서 ‘청산리독립전쟁’이라는 넓은 개념을 설정한 것인가의 문제이다. 만일 전자의 협의의 개념을 정립하면, 이것은 곧 삼도구 청산리에서 일어난 백운평전투 하나만을 의미하고 ‘청산리독립전쟁’은 백운평 전투를 수행한 북로군정서 단독의 독립전쟁이 된다. 만일 후자의 광의의 개념을 정립하면 ‘청산리독립전쟁’은 삼도구에서 전개된 백운평전투 뿐만 아니라, 이도구에서 전개된 완루구(完樓溝)전투, 천수평(泉水坪)전투,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萬麒溝)전투, 쉬구전투, 천보산(天寶山)전투, 고동하곡(古洞河谷)전투 등을 포함하게 되고, ‘청산리 독립전쟁’은 북로군정서와 함께 이도구 일대에서 일본군을 패전시킨 대한독립군 등 다른 독립군부대들도 참전하여 공동으로 수행한 독립전쟁이 된다.註 051 여기서는 ‘청산리독립전쟁’에 대한 광의의 개념을 사용하기로 한다.
* 완로우고우/완루구(完楼沟/完樓溝) / 콴슈이핑/천수평(泉水坪) / 위랑춘/어랑춘 / 맹개골
* 맹개골 = 멍지아고우/맹가구(孟家溝/孟家沟)
* 완치고우/만기구(万麒沟/萬麒溝) / 쉬구/서구(西构/西溝) ?
* 톈바오샨/천보산(天宝山/天寶山) / 구동허구/고동하곡(古洞河谷)
또한 여기서 광의의 개념을 사용할 때 ‘청산리독립전쟁’과 ‘청산리전투’ 중에서 어떠한 용어가 더 적합한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청산리독립전쟁은 크고 작은 다수의 ‘전투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하나의 소독립전쟁으로 보아 손색이 없고, ‘청산리전투’라고만 하면 그 안에 포함된 ‘청산리 백운평전투’ 등 다른 ‘전투들’과 혼동을 일으키기 쉬우므로 여기서는 ‘청산리독립전쟁’의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한국 독립군부대들을 포위한 일본군 아즈다/동지대는 산다오고우/삼도구에 있는 북로군정서 독립군(600명)을 토벌 섬멸하기 위해서 산전(山田:야마다)토벌 연대를 용정으로부터 삼도구 청산리 방면으로 보내어 10월 20일을 기해서 김좌진부대를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註 052 한편 이도구에 주둔하면서 홍범도의 지휘를 받고 있던 대한독립군(300명)·국민회군(250명)·의군부군(150명)·한민회군(200명)·광복단군(200명)·의민단군(100명)·신민단군(200명) 등의 홍범도연합부대에 대해서는 일본군 아즈다/동지대의 지대장 히가시 마사히코/동정언이 인솔하는 히가시/동지대의 주력이 19일 오전 8시를 기해서 얼다오고우/이도구로 출동하도록 명령하였다. 일본군은 기병과 포병을 포함한 약 5천 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이도구와 삼도구를 포위하여 그 안에 있는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를 10월 20일을 기해서 총공격하여 섬멸하려고 작전을 개시한 것이었다.註 053
독립군은 처음에는 병력과 화력의 열세를 고려하여 ‘피전책(避戰策)’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일본침략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추격해 들어오면서 한국인 촌락을 통채로 불지르고 선량한 동포 농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것을 보고 결정을 바꾸어 일본침략군을 공격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청산리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 피전책(避戰策) : 전투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직접 교전을 회피하면서 안전지대로 이동하는 것
주
註 051 신용하(愼鏞廈), 「독립군(獨立軍)의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의 전투(戰鬪)들의 구성」, 『사학연구(史學硏究)』제38호(1984) 참조.
註 052 「전보(電報)」조선 제102호(朝鮮 第102號), 1920년(年) 10월(月) 19일자(日字)(발신/發信 조선군사령관/朝鮮軍司令官, 수신/受信 육군대신/陸軍大臣),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p. 216~217 참조.
註 053
「암호전보(暗號電報)」제(第)56호(號), 암(暗) No. 15600, 1920년(年) 10월(月) 19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3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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