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2일째 오전에는 우하량 유적지를 답사합니다. 우하량 유적지는 중국이 주장하는 요하문명 가운데 꽃에 해당하는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입니다.
중국에서 명명한 요하문명, 홍산문화라는 개념부터 정리하자면, 중국에서는 특정한 공간과 시간적으로 계승관계에 있는 여러 고고문화를 모두 엮어서 **문명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리고 특정한 유형을 갖춘 시대가 유사한 유적지를 묶어서 하나의 고고학문화로 묶어 버립니다. 중국에서는 홍산문명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요하문명이란 범주 안에 홍산문화가 들어있습니다. 문명, 문화에 대한 일반적 정의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이들 문화들은 기후의 변화, 인구의 이동 등으로 인해 계승 관계가 불연속인 경우도 있습니다. 요하문명의 꽃이라 불리는 홍산문화 다음에 등장하는 소하연문화는 옥기 제작기술이나 무덤이나 제단 등 건축 기술에서는 홍산문화보다 뒤쳐집니다. 조보구문화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문양 제작 기법은 요하 지역에서는 계승되지 않고, 도리어 러시아 하바로브스키 지역에서 발견된 ’아무르의 얼굴‘이란 토기 유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하문명은 하나의 단일한 문명이 아니며, 단일한 종족이 만들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중국 학계가 요하문명 연구를 주도하고 있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무리한 것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우리나라 학계, 재야 학계에서 주장하는 것들 또한 선입견에 불과한 것들도 많습니다.
1981년 요녕성 능원현과 건평현 경계지역인 우하량촌에서 홍산문화를 대표하는 우하량유적이 발견됩니다. 우하량 유적은 B.C 3,500년까지 올라가는 대형제단, 여신묘, 적석총 떼가 어우러진 종교유적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여신묘(女神廟) 안에서는 군집을 이룬 신상(神像)들이 보이는데, 인간 실물의 1배, 2배, 3배의 크기로 형태도 다양합니다. 가장 큰 신이 주신(主神)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양한 형태의 옥기가 매우 풍부하게 발굴되었고, 신분의 차이에 따라 옥기 부장품의 숫자가 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적석총도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계단식 적석총도 등장하며, 크기도 초대형인 것도 있습니다. 또한 토기도 여러 형태가 나오는데, 채색을 입힌 토기(彩陶)도 등장합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우하량 유적 발굴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1) 계급 완전 분리, 권력 탄생, 2) 사회적 분업, 3) 초기국가단계 혹은 초기 문명단계 진입.
우하량 유적에 대해 중국에서는 중화문명 예제의 기원, 더 나아가 중화문명의 기원이 이곳에서 출현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우하량 유적 발견과 이후 흥륭와, 사해 유적 등을 발견하면서, 중국학계에서는 더 이상 황하유역이 중국 역사의 시원이란 주장을 하지 않게 됩니다. 황하 유역의 용산문화, 양자강 하구의 하모도문화보다, 만리장성 밖 요하 일대의 신석기, 청동기 문화들이 더 오래되고 수준이 높은 것들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최근 중국은 홍산문화를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황제(黃帝)가 만든 문화라고 주장하며, 중국사의 시원을 바꾸려고 합니다. 우하량 유적 발굴이 중국사를 바꿀 만큼 대단한 유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하량 유적과 홍산문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홍산문화는 우하량 유적을 비롯해, 요령성 조양시와 내몽골자치구 적봉시와 오한기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의무려산에서 서쪽으로 연산산맥을 넘고, 북쪽으로 시라무렌(서요하)를 넘어 몽골초원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전한 문화입니다.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옥기, 빗살무늬토기, 적석총 등 우리 문화와 관련 있는 문화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우하량 유적지를 토대로 이때 초기 국가단계(邦國)로 진입하였다고 하지만, 한국 학계에서는 비판적으로 봅니다. 하지만 초기 국가단계로 진입하지 못했다고 해서 우하량 유적, 홍산문화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요하문명의 핵심 시기인 흥륭와문화에서 홍산문화가 발전하는 B.C 6,000 ~ B.C 3,000년 시기는 요서지역의 연평균이 기온이 지금보다 높았고, 현재보다 습한 기후였다고 합니다. 현재와 다른 기후 조건, 생태환경에서 홍산문화가 왜 이렇게 탄생했을까? 우하량 유적지에 묻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은 왜 옥기를 선호했을까? 왜 이 시기 유적에서는 무기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을까? 왜 홍산문화는 급격히 사라진 것일까? 홍산문화를 만든 옥기 장인, 석기 장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등등 우리가 먼저 풀어야 할 궁금증들이 많습니다.
우하량 유적지를 통해 고대문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불필요한 논쟁보다, 현실적인 연구가 더 필요한 시기입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요하문명에 대해 섣부르게 단정하지 말고,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는 열린 자세로 접근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소 민감한 이야기는 답사 현장에서 해설하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하량 유적을 소개하는 사진 자료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하량 유적 사진은 2012년에 발간된 우하량 홍산문화유지 발굴보고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현재는 주요 유적지 일대를 거대한 돔경기장처럼 만든 전시관 안에 보호하고 있습니다. 또 거대한 여신상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유적 공원도 주변에 있습니다.
우하량 발굴지역 항공사진
우하량 출토 여신상 얼굴 (최근에는 여신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옴)
여신 사당 발굴지1. 총대와 석체묘실 (서-동) 2 묘실서벽 (동-서) 3 총대동외벽 및 그 하부체석 (동-서) 4 대벽동북각 (동북-서남) 5 북대벽동O체O 상태 (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