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14840001
위만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위만조선을 세운 인물
일반정보
위만조선을 세운 인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잠부론(潛夫論)』에서는 “위만(魏滿)”으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에서는 “만(滿)”으로,『위략(魏略)』과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등에서는 “위만(衛滿)”으로 표현되었다.
전문정보
위만조선을 세운 인물로,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1 위만조선조에서는 “위만(魏滿)”으로 기록되었지만,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조선전(朝鮮傳)에서는 “만(滿)”이라고만 하였다. 당대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뒤인 후한(後漢) 때 쓰인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 권9 지씨성(志氏姓)35에서 “위만(魏滿)”이라는 글자가 처음 보이며, 이후 『위략(魏略)』과 『삼국지(三國志)』,『후한서(後漢書)』등에서는 “위만(衛滿)”이라고 기록되었다. “위만(衛滿)”이었을 경우 “위(衛)”가 과연 성이었는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다만 『위략(魏略)』과 『삼국지(三國志)』 이래로 오랜 기간 “위만(衛滿)”이라고 기술되어온 만큼, “위(衛)” 또는 “위(魏)”가 성이든 아니든 간에 “위만”은 왕조의 성립자 이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통용하여도 무방하리라고 본다.(노태돈, 2000)
위만은 전한 초에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기원전 195년 무렵에 흉노(匈奴)로 망명했을 즈음에 천여 명의 무리들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해 와서 고조선의 진고공지(秦故空地) 상하장(上下障)에 거주하였다. 이후 점차 진번조선만이(眞番朝鮮蠻夷) 및 연(燕) 제(齊)의 유이민들을 모아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위략(魏略)』에서는 위만이 처음 고조선으로 망명해왔을 때,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을 박사(博士)로 임명하여 서변(西邊)을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위만이 중국 유이민들을 꾀어 무리를 모아 준왕(準王) 정권을 무너뜨린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위만과 함께 왔다는 천여 명의 무리들은 그 신분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전후 사정으로 보아 다수의 군인들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가 조선에 와서 번병(藩屛) 노릇을 하겠다고 자처한 것도 그의 무리가 군인으로 구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정착 후에 더 많은 무리들을 모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준왕이 숙위를 맡겠다고 나선 위만에게 쫓겨난 것은 바로 위만이 거느린 군사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김정배, 1986)
위만조선을 건국한 만(滿)의 출자에 대해서는 한계(漢系) 연인(燕人)이라는 견해(三上次南/미카미지난, 1966), 고조선계 유민(이병도, 1976) 또는 맥족계의 연인이라는 견해(김한규, 2004), 조선인이라는 견해(사회과학원, 1999) 등이 있다.
위만은 토착세력 집단의 고유한 습속에 동화됨으로써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는 위만이 망명해올 때 북상투를 틀고 만이복(蠻夷服)을 입었다는 것과 국호를 계속 조선(朝鮮)으로 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이병도, 1976) 그러나 북상투(魋結/추결)는 조선인만의 풍속이 아니고 남월(南越)이나 중국에도 그러한 풍속이 있었으며, 만이복(蠻夷服)도 반드시 조선(朝鮮)의 의복을 뜻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위만(衛滿)을 조선인계통(朝鮮人系統)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도 있다.(김한규, 2004) 다만, 『사기(史記)』, 『염철론(鹽鐵論)』, 『한서(漢書)』, 『위략(魏略)』 등 여러 사서에서 위만이 전한(前漢) 초에 연(燕) 지역에서 망명해 왔다고 전하고 있어, 최소한 위만은 연 지역에 살았고, 연의 문화권에서 성장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사기(史記)』에서는 만왕을 옛 연나라 사람(故燕人)이라고 표현하여, 『한서(漢書)』의 연나라 사람(燕人)이라는 표현과 다르다. 연은 전국시대의 연과 한후국(漢侯國)으로서의 연나라로 구분되며, 연후국은 만왕이 책봉을 받은 시기는 물론 사마천 당시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일 만왕이 한후국의 연나라 사람이라면 『사기』에서 굳이 옛 연나라 사람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만왕은 한나라 때의 연 사람이 아니라 전국시대의 연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만왕은 단순한 중국계 망명인이 아니라, 전국시대 연의 조선고지 점령에 의해 연인이 된 토착세력의 후손으로 고조선의 유민일 개연성이 보다 높아진다.(서영수, 1996)
위만은 준왕을 정점으로 이루어진 고조선의 정치체제와 주변 정치세력과의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자 외신(外臣)이 될 것을 약속하면서 요동태수를 통해 한(漢)의 조공외교권으로 편입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곧 자신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는데 한과의 외교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고, 동시에 이 외교루트를 통해 선진 철기문화를 적극 수용하였다. 위만은 이를 기반으로 우수한 무기와 재물을 얻어 국력을 키우고, 더불어 군사적 대외 팽창을 시작하여, 주변의 소읍(小邑)을 침략하여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한에 대한 위협 세력으로까지 성장하였다.
참고문헌
三上次男, 1966,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吉川弘文館.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김정배, 1986,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고려대학교 출판부.
서영수, 1996, 「衛滿朝鮮의 形成過程과 國家的 性格」『韓國古代史硏究』 9.
사회과학원, 1999, 『고조선 력사 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노태돈, 2000,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김한규, 2004, 『요동사』, 문학과 지성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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