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c/main.do?levelId=kc_n101500
위만[衛滿]
망명객에서 왕위 찬탈자로
삼국유사 위만조선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위만(魏滿, 衛滿)은 중국에서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하여 왕위를 찬탈한 인물이다. 위만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조선이라는 국명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그와 그의 후손들이 왕위에 있었던 시기를 위만 조선이라고 별도로 지칭한다.
2 위만의 이름
위만은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위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 사서인 『사기(史記)』인데, 거기에는 단지 ‘조선왕(朝鮮王) 만(滿)’이라고만 칭하고 있다. 후한(後漢)대에 쓰여진 『잠부론(潛夫論)』에서 처음으로 ‘위만(魏滿)’이라는 표기가 보이고, 이후 『위략(魏略)』,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등에서는 ‘위만(衛滿)’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서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위만(魏滿)’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관련사료 따라서 ‘위’가 성이고 ‘만’이 이름인지, 아니면 위만이 이름인지, ‘위’가 성이 맞는다면 ‘위(魏)’인지 ‘위(衛)’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3 위만의 출신에 대한 논란
위만의 출신에 대해서도 시각이 엇갈린다. 『사기』 에서는 위만을 옛 연(燕) 나라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위만은 고조선으로 망명할 당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북상투[魋結/추결]를 틀고 오랑캐 옷[蠻夷服/만이복]을 입었다고 한다. 관련사료 이를 근거로 위만은 순수한 연나라 사람이 아니라 고조선 계통의 인물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견해가 나오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학자들이 위만을 한족(漢族)으로 보고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규정한 것에 따른 반발의 측면도 있다.
하지만 위만이 북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은 채 망명한 것만으로 고조선계라고 보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망명 시 옷차림을 바꾸었다는 것 자체가 그전까지는 그런 머리와 옷차림을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한 망명이라는 정치적 행위와 함께 머리와 복장을 바꾼 것은 망명지인 고조선의 문화와 풍습을 수용하여 호감을 사기 위해 행위였을 수 있다.
같은 시기 남월의 왕이 된 조타(趙陀)의 경우 위만과 비슷하게 외부인으로서 왕이 된 인물이라 좋은 비교 대상이 된다. 기록에 따르면 조타는 명백한 한족(漢族) 출신임에도 북상투[魋結]를 틀었다고 한다. 관련사료 조타의 예를 통해 출신이 한족이라 하더라도 필요에 따라 충분히 이민족의 머리와 복식을 취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위만이 고조선계가 결코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위만은 노관을 따라 흉노로 망명하지 않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연나라가 과거 고조선의 영역을 정복하며 다수의 구성원들을 흡수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자신의 혈연적 친연성에 이끌려 흉노가 아닌 고조선으로 망명했을 개연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이처럼 불확실한 위만의 출신에 대해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4 망명자에서 왕으로
고조선은 이른 시기부터 세력을 떨치며 국경이 맞붙은 연나라와 대립하였고 스스로 왕을 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연나라 장군 진개(秦開)의 공격으로 서쪽 영토 2,000여 리를 빼앗기며 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중국을 통일하며 전국시대를 끝낸 진(秦) 나라는 만리장성을 쌓아 요동에까지 이르렀는데, 당시 고조선의 왕이었던 부왕(否王)은 진나라가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하여 겉으로는 복속하였으나 조회(朝會)에 참석하라는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부왕의 아들 준왕(準王)의 시기에는 진나라가 망하고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간에 천하를 사이에 둔 싸움이 발생하였다. 이때 과거 연나라, 제(齊) 나라, 조(趙) 나라 출신의 수많은 중국인 유이민이 혼란을 피해 고조선으로 넘어오는 일이 발생하였다. 준왕은 이들을 나라 서쪽에 머물게 하였다.
한나라가 건국된 이후에는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정치적인 이유로 흉노로 망명하였는데, 그 아래에 있던 위만 역시 더 이상 한나라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위만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경계였던 패수(浿水)를 건너 망명하면서, 자신을 고조선의 서쪽 경계에 머물게 해 주면 중국으로부터의 유이민들을 모아 나라를 지키는 울타리가 되겠다고 하였다. 준왕은 위만의 말을 믿고 크게 아끼어 박사(博士)라는 지위를 내리고 100리의 땅을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이때 위만이 머물렀던 곳은 과거 연나라가 쳐들어와 고조선으로부터 빼앗았다가 진나라 때 거리가 멀다고 하여 물러난 후 빈 땅이 된 상하장(上下鄣)이라는 곳이었다.
위만은 중국의 망명자들을 모아 점점 세를 키웠다. 그리고 어느 날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나라가 열 갈래로 군대를 나누어 쳐들어오니 급히 왕궁으로 가 왕을 지키겠다고 속인 후, 갑자기 창끝을 돌려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왕은 위만의 군대와 맞서 싸움을 하였으나 도저히 이길 수 없어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을 데리고 바다를 경유해 남쪽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왕위 찬탈을 성공으로 이끈 위만은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5 위만의 외교 정책과 고조선의 번성
위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력을 기반으로 주변 세력들을 복속시켜 나갔다. 왕위 찬탈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기는 하였으나 빠른 속도로 안정화하였다.
한나라에서는 새롭게 고조선의 왕이 된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아 이 일대 종족들에 대한 통할권을 주었다. 위만은 한나라로부터 여러 가지 권리를 보장받는 대신 동이의 종족들이 한나라의 변경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위만의 위세는 더욱 커졌고 한나라와 동이 종족들 간 교역의 중개자 역할까지 수행하며 막대한 재화를 얻을 수 있었다. 고조선의 영향력은 계속 확장되어 진번(眞番)과 임둔(臨屯) 같은 주변 세력들이 모두 복속하였고, 고조선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은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 이러한 영화 때문인지 한나라로부터의 망명자는 지속적으로 늘어, 고조선은 더욱 번성하였다. 관련사료
출신이야 어떠하든 위만이 왕이 되는 데는 중국으로부터의 유이민 집단이 가장 중요한 세력 기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위만이 정복자로 군림한 것은 아니었다. 위만은 왕이 된 이후에도 ‘조선’이라는 국명을 유지하였다. 기존의 고조선 토착 세력들을 효과적으로 포섭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고조선에서는 왕의 통제 하에 ‘상(相)’이라고 불리는 수장들이 이끄는 다수의 자치체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위만은 이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통제 하에 넣었다. 위만이 만들어낸 고조선은 중국으로부터 온 유이민 집단과 토착 집단들이 협력하는 형태의 연합 정치체였다. 토착 정치 세력을 존중한 위만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고조선을 번영으로 이끌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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