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건국신화 다시 읽기(4) : 주몽의 출자는 북부여인가 동부여인가?
고구려사 명장면 150
임기환 2022. 5. 27. 06:03
 
<삼국사기>와 <구삼국사>에 전하고 있는 주몽 건국전승에서 주몽은 동부여(東扶餘) 출신으로 나온다. 해부루가 동쪽 바닷가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를 건국하고 그 뒤를 이은 금와왕이 어느 날 유화를 만나 궁궐에 거두었고 여기서 유화가 햇빛에 감응하여 임신을 하고 주몽을 낳았음은 이미 살펴본 전승 내용이다. 주몽이 동부여 금와왕의 궁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내용의 전승을 동부여(東扶餘) 출자(出自) 전승이라고 하자.
 
그런데 주몽의 출자에 대해 또 다른 전승이 전해진다. 414년에 세운 <광개토왕비문>에 실려 있는 전승이다. 비문에는 추모왕(주몽)이 "북부여에서 출자하였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여랑(河伯女郞)"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장수왕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모두루묘지>에도 "하백(河泊)의 손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인 추모성왕(鄒牟聖王)은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대에 만들어진 금석문 2종에서 모두 주몽이 북부여 출신이라고 했다. 이를 북부여(北扶餘) 출자 전승이라고 하자.
 
또 전회에서 살펴보았던 중국 역사책 <위서>에 실려 있는 주몽신화에는 단지 부여(扶餘)라고 하였다. 이를 부여 출자 전승이라고 하자. 이렇게 되면 주몽의 출자지에 대해서 동부여설, 북부여설, 부여설 3종이 전해지는 셈이다. 어느 게 맞는 것일까? 동부여, 북부여, 부여는 이름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같은 나라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이유론지 전승이 뒤바뀌거나 혼란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럴 때 쓰는 역사학적 방법이 전승의 원형에 가까운 걸 찾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 무엇인지 판단하면 좀 더 쉬워진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당연히 <광개토왕비문>이다. 그리고 <모두루묘지>도 같은 장수왕대이다. 이 두 금석문 모두에서 주몽[추모왕]이 북부여 출신이라고 했다. 즉 장수왕대 고구려 왕실의 공식적인 시조 출자지는 북부여였다.
 
그러면 <위서> 고려전에 보이는 부여 출자 전승은 어디서 유래하였을까? <위서>에 수록된 시조 전승도 장수왕대에 북위(北魏)로 전해진 정보로 구성된 것이다. 아마 고구려에서 전해진 정보는 북부여로 기록되어 있었을 게다. 그런데 북위의 기록자들이나 그 뒤 <위서> 편찬자들이 알고 있는 부여는 하나뿐이었다. 바로 <삼국지> 부여에 기술된 바로 그 부여이다. 그래서 고구려에서 말하는 북부여를 자신들이 알고 있는 부여와 동일하다고 판단하여 그냥 '부여'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위서>의 부여 출자 전승은 당시 고구려의 공식 입장인 북부여 출자 전승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북부여 출자와 동부여 출자 두 전승만 남게 된다. 그중 오래된 전승이 <광개토왕비문>에 기록된 북부여 출자 전승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와 <구삼국사기> 주몽신화에 보이는 동부여 설화는 후대에 덧붙여졌다고 지난 회에서 추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북부여 출자에서 동부여 출자로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바뀌게 된 것인지를 따져보는 게 과제로 남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광개토왕비문>에 북부여, 부여, 동부여가 모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비문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주몽신화 부분을 살펴보자.
 
"옛적에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에서 나왔으며,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중략)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지나가게 되었다."
 
추모왕(주몽)이 북부여 출자임을 밝히면서, 주몽이 남하할 때 지나간 엄리대수가 부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엄리대수가 위치한 부여가 북부여와 같은지, 아니면 이와 다른 부여인지 다소 불분명하다. 같은 전승 안에서 북부여와 부여를 구분하고 있음을 보면 문맥상 서로 다른 부여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남하하는 중간에 부여라는 존재가 있게 되는 셈이다.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이 <삼국사기>의 전승 내용에 비해 워낙 축약되어 있지만, 엄리대수에서 주몽이 권능을 발휘하는 대목은 매우 중요한 모티브로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기> 등에서는 동부여 군사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이 대목이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광개토왕비문>의 부여는 <삼국사기> 전승의 동부여쯤 되는 존재일 수도 있다. 즉 북부여는 주몽의 혈통상의 출자이고, 엄리대수가 있는 부여는 실제 주몽이 머물다 탈출한 부여(혹은 동부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비문>에는 건국 전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동부여가 등장하고 있다. 광개토왕의 정벌 대상으로서 동부여이다.
 
"20년(410년) 경술,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동부여의 왕성)에 이르렀다. (중간 결락) 왕의 은덕이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하자 왕의 은덕를 사모하여 함께 따라온 자는 미구루 압로(鴨盧), 비사마 압로, 타사루 압로, 숙사사 압로, □□□압로였다."
 
동부여 정벌은 광개토왕의 마지막 원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부여는 추모왕[주몽]의 속민이기 때문에 시조의 출자지인 북부여와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비록 고구려가 속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도읍지가 있고 영역을 갖춘 독립된 국가였다. 또한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라고 할 정도로 양국의 관계가 오래되었다고 인식되던 국가였다.
 
추모왕 때부터 속민이라는 표현은 다소 과장되었다고 보더라도, 광개토왕 때 정벌 대상이 되었음은 분명한 만큼 이 동부여의 존재가 궁금하다. 이를 두만강 일대에 북옥저 지역에 있던 존재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부여국은 본래 지금의 중국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3세기 중반까지 번성하였는데, 3세기 말에 선비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을 받아 부여인 다수가 북옥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가 이듬해 길림 지역을 회복해 귀환했다는 중국 사서 기록에 근거한다. 이때 일부 주민이 북옥저 지역에 남아 4세기 무렵에 동부여를 세웠다는 견해이다. 그리고 북부여, 동부여라는 이름은 고구려인들이 자신을 기준으로 북쪽에 있는 길림시 일대 부여를 북부여, 동쪽 두만강 일대에 있는 부여를 동부여로 불렀다고 파악한다.
 
그런데 이 견해에는 취약한 점이 있다. 먼저 두만강 일대 북옥저 지역은 늦어도 태조왕대에는 고구려 영역으로 귀속되었다. 3세기 중반 관구검 침공 때에는 동천왕이 이 북옥저 지역으로 피란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두만강 하류 일대는 이미 고구려 영역이기 때문에 동부여라는 독립된 국가가 있을 공간이 없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고고자료상으로 부여 계통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반증의 논거가 된다.
 
그래서 필자는 두만강 하류보다는 지금의 돈화 지역에 동부여가 있었던 게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물론 고고자료상의 근거는 마찬가지로 없다. 동부여라는 이름으로 볼 때 길림시 일대에 있던 부여의 동쪽이라는 점에서 추정한 것이고, 돈화 일대에서 발해가 건국되었듯이 이곳이 매우 중요한 요충지라는 점도 고려하였다. 어디까지나 막연한 추정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전혀 다른 견해도 나타났다. 즉 지금의 길림일대에 있는 부여가 동부여이고, <논형>에 전하는 부여 동명신화에서 시조 동명의 출자인 북이 탁리국(橐離國)으로서 지금의 송눈평원 일대에 있던 원부여가 북부여라는 견해이다. 북부여, 동부여는 고구려를 기준으로 하는 방위가 아니고 부여인 스스로의 방위 기준이라고 본다.
 
모두루묘지 : 모두루가 영북부여수사(令北夫餘守事)를 지냈다는 문장이 보인다.
 
이렇게 광개토왕의 정벌 대상이 된 동부여의 위치를 비정하는 일도 쉽지 않고 뚜렷한 정설 없이 여러 견해들이 혼재하고 있다. 다만 북부여의 위치를 파악하면 동부여의 위치도 상대적으로 파악될 가능성도 있다.
 
<광개토왕비문>의 전승에 보이는 시조의 출자지로서 북부여도 단지 건국전승상에 등장하는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 북부여는 광개토왕 당대에 고구려 영역을 이루는 존재였다. <모두루묘지>에 시조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기록하면서 묘지의 주인공인 모두루가 광개토왕대에 '영북부여수사(令北夫餘守事)'로 임명되어 북부여를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사(守事)는 이 시기 고구려의 상위 지방관이었다.
 
그런데 광개토왕대 고구려 영역의 북쪽은 아무래도 지금의 길림 일대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역시 길림 일대에 있던 부여를 당시 고구려에서 북부여로 인식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리고 동부여라는 이름처럼 이 부여보다는 동쪽 어딘가에 동부여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물론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동부여가 <삼국사기> 등 역사서에 전하는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와 동일한 국가라는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광개토왕비문>에 동부여를 굳이 추모왕의 속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걸 보면 이 동부여도 주몽의 건국 전승과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가 있었다고 파악된다. 그리고 그것은 해부루 전승이나 대무신왕에 의한 동부여 정벌 전승과 연관되지 않을까 싶다.
 
<삼국사기> 시조 전승 기사에서도 '동부여'라는 나라 이름은 해부루의 천도 기사에서 처음에 한 번만 등장할 뿐이고, 그 뒤에 이어지는 전승에서는 모두 '부여'로 기록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주몽의 동부여 출자 전승은 해부루 설화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주몽이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해부루의 옛 도읍지인 곳에 나라를 세운 해모수의 혈통을 잇는다고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래도 해부루와 해모수 전승이 주몽 전승과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한 과제임을 보여준다.
 
시조 주몽의 출자지인 북부여 출자 전승과 동부여 출자 전승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겠다. <광개토왕비문>과 <모두루묘지>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듯이 5세기 고구려인들은 시조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내려왔다고 전승을 공식 전승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동부여도 어떤 형태로든지 고구려의 건국 전승 속에 들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주몽이 시련을 받고 남하한 그 부여였을 것이다.
 
주몽의 혈통적 출자는 북부여이고, 주몽이 자라고 시련을 겪으면서 남하한 부여는 동부여라는 전승이 고구려가 공식 전승이라고 추정한다. 이런 전승의 변형 과정은 다시 추적해보도록 하겠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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