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건국 신화 다시 읽기 (1)
고구려사 명장면 147
임기환 2022. 4. 14. 15:03
고구려 건국지인 졸본과 흘승골성을 찾아서 중국 요령성 환인시에 남아 있는 오녀산성 등 고구려 유적을 지난 회까지 둘러보았다. 그곳 건국의 현장에 가게 되면 저절로 환기하게 되는 게 고구려 건국전승이다.
오녀산성에 올라 '주몽신화'로 알려져 있는 건국 전승의 한 대목쯤 자세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독자 분도 적지 않으리라 본다. 하지만 그런 분들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주몽 신화 내용 이외에 여러 다른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는 점은 의외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몇 회에 걸쳐 고구려 건국전승을 통상 알려져 있는 내용과는 좀 다른 시선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전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몽이 나라를 세운 뒤에 하늘이 골령에서 성곽과 궁궐을 지어준 이야기처럼 건국전승은 '신화'나 '설화'의 형태를 갖고 있다. 주몽설화만이 아니라 단군신화부터 신라, 백제, 가야의 여러 건국전승도 다 마찬가지다. 나라를 세운 '역사적 사실'이 '신화'와 '설화'가 되는 이유는 건국의 명분과 정통성을 위해 신비스러운 이야기로 포장하려는 고대인의 세계관 때문이다. 건국전승 자체가 나라를 세운 지배층이 내세우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이다.
다시 말해서 의도적으로 신비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신화'적인 내용의 과장과 왜곡, 허구가 더해졌기 때문에 그런 신화의 내용 중에서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에 가깝고, 어느 부분이 '신화적 장치'인지 판단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또한 건국신화 자체가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보면, 반드시 건국되는 시점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오히려 국가 체제가 정비되고 통치가 안정되는 시점에 제대로 형태를 갖춘 건국신화가 만들어질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건국신화의 내용이 후대에 만들어진 허구라는 뜻은 아니다. 건국기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이 전승되어 뒤에 만들어지는 건국신화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건국신화는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흐르면서 정치적 환경의 변화 등 현실적 필요성에 따라 바뀌고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투영되기도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국전승은 건국기 혹은 건국신화가 만들어졌던 때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봐야 한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고구려 건국전승은 여러 계통이 있다. 이른바 주몽신화의 기본 골격은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자료마다 서로 다른 내용도 적지 않다. 이러한 결과가 된 것은 건국신화의 전승 과정에 여러 형태의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전승 자료를 서로 비교 검토하고, 제법 까다로운 눈을 갖고 신중한 태도로 접근할 때 비로소 고구려 건국전승의 본 모습이나 거기에 투영된 관념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먼저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전하는 자료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첫째, 고구려 당대에 고구려인에 의해 작성된 자료로는 '광개토왕비'와 '모두루묘지'에 전해지는 주몽신화가 있다. 둘째 고구려 당시의 기록이지만 중국측에서 전해지고 있는 건국신화로서, '위서' 고구려전을 비롯하여 '주서' '수서' 고려전에 수록되어 있다. 그중 '위서' 고구려전에 전하는 전승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시기상으로 '광개토왕비'의 전승과 비교할 수 있다. 셋째 고려시대 편찬된 문헌 자료에 보이는 건국신화로서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의 전승,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및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건국전승이 있다.

광개토왕비 탁본 (1면 상단 부분) :광개토왕비문은 시조 추모왕의 건국신화로 시작하여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한다. 탁본 사진 –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 연구지식 포탈 한국금석문에서 (필자-trimming) /사진=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2512
이들 자료의 건국 전승을 두루두루 읽어볼 수는 없고, 각 전승을 비교하면서 주요한 주제 몇 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만 가장 오래된 기록이면서 고구려인의 의해 생생하게 기록된 광개토왕비문의 전승은 내용도 간략하니 전체 문장을 인용하겠다. 독자분들도 이번 기회에 찬찬히 읽어보시길 바란다.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5글자 불명)…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하였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머리를 딛고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였다.
고구려 장수왕대에 만들어진 '모두루묘지'에도 주몽신화의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하백의 손자이며 일월의 아들인 추모성왕은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다(河泊之孫 日月之子 鄒牟聖王 元出北夫餘)"라는 간략한 내용이다. 하지만 추모왕이라는 왕호, 추모왕이 북부여 출자라는 점이 광개토왕비문의 내용과 공통되고 있어 5세기에 유통되던 건국신화의 주요 내용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왕비문의 주몽신화는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추모왕의 신성한 계보, 출생, 남하, 건국, 승천 과정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물론 당시에 유통되던 주몽신화의 내용을 모두 기록한 것은 아니고,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최소로 필요한 내용만 기술한 결과로 본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주몽신화의 기본 골격이 무엇인지를 비문이 전하고 있는 셈이 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주몽신화의 구성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위 비문의 기사를 읽어보고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주몽신화의 내용과 비교해서 앞으로 여기서 짚어볼 몇 가지를 간추려 보자. 먼저 추모왕이라는 왕호는 주몽과 동명왕으로 전해지는 자료와는 구분된다. 그리고 천제(天帝)의 아들이라는 비문 기사는 해모수(解慕漱)가 등장하는 주몽신화와는 차이가 있다. 또 추모왕의 출자가 북부여인 점도 검토해야 할 요소이다.
그리고 추모왕이 남하 과정에서 신이한 기적을 일으키는 엄리대수(奄利大水)라는 내용 요소가 건국전승의 구성상 중요한 요소임을 알려준다. 건국지인 홀본에 대해서는 지난 회에서 충분히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건국 후 추모왕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이 홀본 동강에서 용머리를 타고 하늘에 오른다는 내용으로 신화가 마무리된다는 점도 유의된다. 건국과 승천이 바로 이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유류왕은 도로서 나라를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였다"라는 내용은 간략하지만, 추모왕-유류왕-대주류왕으로 이어지는 초기 왕계의 신성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고구려본기의 동명성왕, 유리명왕, 대무신왕이란 왕호에서 성왕(聖王), 명왕(明王), 신왕(神王)으로 이 세 왕을 유독 강조하는 점도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국신화를 풍부하게 이해하는 것은 곧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라 신화로 구성되는 '세계관', 그리고 건국 전승의 변화 과정에 투영된 역사까지 탐색하는 것이다. 신화를 읽는 법은 언제나 사료 비판에서 출발한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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