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 소재지 도시명, 고려 땅이름 "철령"에서 유래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답사기행 <34>
중부일보 2010.10.04  남도일보 2012.08.23 00:00

동남쪽 강변에서 바라본 산성


산성 소재지 도시이름, 고려 땅 철령에서 유래

요동의 철령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옛 지명은 철령이 아니었다. 중국 한나라(漢), 삼국(三國), 서진(西晉), 동진(東晉) 시기 요동군(郡)이나 현토군(郡)에 속했던 이 지역은 후에 대부분 고구려가 차지했다(현재 철령시에서 관할하는 개원<開原> 북부와 창도<昌圖>지역은 한 시기 부여에 예속). 명나라 이전 이곳은 은주(銀州)와 신흥(新興)으로 불리었다. 은주는 요나라 때 불리던 지명이다. 《요사(遼史)》에는 “은주는 본래 발해국 부주(富州)였으나 태조가 은으로 다스리면서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금나라 때 은주를 폐하고 신흥현을 설립하면서 줄곧 신흥으로 불리다가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운 후 26년이 지나 지금의 이름 철령으로 고쳤다.

은주 옛 성은 우연한 역사적 사연으로 철령위(鐵嶺衛: 衛는 명나라 군사조직의 일종으로 그 규모가 지금의 군부대 사단과 유사함)의 이전을 맞게 되어 지명을 철령으로 고친 것이다. 600여 년 전 철령위를 옮긴 사연은 역사적인 수수께끼를 적지 않게 남겼다.

철령이라는 지명은 《명실록(名實錄)》과 《고려사(高麗史)》에서 가장 일찍 나온다. 《고려사》에서 철령은 옛 성(古城)이 아니라 산 이름이라 한다. 이 철령은 옛 고려 경내(지금 한반도 이북)에 위치해 있다. 《고려사(高麗史)》 기록에는 “철령 북쪽에는 역문(歷文), 고(高), 화(和), 정(定), 함(咸) 등 여러 주(州)가 있다”는 단락이 있는데, 이로 추정해 보면 고려국의 함주(咸州) 이남 지역으로는 차례로 정주(定州), 화주(和州), 고주(高州), 문주(文州), 철령(산지), 철령이 최남단에 있다. 《봉천통지(奉天通志)》에 따르면 함주는 바로 고려의 함흥이며, 정주는 곧 오늘의 정평(定平), 화주는 화원(和原: 즉 영흥), 고주는 고원(高原), 문주는 문천(文川)을 말한다. 문천 남쪽은 오늘의 강원도 원산(元山)이고, 원산의 남쪽은 안변(安邊), 즉 《동국여지승람(東국輿地勝覽)》에 나오는 안변도호부(都護府)이며 그 남쪽으로 83리 거리를 둔 곳이 곧 옛 철령(지금도 철령이라 부름)이다. 이 철령은 북위 39도선 약간 남쪽에 기울어져 있으며 동해안과 가깝다. 이곳에서 평양과 서울의 거리는 각각 150㎞ 안팎이다.

원(元)나라는 고려 땅 동북켠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서북켠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여 고려를 관리하였다. 명나라와 원나라의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고려는 명나라의 철령위(衛) 설치 문제가 대두되었다. 명 홍무(洪武) 21년 명 태조 주원장은 명나라와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할 것을 제기했다. 명나라는 철령이 원나라 쌍성총관부에서 관할하였던 것이라서 그 철령 이북의 땅을 제나라 직속령(直屬領)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명실록(名實錄)》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임신(壬申), (태조 주원장은) 호부(戶部)에게 명해 고려국왕에게 자문을 구한다… 철령 이남은 원래 고려에 속했고, 백성들은 본국의 관할에 적응되었으므로 국경선을 바로 하여 서로 제 땅을 잘 지키되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다시피 명나라는 고려의 땅 철령을 원나라와의 국경선으로 알고 명나라와의 국경선을 원래대로 유지하자고 주장한다. 주원장은 또 유현(劉顯)을 지휘감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고려 철령 지역에 가서 철령위를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역사기록으로 보아 당시 고려는 철령 땅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거기에서 철령위를 설치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하여 나왔고, 고려와 원나라 때의 국경선을 따라 철령위를 설치하자는 명나라의 태도도 명확하였다. 그러나 후에 명나라는 고려인들이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계속 반발해 나서고, 또 철령이 사실상 고려의 복지(腹地)에 있어 거기에 철령위를 설치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하여 양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5년 후 홍무 26년(조선왕조가 이미 고려왕조를 교체)에 명나라는 유명무실한 ‘철령위’를 요동지역에다 옮기기로 했다. 명나라는 사전에 이전시킬 지점을 확정하지 못했으므로 먼저 철령위를 심양 동남쪽 45리 떨어진 봉집현(奉集縣)에 임시 안치했다가 후에 은주성, 즉 지금의 철령시로 옮겨갔다. 철령위가 이렇게 이전된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자고 할 때부터 그 후에 은주로 이전하여 공식 설치할 때까지 5년 동안 명나라 철령위의 군대는 압록강 일대에서 체류만 했지 본격적으로 직책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 가지는 명나라 조정에서 처음에는 철령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에서는 고려의 철령이 압록강 우안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태도가 처음엔 강경했던 것이다.

《조선세종실록(朝鮮世宗實錄)》에 따르면 명나라는 철령위를 설치하는 그해에 이미 철령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철령위를 요동 은주지역으로 이전시키게 된 데 대해서는 어느 사서(史書)에도 기록이 없다. 그러나 고증에 따라 추정해 볼 때 명나라는 현재 철령시에서 관할하는 개원지역을 그 당시 자국의 북부 국경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개원지역과 이웃하고 있는 은주에 철령위를 설치함으로써 국경지역의 군사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당시 철령위 지휘검사를 맡았던 유현(劉顯)이 은주와 그 주변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요하가 흘러 지나는 요동 북부의 철령은 현재 요령성 14개 대도시 중 하나로 은주(銀州). 청하(淸河) 2개 구(區)와 경제개발구, 개원(開原), 조병산(調兵山) 2개 현급 시(市), 그리고 철령·서풍(西豊)·창도(昌圖) 3개 현을 관할한다. 총 면적은 1.3만k㎡, 총 인구는 310만명이다. 이 지역에는 자원이 아주 풍부하다. 알루미늄 아연 금 은 동 등 금속 지하자원이 있는가 하면 석탄, 석회석, 대리석, 진주암, 화강암, 마노(瑪瑙), 마그네사이트 등 비금속 광물도 많이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매장 광물만 36가지이며, 현재 개발해 이용하고 있는 23가지 중 매장량이 제일 많은 것이 석탄이다. 주로 조병산시 경내에 광맥이 분포되어 있어 거기에 건설한 철법(鐵法)탄광은 규모가 어마어마한 석탄공업기업으로서 중국 전 지역 8대 석탄생산기지 중 하나다. 석탄생산기지가 형성됨에 따라 정부차원에서는 철령·청하 2개의 화력발전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철령시가 요령성의 중요한 에너지생산기지로 부상되었다. 이 때문에 철령은 석탄과 전력을 위주로 하는 에너지공업과 농산품 심가공 이 두 가지 공업을 주요 구도로 하는 공업체계가 형성되었다.
 
철령은 이름난 ‘요령북부의 양식창고’로 중국의 중요한 상품곡식생산기지다. 해마다 해외로 수출하는 옥수수는 요령성 총량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이곳에는 유명한 토산물도 많다. 철령의 대파·아가위, 개원의 마늘·개암(榛子), 창도의 거위(鵝), 서풍의 인삼·녹용 등이 그러한 것이다. 특별한 것은 서풍의 녹용이다. 서풍은 개원시와 철령현의 동부 산간지역과 함께 백두대간의 한 산줄기가 뻗어 내린 지역이다. 거기에는 첩첩산중에 우거진 나무들이 끝없는 임해(林海)를 이루고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노루와 사슴, 그리고 산짐승들이 많아 청나라 황제들의 수렵장으로 별도로 지정하고 몇 백 년 동안 봉금(封禁)해 왔다. 그 당시 어명(御命)에 따라 이곳에 꽃사슴을 많이 길렀는데 이러한 사연과 여건으로 100여 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지금까지 이곳에 인공으로 사슴을 많이 기르고 있다. 그리하여 이곳은 ‘꽃사슴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중국에서 제일 큰 꽃사슴산품 집산지로 되었다. 이곳의 녹용은 해마다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와 유럽으로 수출하여 국제시장에서도 명성이 높다.

철령은 천혜의 관광자원이 많다. 관광지로서 용수산(龍首山), 모봉산(帽峰山), 상아산(象牙山), 빙립산(氷砬山), 시하(柴河)와 청하(淸河)저수지 등 자연풍경구가 있고 상태사(常泰寺), 향양사(向陽寺), 명월선사(明月禪寺), 보암관(普庵觀), 동북제1와불(臥佛) 등 사찰들도 있다. 이밖에 서풍의 성자산산성, 개원의 용담산산성 등 고구려 옛 성들도 여러 개 있어 관광객을 끈다.

철령에는 지나간 시대 수많은 역사인물들이 모여 이 고장의 특이한 역사와 인문경관을 이루었다. 나라를 잃고 금나라에 붙잡혀 온 북송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이곳에서 한동안 유배당했는가 하면, 세계문학유산으로 유명한 고전소설 《홍루몽(紅樓夢)》의 저자 조설근(曹雪芹)의 산해관 동쪽의 본적지와 조설근에 이어 《홍루몽(紅樓夢)》 저서를 마무리한 고악(高鄂)의 고향도 이곳이란다.

말할 만한 것은 조선인의 후예 이성량(李成梁: 1526~1615년, 자는 여계<汝契>)과 그의 아들 이여송(李茹松)이다. 명나라의 명장인 이성량은 30년 간 요동수비를 총괄하는 요동총병(遼東總兵)을 두 번 지내며 막강한 군사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명사(明史)》 기록에 따르면 이성량의 고조 이영(李英·성주이씨)은 조선에서 명나라로 건너와 큰 벼슬을 하였고 증조부, 조부, 부친, 숙부들도 명나라의 무장(武將)이었다. 《이씨보계(李氏譜系)·세차원시(世次原始)에 “이씨 원적은 조선인이다. 명 초에 강을 건너 철령으로 왔다…”고 밝혀져 있다. 이성량의 작은 동생 이성재는 청하부총병, 둘째 아들 이여백은 귀주. 녕하. 요동부총병, 셋째 아들 이여정은 요동총병관도독, 넷째 아들 이여장은 광서연수총병관, 다섯째 아들 이여매는 요동부총병관 등 벼슬을 하였다. 이성량은 요동을 지키는 동안 전공을 많이 세워 황제의 총애를 받아 태전(太傳) 겸 태자태보(太子太保) 녕원백(寧遠伯) 등 벼슬을 제수 받았다. 청나라의 개국시조인 누르하치도 일찌기 그의 수하에서 임직한 바 있다. 이성량은 만력 43년(서기 1615년)에 별세하였다. 그의 묘지는 현재 철령 최진보향 신분촌(新墳村)에 있다. 묘 앞에는 돌비석, 돌사람, 돌말 등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땅 속에 묻혀버렸다. 1993년 철령시 관계부문에서는 도시건설공사 중 이성량의 원래 저택이었던 ‘간화루(看花樓)’ 유적을 발견하고 거기서 출토된 벽돌, 기와, 석재 등 유물을 보존해 두었다. 2004년 이성량기념관이 철령에서 개관되고 최근 들어 관계부문에서 전문 기금을 내어 반룡산(盤龍山)에 이성량의 간화루를 중수하기 시작했다.

이성량의 장자 이여송(1549~1598년)의 자는 자무(子茂)이고 호는 앙성(仰城)이며 역시 명나라 명장이다. 만력(萬歷) 중기 조선에 가서 임진왜란을 평정한 바 있다. 그때 이여송은 자신의 혈족이 조선에서 벼슬을 지니던 일을 여러 번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그는 귀국하여 요동총병에 임직했다가 후에 몽골부족과의 전쟁에서 전사한다. 이여송의 묘지는 현재 철령 최진보향 소둔촌(小屯村)에 있다. 묘 앞에는 아직 부분 돌사람, 돌말, 돌양 등이 남아 있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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