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721360 
          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38055

20세기 초 대규모 개척으로 사라진 요택, 관광지로 탈바꿈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58>
요동의 천연수호자 요택 ④
데스크승인 2011.03.28


상전벽해(桑田碧海)…애물단지 늪지대서 관광지로 탈바꿈
‘반금쌍대자하구’ 세계에서 가장 큰 갈대소택습지 
웅장하고 독특한 절경에 관광객·문인 발길 이어져 
북방·요녕성 상품곡물생산기지·입쌀수출기지로 유명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있다.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듯 크게 변하였다는 뜻이다. 요택도 이런 변화를 하게 되었다.

전국(戰國)시기 연(燕)나라가 동북(만주)을 개통하고 요동, 요서, 우북평(右北平) 3군(郡)을 설립했다. 요동군 아래 18개 현이 있고 요서군 아래 14개 현이 있었는데 모두 요택소택지 밖으로 분포되었다. 서한(西漢)은 이 소택지 동부와 동남부 인근지역에 요동군 소속인 요양현(역사상 최초의 遼陽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요중<遼中>현 자유타진<茨楡타鎭>), 험독현(險瀆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대안현 동남쪽 손성자<孫城子>마을), 요대현<遼隊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해성 서북쪽의 고타자진<高타子鎭>) 3개 현을 설치하였고 서부 인근지역에는 무려현(無慮縣, 즉 최초의 북진현<北鎭縣>, 위치는 현재 북진 동남쪽의 요돈향 대양갑촌<廖屯鄕大亮甲村>)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요택소택지 북부에다 망평현(望平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신민 전당포진 대고성자촌<前當鋪鎭大古城子村>), 남부에다 방현(房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반금시 대와현 소염탄 부근<盤錦市大窪縣小鹽灘附近>)을 설치하였다. 이 현들은 삼국(三國)시기 전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삼국시기 요택 동남부의 험독현과 방현이 폐기된 후 청나라 말기 대안현을 설립할 때까지 1600여 년 동안 요택지역에는 아무런 현과 주(州)도 없었다. 후연시기에 폐기된 요택 북쪽의 망평현 지역도 200여년이 지나서야 수나라가 비로소 현재 신민 고대자(高臺子)에다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줄곧 사람들에게 포기된 요택은 그냥 황량한 지대였다.

요나라, 금나라시기에 이르러 요하평원지역의 현과 진 및 인구가 증가됨에 따라 요택에도 인가가 조금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때 요·금 두 나라와 송나라 사이에 사신(使臣)들의 왕래가 잦았는데 대부분 요택 중간지대를 꿰뚫고 다녔다. 명나라 때, 요택의 소택지를 남쪽으로 돌아가는 길, 즉 남로를 주로 이용했다. 요양에서 요서지역에 이르는 이 길은 도중에 안산(鞍山), 해주(海州, 즉 해성), 우장(牛莊), 사령(沙嶺), 고평(高平), 반산(盤山), 판교(板橋), 십삼산(十三山) 등 역참(驛站)을 설치하였다.

청나라 때에는 계속하여 요택의 그 남로를 이용하는 동시에 요택 북부의 길이가 120리 되는 ‘첩도(疊道)’와 이어진 새로운 ‘북로’를 개척하고 도중에 역참을 설치하였다. 이 길이 그때부터 북경과 심양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간선으로 되었다. 청나라 시기 정부차원의 ‘사람을 모집하여 주둔시켜 개간하는 정책’의 실행과 산해관 서쪽의 사람들이 산해관 동쪽으로 몰려가서 살길을 찾는 민간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요택지역에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진과 마을이 급속히 불어났다. 요하 동쪽의 요택지역은 봉천부 소속 요양주와 해성현에서, 요하서쪽의 요택지역은 금주부(錦州府)에서 관할했다. 그중 현재 북진지역에 광녕(廣寧)현을 설치하고, 흑산지역에는 청나라 초기 팔기병(八旗兵)이 주둔하는 성을 쌓아놓고 진안(鎭安)현으로 개칭하였다. 요택의 남부, 즉 현재 반금지역에는 청나라 초기부터 관아의 말을 기루는 방목장을 설치하였다. 청나라 동치(同治) 2년(기원 1863년)에 이르러 요택지역에서 처음으로 창호(漲湖, 현재 흑산현 사가자 향<四家子鄕> 남쪽)에서 호취자(湖嘴子)까지의 토지를 측량하여 민간에 농사짓도록 풀어주고 아울러 이런 사업을 총괄 추진하는 관아를 반사역(盤蛇驛)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요택 북쪽 현재 신민지역에다 선후로 거류하순검(巨流河巡檢), 신민청(新民廳), 신민부(新民府)를 설치하였다. 건륭(乾隆) 이후부터 도광(道光) 연대에 이르는 동안 신민 남쪽 유하(柳河) 하류지역의 유하구(柳河溝) 등 지세가 낮은 곳에다 배수도랑을 파고 길과 제방을 수축하여 시골마을 사이의 길이 많이 생겨났다. 이렇게 청나라 중기에 이르러 요택지역의 자연환경이 좀 다스려지기는 했지만 그 기본 상태는 별로 큰 변화가 없었다.

청나라 말기 하요하평원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하요하 양안에 주와 현이 불어난 데다 청나라 광서(光緖) 32년(기원 1906년)에 이르러 요택과 인근 지역에 반산청(치소는 처음에 반사역에 설치했다가 2년 후에 쌍대자<雙臺子>로 옮김)과 요중현을 설치하고 1913년에는 대안현을 증설하였다. 이리하여 요택 전 지역에 마을과 진이 더 많이 생겨나고 인구도 많이 불어났다. 사람들은 제방과 배수도랑 등 수리시설을 수축하고 황무지를 일구며 소택지의 물을 빼고 땅을 말리어 농사를 광범위하게 짓게 되었다. 이렇게 반세기가 넘는 대규모의 개척과 개발로 말미암아 그렇게 넓고 크던 요택이 차츰 사라져 버렸다. 

요택지역의 개척사업과 경제발전에 따라 교통상황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1922년에 현도(縣道), 향도(鄕道), 리도(里道) 3급(三級) 도로망 건설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이때 요택 한복판의 대안에서 기타 현으로 통하는 길의 너비가 10m에 달했고, 1924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심양~요중 간 버스가 통행했다. 일제시기 질이 저열하지만 양(量)적으로 적지 않은 도로와 다리들을 건설하여 요택지역에 교통노선이 많이 증가되어 요하 서쪽의 대안, 요중, 대호산(大虎山), 북진, 구방자(溝幇子), 반산 사이에 도로망이 초보적으로 구축되었다. 하지만 1949년 10월 이전까지 일부 사석(砂石) 바닥의 길을 제외한 대부분 도로는 장마철에 질어 차가 통행하지 못하였으며 지대가 낮은 구간은 겨울날 결빙기에만 차가 다녔다. 해방(1949년 10월 1일) 후 나라에서는 경제건설과 함께 교통건설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여 철도와 도로망이 요하평원을 덮어버렸다. 이리하여 오랜 시기 차량 통행이 어려웠던 요택의 교통이 크게 변모하였다. 최근 10여 년 들어 요령성에서 고속도로 건설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여 요택지역과 그 주변 도시 사이에도 고속도로가 통했다. 그리하여 심양, 대련 등 대도시에서 고속도로로 요택지역에 가려면 2~3시간이면 충분하다. 정말로 상전벽해가 이루어졌다.


요택의 현재 지모를 알아보려고 필자는 승용차로 하료하평원을 가로 세로 지르며 가보기도 하고, 요택의 원래 남·북로와 이어진 주변도로를 따라 요택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하였다. 반산, 대안, 요중, 북진과 흑산의 동부, 해성의 서남부, 심민의 남부, 심양과 요양의 도시 서부지역에 분포되었던 요택의 소택지 모습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대신 넓고 평탄한 평야에 기름진 논과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 이 지역은 모두 국가의 유명한 농업생산기지로서 ‘요령의 곡창’과 ‘물고기와 입쌀의 고장’으로 거듭났다. 학자들의 소개에 의하면 옛날 요택의 소택지는 아직까지 좀 남아 있다고 한다. 그곳은 주로 현재 대안경내의 서평(西平)산림공원, 대맥과(大麥科) 습지, 면적의 총화가 1만무(666ha)가 넘는 크고 작은 못과 물웅덩이, 그리고 해성 서남쪽의 삼차하습지, 흑산의 요양하습지, 반금(盤錦) 습지의 일부 구역이다. 그중에 필자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지금도 옛날 요택과 비슷하다고 하는 규모가 대단히 큰 소택지를 가지고 있는 반금이다.

요하강은 자신의 유별난 자태로 기세 드높게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뿌리치고 나와 기복을 이루며 자유분방하게 수많은 개울과 하천들의 물을 모아 바다의 품속으로 달려간다. 요하가 바다로 흘러드는 곳에 커다란 기름진 평원을 충적해 놓았다. 대자연은 은혜롭게 이 신비로운 지방을 현지 사람들에게 선사하였다. 1984년에 국무원의 비준(批准)을 거쳐 이곳에다 반금시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의 판도(版圖) 위에 하나의 신흥 생태도시가 생겨났다. 면적이 4천71k㎡ 되는 땅 위에 한족, 만족, 회족, 조선족 등 28개 민족의 126만 인구가 화목하게 사는 반금은, 그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금자리로 변했다. 반금의 공업은 석유생산으로 유명한데 전국에서 크기가 세 번째로 꼽히는 요하유전(油田) 본부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반금의 농업은 벼 생산으로 유명하여 이곳이 북방과 요령성의 상품곡물생산기지와 입쌀수출기지로 되었다. 물산이 풍부하고 경제발전이 빠른 반금은 1990년대부터 전국의 ‘풍요롭게 사는 도시’ 대열에 들어섰다. 반금은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온다. 왜냐면 이곳은 요하가 바다로 흘러드는 순박함과 웅장하고 힘찬 기세가 있고, 근 100만 무가 되는 아득한 갈대밭의 예스럽고 소박함과 힘차게 솟구치는 정서가 약동하고 있으며, 두루미가 가져다주는 보람과 상서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요하입해구 드넓은 간석지에 세상에서 보기 드문 기이한 풍경지대가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붉은 갯벌을 의미하는 홍해탄(紅海灘)이라 부른다. 붉은 색상에 보라색이 스며있는 함봉초(함蓬草, 한국에서는 퉁퉁마디 혹은 나문재라 부른다고 한다)들이 붉은 노을처럼 아름답고 눈부시게 바다와 하늘까지 쭉 이어져있는데 마치 백리나 뻗어나간 갯벌에 깔아놓은 거대한 융단 같다. 그리고 거기에 군데군데 자라고 있는 식물들이 청록색으로 단장해 그 정경이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이곳은 원래 조수가 밀려 나갔다 들어오는 지대다. 바다물이 점차 갯벌에서 물러나갈 때 생명력이 극히 강한 함봉초는 여기에서 뿌리를 내려 자라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밀물과 썰물의 반복적인 이동에 따라 함봉초가 차차로 번져 이런 홍해탄이 형성되었다. 함봉초는 매년 4월에 연한 붉은 색을 띠다가 점점 짙은 홍색으로 변하여 10월이 되면 또 자홍색으로 바뀐다. 밀물이 몰려올 때, 이 천연적으로 아름다운 불꽃들은 넘쳐흐르며 색채가 현란한 생명을 넘실거리게 한다. 만약 이 시각에 당신이 그곳에 있다면 마치 자신도 자연으로 되돌아와 그것들과 서로 융합되어 그 붉은 채색노을의 한 오리의 아름다운 빛깔로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몇 해 전부터 홍해탄에다 목조 부두와 구곡낭교(九曲廊橋), 두루미 등 물새들의 낙원 수금원(水禽園), 월아만습지공원(月牙灣濕地公園) 등 관광구역을 설치해 놓았다.

홍해탄은 살아있다. 그는 언제나 파도의 종적을 뒤쫓아 간다. 이 간석지는 요하강이 휩쓸고 온 진흙과 모래로 말미암아 해마다 50m의 속도로 바다로 뻗어나간다. 그러므로 홍해탄도 따라서 해마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반금의 서부지역에 면적이 근 100만 무(6만6천666ha)가 되는 일망무제한 갈대바다가 있다. 그는 하나의 커다란 아름다운 주옥처럼 요동만의 북안에 박혀 있다. 그의 웅장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신비로움은 수많은 관광객과 문인들을 흡인하여 그들의 끊어지지 않는 격정을 자아낸다. 갈대바다의 사계절은 시나 그림처럼 아름다운 꿈과 환상의 경지다. 3월의 봄바람이 겨울에 쌓여있던 눈을 녹이고 겨울잠을 자던 생명들이 천천히 깨어날 때 뾰족뾰족한 갈대 싹들은 얼었던 땅을 떠밀고 올라와 제 풍채를 드러내기 시작하며 일제히 하늘로 내뻗는데 그 양상이 ‘봄바람 불어오니 또다시 자라나는’ 기세를 이룬다. 여름철에는 훈풍이 갈대바다를 푸른색으로 물들여 온 천지가 푸른 세계로 변한다. 광풍폭우가 몰아치면 끝이 보이지 않는 갈대밭은 거세찬 ‘푸른 파도’가 출렁이다가 비가 그친 후에는 잠잠하고 고요해져 숨을 죽이고 듣노라면 갈대줄기의 마다지기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생명은 푸른 갈대바다에서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가을의 갈대들은 색깔이 현란하고 다채롭다. 쪽빛 하늘아래 청록색, 담황색, 자홍색을 심어 펼치는데 가을바람이 스쳐 지나가면 잔잔한 물결이 일게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도취되게 한다. 초겨울은 수확의 계절이다. 사람들은 낫을 휘두르며 갈대를 거두어들인다. 눈꽃이 흩날리면 갈대밭은 은빛세계로 변한다. 갈대의 그루터기는 눈 밑에서 추위를 버텨내고 계속 생존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천천히 모으고 있다. 새로운 생명이 형성되고 있다. 봄날이 여기서 조용하게 시작되고 있다. 현지에서는 이미 이곳에다 ‘털게의 갈밭갯벌’, ‘조류의 낙원’, ‘태평하풍광벨트’를 꾸며놓아 관광객들이 여기에 와서 구경하고 즐길 수도 있다. 

홍해탄과 만무 갈대밭을 품고 있는 반금쌍대자하구(雙臺子河口) 국가급 자연보호 구역은 세계에서 보존이 가장 잘된 제일 큰 갈대소택습지로서, 면적이 120만 무(8만ha)다. 발해대학 부교수 초충순(肖忠純)이 본인의 저서 <요령역사지리 (遼寧歷史地理)>에서 서술한 견해에 의하면 이 습지의 대부분은 수나라와 당나라 땐 없었는데 그 후에 요하의 충적역할 등 원인으로 발해만 머리끝의 해안선이 안쪽(바다쪽)으로 물려들면서 생겨났다. 현재 이곳에는 321가지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와중 두루미, 백조, 흑취구(黑嘴鷗) 등 조류만 236가지다. 이곳은 인위적 영향을 끼치지 않은 대자연이다. 여기에 토지가 습윤하고 공기가 싱그러우며 봄이 오면 온갖 새들이 갯벌, 갈대밭과 늪가에서 신나게 떠들어대며 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조류의 천국이다.

반금의 풍부하고도 순수한 자연생태자원은 국내외의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요택
<55> 동진 수.당 저지..고구려 서북부 지켜낸 천험의 요지 - 중부일보  http://tadream.tistory.com/4372  
<56> 패주한 당태종 "요택 늪지대에서 내 명 다하나보다" 탄식 - 중부일보  http://tadream.tistory.com/673
<57> 수·당 10차례 침공에 고구려군 요택에서 요격 섬멸 - 중부일보  http://tadream.tistory.com/674 
<58> 20세기 초 대규모 개척으로 사라진 요택, 관광지로 탈바꿈 - 중부일보  http://tadream.tistory.com/4373  
<59>당태종 요택 도하 - 국방일보  http://tadream.tistory.com/4384 
<60>요동성 전투의 서전 - 국방일보  http://tadream.tistory.com/4395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