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722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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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산세 이용, 등성이 따라 쌓은 타원 모양 산성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完>
북부전략요지 성자산산성
데스크승인 2011.04.04

남북 900m·동서 1천400m· 둘레 4천400m 규모
장백산맥 여맥 성자산, 산봉우리 30여개로 구성 
산성안 철기유물 발굴…산성밖 馬道·토성 유적도 

성자산산성 서문(정문)터의 모습  

서풍현(西豊縣, 철령시 관할) 양천진(凉泉鎭) 남쪽으로 7.5km 되는 지점에 장백산 여맥(余脈) 횡천산계(橫川山系)에 속하는 성자산(城子山)이 있다. 금년 1월과 2003년 봄철에 필자는 이 산에 남아있는 고구려 옛 성 성자산산성을 다녀왔다.

개원시(開原市)에서 동쪽으로 약 80km를 달리면 양천진에 이르고, 거기서 남쪽으로 약 5km를 더 나아가면 성자산에 이른다. 양천진을 벗어나 성자산으로 가는 길 입구에는 성자산풍경구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이번 답사는 한겨울인지라 양천진에서 성자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이 길은 새로 닦은 듯 반듯했고, 길 양편으로는 심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버드나무가 열을 지어 서 있었다. 2003년 봄 필자가 처음 갔을 때는 여기에 개울 옆으로 우마차나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의 험한 돌밭길이 나 있었는데 그 후에 성자산을 풍경구로 개발하면서 길을 새로 낸 모양이다. 이 길을 따라 몇 km 나아가면 보안촌(保安村, 양천진에 속함)이라는 마을이 나타나고 그 옆에 양천진에서 운영하는 사슴농장이 하나 보인다. 이곳에서 조금 더 나아가 왼편으로 꺾어 들면 바로 성자산 골짜기 어귀인데 ‘성자산산성’이라고 새긴 표지석이 그 옆에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성급문화재보호단위, 요령성인민위원회 1963년 9월 30일 공포, 철령시 인민정부 세움’이라고 적혀 있다.

산성표지석이 세워진 곳에서 동쪽으로 100m쯤 들어가면 두 산비탈이 만나는 후미진 곳에 성문터가 보인다. 필자가 처음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 성문터 오른편 성벽은 오래 전에 허물어진 듯 보이지 않았고, 왼편 성벽 한 토막만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그 높이는 4~5m, 두께는 약 2.5m가량 되어 보였다. 그때 이 성문터 오른편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면 성벽의 흔적만 보였는데 이번에 가보니 거기에다 길이가 100m 되고 높이가 1m 남짓한 석축 성벽을 복구해 놓았다. 성문터 바깥쪽 오른편에 방금 산골짜기 어귀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산성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세워놓은 시간이 비교적 오래되어 보였다.

이 성문에서 왼편 산턱으로 끊어지다 이어지다 하면서 또 두어 곳의 성벽 터가 보였다. 성벽은 모두 다듬은 돌로 쌓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석축 벽이었다. 이 성벽 터를 따라 바깥쪽으로 삐죽 나온 부분의 끄트머리에 각대(角臺, 치) 같은 축조물 흔적이 보인다. 성벽들은 여느 고구려산성들과 다르지 않게 가파른 자연 산세를 이용하여 등성이를 따라 쌓은 것으로 바깥쪽은 가파른 비탈이 이어진다.

산성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동서방향으로 나있는 개울가로 드문드문 역시 성 문터같이 쌓은 석축물을 볼 수 있다. 이는 방어용이라기보다 이곳을 흘러내리는 성 안의 물길을 조절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였다. 이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몇몇 곳의 집터가 나타난다. 집터는 보편적으로 길이는 약 5m고 너비는 약 3m로 그리 크지 않았으나 모두 자연석으로 쌓아졌고, 기단 부분에는 제법 큰 가공석들이 깔려 있었다. 성문터 앞에서 본 표지석과 똑같은 비석이 세워져 있는 이곳에서는 고구려시대의 전형적인 붉은색 줄무늬(繩紋)기와조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집터에서 한참 더 오르면 펑퍼짐한 둔덕 같은 곳이 나타난다. 이곳 역시 옛날에는 중요한 건물터인 듯 돌무더기들이 보였고, 일부 석축 계단이 보인다. 현지 사람들은 이곳을 장대터라고 했다. 여기에 수령이 1000년가량 됨직한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직경이 1.5m가량 되어 보이는 이 고목은 어른 셋이 서로 손을 맞잡아야 겨우 안을 수 있다. 이 산성의 지나온 역사를 지켜본 이 고목은 노인처럼 기나긴 세월의 풍상을 깊게 파인 주름 속에 묻어둔 채 말없이 거기에 서 있다.

필자는 산성을 둘러보았다. 대체적으로 불규칙적인 타원형 모양의 산성이다. 남북으로 폭이 상대적으로 좁고, 동서로 약간 길게 뻗쳐 있었다. 장백산맥의 여맥인 성자산은 크고 작은 산봉우리 30여 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동쪽 산봉우리가 해발 868.7m로 가장 높다. 거기서 남·북 양쪽으로 내뻗은 산등성이가 안쪽으로 점점 휘어지면서 작은 봉우리들을 이어 내호형(內弧形)의 옹성을 이루며 우리가 방금 들어왔던 서문과 만나고 있었다. 산성의 규모는 제법 크다. 남북의 너비는 900m, 동서 길이는 1천400m며 성벽 둘레의 길이는 약 4천400m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성벽의 제일 높은 곳은 5m나 된다. 산성에는 동문과 서문 두 개의 성문이 있는데 그중 우리가 방금 들어온 서문은 산성의 정문이면서 산물이 빠져나가는 유일한 배수로이며 성안에서 뻗어 나온 계곡 입구이기도 했다. 고목이 서있는 곳에서 안쪽으로 경사를 이루며 등성이 하나가 뻗어있었고, 그 등성이를 따라 오르다 보면 커다란 구덩이 예닐곱 개가 죽 이어져 있다. 이는 아마도 무덤이었던 것을 후에 누군가가 파헤친 것으로 보였다.

성자산산성 평면도 

전설에 따르면 고구려인들이 이곳을 철수할 때 많은 금은보화를 미처 가져가지 못하고 산속에 묻어두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980년대 한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금속탐지기 같은 것을 갖고 여기에 들어와 금은보화를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산속에 수많은 구덩이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때 누가 어떤 보물을 얼마나 캐갔는지는 누구도 알 길이 없다.

산성 안에는 성벽을 따라 40여 개의 크고 작은 구덩이들이 산재해 있다. 이런 구덩이들은 큰 것이 지름 10m에 깊이 2m이며 그 중 가장 작은 것은 지름 2m에 깊이 0.4m이다. 구덩이들은 거의가 성벽이 넓고 산세가 높으며 평평한 곳에 있다. 그 중 일부 구덩이에서는 붉은줄무늬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이런 구덩이들은 반지하식 건물터로 산성을 수비하는 병사들의 숙영지로 사용했던 곳이다.

성안의 주요한 건축터는 세 곳이 있다. 성안 서북부에 있는 건축터는 남북방향으로 난 3개의 등성이 위에 위치해 있는데 동서 길이가 70m고 남북 너비는 20m다. 그 동쪽에 남북 길이가 약 18m 되고 동서 너비가 약 15m 되는 토축대(土築臺)가 있고 그 양쪽 측면에는 인공으로 수축한 호형(弧形) 석축 기단이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다. 이 토축대에 올라서면 산성의 서문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이 구역에 붉은줄무늬기와조각들이 다수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 산성 안의 주요한 건축물들이 자리하던 곳으로 짐작된다. 이곳 북쪽에 담장을 둘러쌓은 듯한 유적지가 있는데 뜰로 들어가는 석축계단이 아직 남아있고 뜰 안에 집터 두 개가 나란히 있다. 그 중 동쪽의 것은 동서 길이가 8m고 남북 너비가 6m며 서쪽의 것은 조금 작다. 그 남아있는 기초의 흔적으로 보아 사찰과 같은 건물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뜰에서 북쪽으로 약 80m 사이를 둔 지세가 약 50m쯤 더 높은 곳에도 건물터가 있다. 거기에 남북 길이가 약 10m고, 동서 너비가 약 8m며, 높이가 약 2m 되는 석축대가 남아있다. 이 석축대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올려 쌓았다. 이곳의 유물과 흔적으로 보아 옛날 장대와 같은 중요한 건축시설이었던 듯하다.

산성 안에는 여러 곳의 건물터 외에도 사시장철 마르지 않는 샘물터와 직경이 약 25m 되는 저수지가 있다. 샘물터는 산성 안 약간 남쪽에 있다. 현지 사람들이 ‘황주관(黃酒館)’이라고 부르는 이 샘물은 담황색이며 사계절 마르는 법이 없어 산성 안의 주요 식수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외에 서문 가까이에는 개울물을 돌로 쌓아 막은 저수지가 있어 역시 산성 안의 또 다른 주요한 수원이었던 것이다. 황주관을 두고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에 바로 이 산골짝에 탁생(卓生)이라는 사내가 단옥(段玉)이라는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탁생은 총명하고 부지런하였으며 칼과 활을 잘 다루어 사냥하러 갈 때마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고, 아내 단옥 또한 슬기롭고 재주가 좋아 황무지를 일구어 농사를 짓는 한편 친정에서 배운 솜씨로 술을 빚었다. 그녀가 직접 농사지은 옥수수와 기장을 원료로 하여 산중의 샘물로 빚은 술은 노르스름한 색이 났기 때문에 당지 사람들은 이 술을 황주라 하였고, 그들이 술을 빚으며 살고 있는 곳을 황주관이라고 했다. 황주는 맛도 부드럽고 좋지만 온역을 치료하고 어한을 할 수 있었기에 인근 지역에 이름나 술도가가 날로 흥성해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며칠 동안 잇따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밤새 빚어놓은 술은 아침이 되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이상하게 여긴 탁생은 이 비밀을 캐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화살 10여 개를 날카롭게 갈아놓고 활을 가다듬은 뒤 저녁 무렵 술도가 뒤 늙은 고목에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밤이 되자 하늘에 구름이 끼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밤이 이슥해졌다. 내리던 비가 멎었는데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동쪽 산비탈에서 푸른 불빛 두 개가 이쪽으로 움직이며 점점 가까워졌다. 탁생이 보니 왕방울만한 그 푸른 불빛은 무슨 동물의 눈인 듯했고 높이가 약 1m는 되어 보였다. 그 놈은 주저 없이 술도가에 들어가 독 뚜껑을 열고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탁생은 활을 쏠까 하다가 좀 있다가 그놈이 술에 취한 후에 쏘리라 생각하고 가만히 참고 있었다. 한참 뒤 그 괴물은 문을 열고 천천히 나왔는데 술에 취한 듯 움직이는 것이 느렸다. 이때다 싶어 탁생은 푸른 불빛을 겨누고 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그 괴물은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괴음을 지르며 탁생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탁생은 이때를 놓칠세라 나머지 불빛을 향해 또 한발의 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그 괴물은 두어 번 꿈틀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탁생이 인차 내려오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날이 희붐히 밝은 뒤에 내려와 보니 죽어 자빠진 괴물은 다름 아니라 거대한 거북이였다. 후에 그 거북이는 거대한 돌로 변해 버렸다. 그 거북 바위는 지금도 황주관유적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취귀석(醉龜石)’이라 부른다.

산성 서문터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성벽

산성 내에서는 무쇠로 된 마등(馬燈), 재갈, 철족(鐵鏃), 살촉, 쇠솥, 마표 등 철기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여덟 잎 연꽃무늬의 막새와 함께 줄무늬와 격자무늬의 붉은색기와조각 등 고구려시기의 전형적인 유물 다수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밖에 출토된 유물로는 요나라와 금나라시기의 철기들도 있고, 금나라와 원나라시기에 만들어진 구리로 된 불상 몇 기도 있다.

산성 밖에서는 또 마도(馬道)와 토성 유적도 발견되었다. 서문 밖으로 반원을 그리며 둘러진 그 토성은 사실상 석축성벽의 외성으로 서문의 1차 방어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토성 안쪽에서는 일찍 도자기 조각과 붉은기와조각 및 소량의 원통형 기와조각이 발견되었고, 고구려시기의 쇠사슬과 돌절구 세 개도 발견되었다.
 
성자산의 명칭에 대해서는 현지 노인들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 설화에 따르면 옛날 정자(程紫, 한자발음이 성자<城子>와 같음)라는 사람이 이곳 산에서 터를 잡고 왕 노릇을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산채를 정자산(程紫山)이라 불렀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정자산을 한자발음이 똑같은 성자산(城子山)이라고 표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 요령성박물관 관장 이문신(李文信)이 편찬한 《요령사적자료(遼寧史迹資料)》에 의하면 이 성자산산성은 고구려의 부여성(扶餘城)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자치통감》 권 201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총장(總章) 원년(기원 668년) 이 부여성에서 당나라군과 고구려군 사이에 한 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다. 그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史實)이 적혀 있다. 그해 “2월 임오일(壬午日)… 설인귀(薛仁貴)가 병사 3천명을 거느리고 부여성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병사가 부족한 것을 이유로 중지할 것을 청구했으나 ‘병사가 반드시 많아야 할 필요는 없다. 고용하면 되지 않겠는가?’라며 선봉에서 진격하여 고(구)려를 대파했다. 그러자 부여천에 있는 40여개의 성이 모두 아예 싸울 엄두도 못 내고 항복해왔다.” 이런 기록으로부터 볼 수 있다시피 부여성은 옛날에 이 일대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중국의 고고학계에는 부여성은 현재 길림성 농안(農安)지역에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산성동북쪽 산등성이 위에 어렴풋이 보이는 성벽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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