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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산산성
서풍 성자산성 원경(1999)
1) 학술조사
1973년 5월 요녕성 문물조사대(遼寧省 文物調査隊)에서 조사한 바 있고, 1991년 9월에는 철령시(鐵嶺市)와 서풍현 문물관리소(西豊縣 文物管理所)의 주향영(周向永), 조수이(趙守利), 형걸(邢杰) 등이 1970년대의 조사를 바탕으로 정밀 조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1993년 10월 5~7일에 맹상충(孟祥忠) 등이 서풍현 문물관리소(西豊縣 文物管理所)의 조수이(趙守利), 형걸(邢杰) 등과 함께 성 서남쪽의 토벽을 조사하였다. 1963년 9월 30일 요녕성 문물보호단위(遼寧省 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었다.
서풍 성자산산성 위치도
2) 위치와 환경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은 서풍현 량천진(西豊縣 凉泉鎭)에서 남쪽으로 7.5km 떨어진 성자산(城子山)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 27km 거리에 서풍현(西豊縣) 소재지가 있다. 청하(淸河) 지류인 연반하(碾盤河) 중류연안으로서 송요대평원(松遼大平原)에서 길림합달령산맥(吉林哈達嶺山脈) 방면으로 50km 이상 깊숙이 들어온 지역이다. 산성이 자리잡은 성자산(城子山)은 해발 760.3m로서 상당히 험준한 편이다. 연반하(碾盤河) 연안의 충적평지가 펼쳐져 있는 북쪽을 제외한 동․남․서 삼면으로도 험준한 산줄기가 이어진다. 산성의 동쪽과 서쪽에는 유수천(楡樹川)과 성자구(城子溝)라는 골짜기가 남북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고, 골짜기 안에는 계절성 하천이 북류(北流)하여 연반하(碾盤河)로 흘러들고 있다. 성자구 골짜기 입구에는 사슴농장이 있으며,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2km 정도 가면 성자산산성의 서쪽 입구가 나온다. 그리고 골짜기에 개설된 지방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개원시 임풍향(開原市 林豊鄕)을 거쳐 팔과수향 고성자산성(八棵樹鄕 古城子山城)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처럼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은 송요대평원(松遼大平原)에서 멀리 떨어진 험준한 산줄기에 자리잡고 있는데, 산성 북쪽을 지나가는 연반하(碾盤河) 연안에는 폭 1~2km, 길이 수십km의 충적평지가 하천을 따라 기다랗게 펼쳐져 있다. 이 충적평지는 하류방면으로 청하(淸河) 연안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 상류로는 발원지 직전까지 펼쳐져 있다. 북쪽으로는 소지류와 구릉을 통해 구하(寇河) 연안의 충적평지와 종횡으로 연결된다. 그리하여 성자산산성은 하천 연안로를 따라 청하(淸河) 유역은 물론이고 북쪽으로 구하(寇河), 남쪽으로 시하․범하(柴河․汎河) 일대까지 쉽게 나아갈 수 있다. 특히 연반하(碾盤河) 상류로는 길림합달령산맥(吉林哈達嶺山脈)을 넘어 휘발하․혼하(輝發河․渾河)의 분수령(分水嶺) 일대로 진입할 수 있다. 성자산산성은 비록 험준한 산줄기에 자리잡고 있지만, 하천 연안로를 통해 사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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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풍성자산성 평면도 서풍 성자산 산성과 외위성(外圍城)의 평면도
서풍 성자산산성 북쪽 망대(望臺) 평면도 서풍 성자산산성 저수지 평면도
서풍 성자산산성 출토 연화문와당 서풍 성자산산성수구문 우측성벽(2008)
3) 유적의 현황과 성곽의 구조
(1) 성벽의 축조상태
산성의 평면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협소하다. 해발 760.3m인 동쪽 주봉(主峰)에서 좌우로 둥그스름하게 내리뻗은 산줄기가 타원형을 이루며 산성 내부를 감싸고 있으며, 두 산줄기가 만나는 서쪽에 골짜기 입구가 있다. 동쪽 주봉에서 서쪽 입구까지의 거리는 약 1.5km, 남북 산줄기의 최대 폭은 0.9km이다. 산등성이 안팎의 경사면은 모두 가파른 편이지만, 남벽과 북벽의 안쪽 면은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산성 내부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편으로 여러 개의 골짜기가 종횡으로 놓여 있지만, 평지는 전체 규모에 비해 아주 협소한 편이다. 성벽은 산등성이를 따라가며 돌로 축조하였다. 산등성이에 절벽이 우뚝 솟은 경우에는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는 한편, 평평한 곳에는 인공성벽을 축조하였다. 천연성벽의 길이 322.8m, 인공성벽의 길이 4,070.6m로서 대부분 인공성벽인데, 전체 둘레는 4,393.4m에 이른다. 대체로 산등성이 바깥쪽에 내탁식(內托式)으로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정상부를 따라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하거나 천연암벽 위에 덧쌓은 경우도 있다.
산성의 평면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협소하다. 해발 760.3m인 동쪽 주봉(主峰)에서 좌우로 둥그스름하게 내리뻗은 산줄기가 타원형을 이루며 산성 내부를 감싸고 있으며, 두 산줄기가 만나는 서쪽에 골짜기 입구가 있다. 동쪽 주봉에서 서쪽 입구까지의 거리는 약 1.5km, 남북 산줄기의 최대 폭은 0.9km이다. 산등성이 안팎의 경사면은 모두 가파른 편이지만, 남벽과 북벽의 안쪽 면은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산성 내부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편으로 여러 개의 골짜기가 종횡으로 놓여 있지만, 평지는 전체 규모에 비해 아주 협소한 편이다. 성벽은 산등성이를 따라가며 돌로 축조하였다. 산등성이에 절벽이 우뚝 솟은 경우에는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는 한편, 평평한 곳에는 인공성벽을 축조하였다. 천연성벽의 길이 322.8m, 인공성벽의 길이 4,070.6m로서 대부분 인공성벽인데, 전체 둘레는 4,393.4m에 이른다. 대체로 산등성이 바깥쪽에 내탁식(內托式)으로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정상부를 따라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하거나 천연암벽 위에 덧쌓은 경우도 있다.
성벽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특히 남벽 중앙, 서벽 남단과 중앙, 북벽 중앙과 서단, 동벽 남단 등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성벽은 외벽이 높고 내벽이 낮은데, 외벽 높이는 최저 1.3m에서 최고 5m에 이른다.
서벽 수구문(水口門) 북측에는 성돌을 17단 이상 쌓은 성벽이 잘 남아 있고, 북벽 할구(割口)의 동측 성벽에도 모양과 크기가 다양한 성돌을 15단 이상 가지런히 쌓은 모습이 잘 남아 있다. 그리고 북벽 중단에는 가파른 경사면에 수평으로 가지런하게 성벽을 쌓은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내벽의 축조상태는 거의 확인할 수 없지만, 북벽 할구(割口) 서측에 5단 정도의 내벽이 남아 있다. 한편, 남벽은 전구간에 걸쳐 5~7단 정도로 성벽이 남아 있는데, 서단에서는 200m 이상 이어지는 성벽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성벽의 두께는 0.8~1.5m로서 특히 성문이나 수구문 부근의 성벽이 두껍다. 성벽의 내외벽은 비교적 잘 다듬은 방형이나 장방형 성돌을 층층이 쌓아 축조하였다. 성돌은 산중의 화강암을 채취하여 바깥면만 조금 다듬었는데, 형태는 바깥쪽이 크고 안쪽이 작은 쐐기형돌(楔形石)이다. 내외벽 사이의 벽체 중가에는 모양이 일정치 않은 잔돌을 채웠는데, 교차시키면서 내외벽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벽체를 견고하게 하였다. 성벽 단변은 대체로 아래쪽이 넓고 위쪽이 좁은 사다리꼴이다. 또한 절벽이라 할 만큼 가파르고 험준한 곳 부근의 성벽에는 성벽 중간에 기다란 돌을 박아 바깥으로 나오게 하였다. 성벽을 견고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외위성(外圍城)
산성의 서벽 바깥에는 서벽 바깥의 골짜기와 평지를 가로질러 축조한 외위성이 있다. 외위성은 북벽 서단의 망대 아래에서 시작하여 남벽 서단의 ‘송봉(松峰)’ 산기슭에 이르는 구간에 흙으로 축조하였다. 현재 성벽의 잔고(殘高) 1~2m, 기단부의 너비 6~9m, 윗면의 너비 0.8~1.6m이다. 다만, 성자산산성 서쪽 입구 앞쪽의 ‘대동구(大東溝)’ 부근 성벽은 잘 다듬은 초석(礎石-성돌)으로 기단부를 쌓았다.
산성의 서벽 바깥에는 서벽 바깥의 골짜기와 평지를 가로질러 축조한 외위성이 있다. 외위성은 북벽 서단의 망대 아래에서 시작하여 남벽 서단의 ‘송봉(松峰)’ 산기슭에 이르는 구간에 흙으로 축조하였다. 현재 성벽의 잔고(殘高) 1~2m, 기단부의 너비 6~9m, 윗면의 너비 0.8~1.6m이다. 다만, 성자산산성 서쪽 입구 앞쪽의 ‘대동구(大東溝)’ 부근 성벽은 잘 다듬은 초석(礎石-성돌)으로 기단부를 쌓았다.
북벽 서단의 망대(望臺) 아래에서 시작된 성벽은 산성 서쪽 입구 앞쪽에 자리잡은 ‘대동구(大東溝)’ 골짜기를 횡단하여 서북쪽 산등성이를 따라가다가 성자구(城子溝) 평지로 방향을 바꾼 다음 성자구(城子溝) 도로 120m 지점에서 중단된다. 토벽이 바라다보이는 도로 서쪽에서 다시 시작된 성벽은 서쪽 산꼭대기에 이르러 200여m 정도 이어지다가 ‘십팔도배(十八道背)’ 산등성이를 따라 정남으로 방향을 꺾어 삼도산(三道山) 산등성이를 가로질러 사도구(四道溝) 골짜기 입구에 이른다. 이곳에서 성벽은 여러 산봉우리 정상과 능선을 따라가며 이어지는데 현재 성벽 위는 소로(小路)로 이용되고 있다. 성벽은 수구문(水口門) 서쪽 맞은편의 산등성이에서 산 아래로 방향을 꺾어 동남쪽으로 이어지다가 서문 바깥의 송림(松林)을 통과하여 산길 남측 산등성이에서 남벽 서단의 ‘송봉(松峰)’ 아래 80m 지점에 이른다. 북벽 서단 아래에서 시작되어 남벽 서단 아래까지 이어지는 성벽의 길이는 약 5km에 이른다.
(3) 외위성 외곽의 서남쪽 토벽
외위성 외곽에는 서남방향의 토벽이 두 개 있다. 첫째 토벽은 ‘십팔도배(十八道背)’ 산등성이 외위성(外圍城)의 북쪽 2/3 지점에서 갈라진 것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서남방향으로 가다가 약 300m 지점에서 밭에 의해 절단되어 토벽은 보이지 않는다. 밭모퉁이에서 길이 200m, 높이 1.5m, 기단부 너비 6~8m, 윗면의 너비 1.3m인 수로둑이 이어지는데, 개울과 만나는 종점의 유실된 단면을 보면 판축(版築)한 토층(土層)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즉 종래의 토벽을 수로둑으로 이용한 것이다. 개울과 경작지를 지난 다음 산기슭에 이르면 다시 토벽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곧바로 산꼭대기로 이어진다. 둘째, 토벽은 외위성 서남모서리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서남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특히 외위성에서 200m 이내의 토벽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바깥쪽 토벽 흔적도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이어진다.
외위성 외곽에는 서남방향의 토벽이 두 개 있다. 첫째 토벽은 ‘십팔도배(十八道背)’ 산등성이 외위성(外圍城)의 북쪽 2/3 지점에서 갈라진 것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서남방향으로 가다가 약 300m 지점에서 밭에 의해 절단되어 토벽은 보이지 않는다. 밭모퉁이에서 길이 200m, 높이 1.5m, 기단부 너비 6~8m, 윗면의 너비 1.3m인 수로둑이 이어지는데, 개울과 만나는 종점의 유실된 단면을 보면 판축(版築)한 토층(土層)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즉 종래의 토벽을 수로둑으로 이용한 것이다. 개울과 경작지를 지난 다음 산기슭에 이르면 다시 토벽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곧바로 산꼭대기로 이어진다. 둘째, 토벽은 외위성 서남모서리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서남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특히 외위성에서 200m 이내의 토벽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바깥쪽 토벽 흔적도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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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풍 성자산산성 남벽 서단(1999) | 서풍 성자산 산성 원형의 수혈건물지(2008년) |
발굴조사 이전의 건물지 외관(1999) | 발굴조사 이후의 건물지(2008) |
서풍 성자산 산성 남벽(동→서) | |
서풍 성자산산성 1호 건물터의 기와편 | 서풍 성자산 산성 북벽(서→동) |
4) 역사적 성격
성자산산성 주성은 총둘레 4km 이상이 대형산성이나 내부에는 평지가 아주 협소하며, 안쪽 산비탈도 가파르기 때문에 주거용 공간으로 활용하기 힘들다. 이러한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산성 서쪽에 대동구(大東溝)와 성자구(城子溝) 골짜기를 감싼 5km의 외위성(外圍城)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외위성(外圍城)은 석성(石城)인 본성과 달리 토성(土城)으로서 본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된다. 즉 성자산산성은 처음에는 군사방어성으로 구축되었다가 나중에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을 보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서풍 성자산산성은 요하 상류일대의 다른 고구려산성에 비해 상대적을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고, 처음에는 주로 군사방어성의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추정된다.
입지조건이나 축성법 등이 성자산산성과 가장 유사한 최진보산성(催陣堡山城)의 지리적 위치를 살펴보면, 범하(汎河) 북안에 위치한 최진보산성은 성자산산성처럼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혼하(渾河) 하류의 요동평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요하 상류일대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였다. 즉 요하 상류일대의 고구려산성이 대체로 송요대평원에서 지류 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된 반면, 성자산산성은 최진보산성과 함께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휘발하(輝發河)나 혼하(혼하) 상류를 거쳐 곧바로 요하 상류로 나아가는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기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처럼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이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진출한 초기 단계에 축조되었다면, 요하 지류 연안 길목에 위치한 다른 고구려산성들은 고구려가 이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어느 정도 다진 단계에서 구축되었다고 추정된다.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의 입지조건이나 축성법이 압록강 중류일대의 고구려 초기 산성과 유사한 반면, 다른 고구려산성은 이들과 뚜렷이 구별된다는 점은 이를 반영한다. 그리고 성자산산성이나 최진보산성은 진출 초기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군사방어적 기능이 가장 먼저 고려되었을 것이다. 두 산성이 다른 산성과 달리 험준한 산줄기 내부에 위치하였으며, 특히 성자산산성은 집안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처럼 골짜기로 깊숙이 들어온 다음 산성 입구로 진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하겠다. 따라서 성자산산성은 4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에 군사방어성으로 구축되었다가, 고구려가 이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다진 단계에서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서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외위성(外圍성)을 축조하였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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