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4440
* 단동 기행 기사가 길어서 이중 박작성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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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성에 '짝퉁' 성곽이라니... 씁쓸하네
[압록강 따라 1500km, 동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보다②] 단둥에 가다
12.10.26 16:55 l 최종 업데이트 12.10.26 20:57 l 이연희(krhana)
조중접경지역. 고백하건대 겨레하나에게 접경지역은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평양, 개성, 신의주, 백두산, 금강산…. 인도적 지원을 매개로 통일운동을 해온 우리 단체가 시민들에게 소개할 곳은 많았고, 2004년 아리랑 관광 이후 한 해 한 번씩 서울에서 출발해 평양으로 가는 직항기를 띄우는 일이 연례행사였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백두산에 오르다니, 우리 땅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남북관계가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남과 북, 통일을 느낄 수 있는 현장에 목마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격앙된 목소리들뿐,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건강한 희망을 이야기할 곳은 없었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지난 9월 19~23일의 조중접경지역 답사. 어찌 보면 단순한 출발이었지만 접경지역이 품고 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미래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지고 말았다. 지금은 남과 북이 품고 있지 못한 역사의 땅이자 동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할 위기와 기회의 땅, 조중접경지역 현장에서의 소회를 전하고자 한다. - 기자 말
대련에서의 첫날 일정을 마치고 4시간 30분여를 달려 도착한 단둥. 화려한 불빛과 가는 곳마다 눈의 띄는 건설현장들이 단둥의 활기를 웅변하는 듯했다. 일행이 도착하기 전날인 9월 18일은 마침 일제가 만주철도 폭파사건을 빌미로 만주를 침략한 9·18사변(만주사변) 8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최근 남중국해 조어도(일본명 센카쿠, 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를 둘러싸고 높아진 반일감정 탓에 온 시내가 들썩일 만큼 대규모 반일시위가 진행되었다고 현지가이드는 전한다.
전날 시위의 여파인 듯 지나는 차량 곳곳에 반일구호가 담긴 스티커, 현수막이 부착된 모습도 뜨문뜨문 볼 수 있었다. 우리네 사는 모습과 다르지 않은 이곳도 아픈 역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연민이 밀려든다. 중국인들의 반일시위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아쉬움과 함께.
한국전쟁의 기록, '압록강단교'
▲ 압록강단교 ⓒ 겨레하나
둘째날 아침, 서둘러 도착한 압록강단교. 이름난 관광코스로 개발된 탓인지 이른 아침부터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교역물자의 80%가 지난다는 조중우의교와 압록강단교가 나란히 서 있는 곳이니 오가는 발길도 잦을 터. 단교 주변에는 관광객을 위한 호텔과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북한의 평안북도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잇는 다리인 압록강 철교는 한반도와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1911년과 1943년 일제에 의해 두 개가 가설되었는데 하류 쪽에 먼저 가설된 다리는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에 파괴되어 절반만 남아 있고(압록강 단교), 상류 쪽의 다리는 1990년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라 개칭되어 오늘날까지 한반도와 중국을 잇고 있다.
북한 쪽으로 교각 한 개만을 남겨두고 끊긴 다리는 참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건설되어 일본의 대륙침략 통로 역할을 했고 한국전쟁이 나자 중국 인민지원군은 북한을 지원(1950년 10월)하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넜으며, 결국 이를 저지하려는 미군의 폭격(1950년 11월)으로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의 시신을 조선(북한)에 묻은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 참전은 그만큼 특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단교 입구에 자리 잡은 팽더화이(彭德懷)와 인민지원군 지휘관들의 조각상은 중국이 왜 끊어진 다리를 지금까지 고스란히 보존해 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 단교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팽더화이와 인민지원군 지휘관들의 조각상 ⓒ 겨레하나
그렇다면 우리에게 단교는?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제 식민과 한국전쟁의 기억임과 동시에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북녘 땅을 지금은 가볼 수 없는 안타까움 같은 것이었다. 단교 이편의 흥성거림을 돋보이게라도 하듯 고요하기만 한 강 건너편의 북녘 땅. 이국에서 처음만나 느끼는 민족은 그렇게 아픔으로 먼저 다가왔다.
압록강변 저쪽 북녘 땅에는 제방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큰 비라도 올라치면 강이 범람하기 일쑤라고 한다. 더구나 중국쪽 강변에는 제방시설이 다 되어 있어 범람은 어김없이 신의주 쪽으로 일어나기 마련인데, 지난해 장마로 신의주에 큰 물난리가 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특히 이쪽에서 수위조절을 위해 댐 문을 열었기 때문에 홍수피해는 더 컸다고. 해마다 물난리를 겪어야 하는 북녘 동포들을 위해 우리가 도울 일이 없을까 생각해본다.
항미원조기념관... '미국에 대항해 싸우는 조선을 돕다'
단교에서의 사색을 더 이어가기 위해 우리는 항미원조기념관을 찾기로 했다. 관광객들이 으레 둘러보는 코스가 아닌지라 현지가이드도 초행길인 듯했다. 기념관에 들어서자 1953년 한국전쟁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높이 53m의 육중한 기념탑이 우리를 맞았다. 기념탑에는 '抗美援朝紀念塔(항미원조기념탑)'이라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친필 휘호가 새겨져 있었다.
전시관 내에는 한국전쟁 참전과정과 전사들에 관한 기록, 중국인민지원군의 활약상 등이 상세히 전시되어 있다. 한국전쟁에 관한 꽤 많은 자료들을 소장되어 있는 듯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기념관 해설사의 친절한 해설이 있었지만 중국어로만 진행되는 탓에 알아들을 수 없었고, 현지가이드도 초행길인지라 원하는 만큼의 설명을 듣기도 어려웠다는 것이다. 아쉽지만 그저 눈짐작으로만 그 의미를 읽어 내리는 수밖에.
▲ 한국전쟁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소장된 항미원조기념관 ⓒ 겨레하나
▲ 마오쩌둥과 팽더화이.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라고 쓴 마오쩌둥의 친필. ⓒ 겨레하나
▲ 북에서 인민지원군에 보낸 감사휘장들 ⓒ 겨레하나
'미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조선을 돕는' 전쟁. 짐작만으로도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기록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의 역사 앞에서 누구는 궁금함에 귀를 쫑긋 세웠고, 누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에게 한국전쟁 참전은 항일전쟁과 사회주의혁명을 도운 '조선'이라는 혈맹에 대한 예를 다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1840년 아편전쟁에서 시작해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기까지 미국을 포함한 서양열강과 일본에 의한 100년간의 식민지배 역사를 되풀이 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인 듯했다. 참전을 망설이던 중국이 연합군의 원산 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참전을 결심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서로 적이 되어 3년을 피흘리며 싸운 전쟁이기에 그 역사의 앙금을 모두 털어내고 치유하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한국전쟁은 아직 진행형이 아닌가. 한국전쟁이 진정한 종료를 알리는 날, 한국전쟁에 대한 모든 기록을 털어놓고 진정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재조명해볼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동북공정으로 사라진 고구려의 성, '박작성'
아쉽지만, 강렬했던 항미원조기념관을 뒤로 하고 일행은 단둥에서의 마지막 코스인 박작성(泊灼城)으로 발길을 돌렸다.
박작성은 고구려의 성 중의 하나로, 단둥 시에서 4km 떨어진 호산(虎山)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옛 고구려의 박작성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중국의 동북공정 과정에서 박작성은 고구려의 옛 성이 아니라 '만리장성의 동단기점'으로 탈바꿈 된 지 오래(1990년)이며, 그 이름도 '호산장성'으로 명명되었다.
동행한 해설사에 따르면 "성곽의 방향이나 축성법이 누구로부터 누구를 지키겠다는 것인지조차 설명이 안 되는 엉터리로, 옛 성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쌩짜로 지어낸 것"이라고 한다. 언뜻 봐도 급조된 것이 분명한 '짝퉁' 성곽을 오르면서 내내 씁쓸하고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 동북공정으로 사라진 고구려 박작성 터에 지어진 호산장성 ⓒ 겨레하나
▲ 호산장성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압록강과 북녘땅 ⓒ 겨레하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 동북공정. 만일 그것이 자신들의 과거와 미래에 힘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라면 3자인 우리가 토를 달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발상부터 다른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고 침해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런데 고구려라는 한 뿌리를 가진, 지금은 분단된 우리는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니.
박작성 꼭대기에서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압록강과 북녘 땅을 위안 삼으며 오른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이어 일행의 발길이 닿은 곳은 '일보과(一步跨)'. 중국과 북한의 국경 중 최단거리라는 일보과는 정말 한걸음이면 닿을 만큼 지척에 북녘 땅을 마주보고 있었다. 철책도 경계도 없는 이민족과의 국경에서 우리의 휴전선을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의외로 중국과 북한의 국경 어디에도 우리가 상상했던 살벌한 기운은 찾기 힘들었다. 뉴스에서 접하는 북중국경은 날마다 이어지는 탈북과 강제송환으로 아비규환이 펼쳐지는 곳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최근 기획탈북으로 오히려 경계가 강화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중국과 북한의 국경 중 최단거리, 일보과 ⓒ 겨레하나
단둥에서의 둘째 날 일정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한껏 욕심을 부려서일까. 아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계획했던 일정 중에 아리스포츠 방문이 무산된 것은 그 중 가장 아쉬운 일.
아리스포츠는 인천시가 5억 원을 투자하고 남북이 협력해 만든 기업이다. 원래 평양공장 설립을 추진했으나 2010년 남측의 5·24조치로 좌절되었다가 단둥에 공장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아리스포츠 방문을 추진했던 이유는 비록 이국에서지만 어렵게 이어가고 있는 남북협력의 현장을 목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현실은 그조차 쉬이 허락지 않았다.
남북한과 중국이 버무려진 도시 단둥. 이곳에선 중국인, 한국인, 조선인(북한사람), 조선족, 조선 출신 화교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져 살아간다. 이념은 달라도 그것을 내세우는 이는 없다. 전쟁과 이민의 풍파를 딛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도시. 북중무역의 최전방기지로 날로 발전하고 있는 단둥이 그들에게도 우리 민족에게도 기회의 땅이 되기를 바라본다.
단둥에서의 일정을 마친 우리 일행은 셋째 날 답사를 위해 옌지(연길)행 야간열차에 올랐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기대되는 코스 중에 하나인 야간열차는 장장 17시간을 달려 일행을 이도백하에 내려주게 된다. 미지근하고 달큰한 중국 맥주에 벌써 익숙해진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 대륙에서의 특별한 경험, 17시간을 달려 옌지로 가는 야간열차 ⓒ 겨레하나
덧붙이는 글 | * 이연희 기자는 겨레하나 문화센터 휴의 활동가입니다.
* 이 기사는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겨레하나) 블로그(http://blog.krhana.or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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