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menuCnt=30917&writeDate=20121106&kindSeq=1&writeDateChk=20120523
<70> 미끼된 황제
사냥꾼 될까 … 기로에 선 당태종 사냥감 될까 …
2012.05.23
고구려 ‘말갈 기병대’ 앞세워 唐 돌궐기병에 첫 패배 안겨
안시성이 위치한 것으로 전해지는 영성자촌 전경. 동북아재단 고광희 선생 제공
645년 6월 21일 고연수와 고혜진이 이끄는 고구려 말갈 15만 대군이 안시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책부원구’ ‘전당문’에 당태종의 장면 묘사 기록이 남아 있다. “그 군대가 일으킨 먼지가 수십 리에 걸쳐 가득했다. 저들(고구려)의 군대가 우리보다 많다!” “무리 15만의 깃발(旗)이 30리를 이었고, 누런 뱀이 안개를 토해 내는 것처럼 기마궁수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붉은 개미떼 같이 들판 가득 밀려왔다.”
연개소문의 ‘황제사냥’이 본격화됐다. 7세기 중반 이렇게 강력한 대군을 보유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당 이외에 고구려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기병 전력에 있어 고구려는 당에 뒤지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이번에 거의 모든 가용자원을 다 쏟아부었다.
이러한 상황이 닥치자 당태종은 자신이 미끼가 됐다는 것을 직감하고 마음속으로 떨었다. 자신이 죽거나 포로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은 고구려에 패해 멸망한 수나라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천보(天寶 742~756) 연간 유속(劉?)이 찬술한 ‘수당가화(隋唐嘉話)’에는 “고구려와 말갈군이 40리에 뻗친 것을 보고 당태종의 얼굴에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구려 군대의 위용을 본 당태종은 이세적이 왜 안시성을 전장으로 택했는지 깨달았다. ‘책부원구’는 당태종이 예측한 경우의 수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안시성 부근 산에 수많은 보루를 세워, 안시성에서 병량을 지원받아 장기전으로 가면서 말갈기병을 시켜 당군의 보급로를 차단한다. 그 다음은 안시성에 들어가 성민들을 장악한 후 농성한다. 셋은 당군과 야전에서 정면충돌한다. 당태종은 고구려군이 마지막 것을 택할 것이라 확신했다. 안시성은 고연수가 이끌고 온 고구려 중앙군에 식량은 물론이고 전력 지원을 거부할 것이다. 당연히 문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니 고구려 군대가 입성할 수도 없다.
안시성은 ‘영주’인 성주로부터 말단 성민들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마음으로 일치단결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안시성 지역공동체 이익에만 집착했고, 고구려 국가 미래에 관심이 없었다. 성민들은 국가보다 직속상관인 성주를 숭상하는 봉건적 관습에 충실했다.
물론 안시성주가 유능하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안시성은 독립국으로 한동안 생존했다. 그것은 안시성의 전력이 특별히 강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국가총력전에 동참하지 않아 그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의 요인이 됐다.
이세적이 안시성 부근을 고구려 중앙군과 결전 장소로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일 연개소문의 통제에 따르고 있던 건안성 부근에서 고구려 15만 대군과 결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요동성에서 건안성에 이르는 더 길어진 병참선을 지키는데 더 많은 기병력을 투입해야 했을 것이고, 문을 열고 나와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건안성의 군대를 틀어막는 데도 상당한 전력이 소요됐을 것이다.
앞서 경험 많은 대로(對盧)가 고연수에게 조언했다. 지구전으로 시간을 끌어가면서 당나라 군대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 승산이 높다고 했다. 현장에서 고연수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시성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서 15만 군대를 당장 먹이는 것은 쉽지 않다. 수가 많다 보니 방어하는 군대가 먹는 문제에 부딪치는 얄궂은 상황이 벌어졌다. 단기간에 승부를 내지 않으면 수적 우세가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양면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당태종 한 사람에 대한 연개소문의 집착은 고구려군 전체의 전력 운영을 경직시키고 있었다. 사냥감이 매혹적이라 유혹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당의 입장에서 작전수행에 장애물이었던 황제가 이제 그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도 황제의 참전은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었다.
당군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점령지가 늘면서 병력 분산은 피할 수 없었다. 현토성·계모성·요동성·백암성 수비를 위해 많은 군대를 잔류시켜 놓았다. 본부인 요동성 창고에서 안시성 부근으로 곡물을 운반하기 위한 병참선 보호에 수많은 돌궐기병들이 배치됐다. 실질 전투 병력은 4만을 넘지 못했던 것 같다. 한참 먼 건안성을 전장으로 택했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행군하는 고구려군에 당군이 첫 도발을 감행했다. 아사나사이가 이끄는 돌궐기병들을 출격시켰고, 고구려군은 말갈 기병대를 선두에 세위 이를 요격했다고 ‘책부원구’는 기록하고 있다.
안시성에서 16㎞ 정도 떨어진 곳 잡초가 무성한 광대한 구릉지대였다. 여름 그 넓은 만주벌판에서 기병들이 서로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만주평원의 찬란한 햇빛 아래 초원 전사와 숲속 사냥꾼의 살벌한 기병전이 벌어졌다. 서로 상대편 진용으로 바짝 달려가 돌궐기병과 말갈기병이 활을 날렸다. 기마의 속력과 화살이 지면에 떨어질 시간을 감안해 발사했다. 키 자란 풀들은 금세 수천의 말발굽에 짓밟혔고, 대기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했다. 결과는 말갈기병의 우세로 기울고 있었다. 많은 돌궐기병들이 활을 맞고 땅에 떨어졌고, 기세에 밀려 퇴각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양군은 결전을 하지 않았다.
초반전의 패배에 당태종과 그의 부하들은 심리적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력한 말갈기병에 선방을 맞은 그들은 이 상태로 전투를 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뭔가 꼼수가 필요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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