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menuCnt=30917&writeDate=20121106&kindSeq=1&writeDateChk=20120530
<71>주필산 전투의 시작
15만 고구려군 ‘공격’ 당태종 사냥감 될수도 ‘공포’
2012.05.30
군부의 수장 이세적 지휘권 황제에 반납
영성자산성(안시성) 앞 벌판.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 주필산 전투가 벌어졌다. 뒤에 보이는 산이 안시성이 위치했던 곳이다.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 제공
첫 승리를 만끽한 고연수는 15만 군대 전체를 이끌고 12㎞를 진군했다. 안시성에서 동남쪽 3㎞ 떨어진 산록에 거대한 진영을 만들었다. 안시성의 도움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곳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당군에게 뭔가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안시성에서도 고구려 중앙군의 첫 승리를 불쾌하게 생각했을 리 만무하다. 동포애 때문만이라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패배하면 다음 차례는 안시성이었다.
당군의 진영에서 중대한 결정을 놓고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군부의 수장 이세적은 군대의 지휘권을 당 태종에게 반납했다. 이세적은 군사적 천재이기도 하지만 노련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당 태종이 사령관이 되어 전투를 직접 지휘하지 않으면 누가 보아도 그는 싱싱한 미끼에 불과하다. 모양세가 좋지 않다. 당 태종이 직접 지휘한 주필산의 결전에서 이세적과 그의 휘하 1만5000명이 고연수 군대의 고구려 군대를 유인하는 떡밥이 된 것도 여러 가지를 생각게 한다.
645년 6월 21일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었다. 당 태종은 구체적인 작전을 짜기에 앞서 정찰을 나갔다. 처남인 장손무기와 경호를 할 기병 수백이 그를 따라 나섰다. 시야가 탁 트인 높은 산 위에 올랐다. 주변의 지형지세와 군사가 매복할 곳을 살펴야 하는데 시선은 자꾸 고구려 군대가 있는 곳을 향했다. 위풍당당한 15만 대군이었다. 40리에 달하는 진용의 기세에 눌렸다. 당 태종은 사냥하러 나온 자신이 사냥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리라. 때려잡을 적군이 너무나 막강하게 보였다.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검은 빛을 띠었다.
당 태종이 고구려의 일개 장군 고연수에게 사자를 보냈다. 그것은 마치 황제가 한수 접고 들어가는 것 같이 보였고, 고연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고연수가 보기에 고구려군대의 위세에 눌린 당 태종이 자신의 침공을 변명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황제의 의도를 뻔히 알고는 있지만 그를 자만에 빠지게 했다.
‘자치통감’은 전한다. “너희 나라의 신하(연개소문)가 그 주군(영유왕)을 시해해 내가 그 죄를 물으러 왔다가 교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나의 본 마음이 아니다. 너희 나라의 성을 몇 개 빼앗았지만 그것은 양식과 마초가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너희 나라가 신하로서 예를 지킨다면 돌려줄 것이다.”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유혈 쿠데타가 고구려 사회에 남긴 상흔을 파고들었다. 정변으로 왕을 비롯한 180명의 고위 귀족이 한순간에 몰살당했다. 고구려 귀족 장성 가운데 혈육을 잃지 않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왕족의 성을 갖고 있는 고연수와 고혜진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당 태종에 대한 심리적인 동조는 당군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게 했다.
그날 밤 당 태종은 그가 기획한 작전명령을 하달하고 바로 군대를 움직였다고 ‘책부원구’는 전하고 있다. “이세적은 욱기(勖騎) 1만5000을 이끌고 적(고구려 군대)이 위치한 산의 서쪽 고개에 진을 쳐라! 장손무기는 장군 우진달 등을 이끌고 정병(精兵) 1만1000을 기병(奇兵)으로 삼아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적의 배후를 쳐라! 짐(太宗)은 친히 회기(會騎) 4000을 이끌고 고각(鼓角)을 숨기고 기치를 낮추어 적영(賊營)의 북쪽 높은 고봉에 올라, 고각의 소리(聲)로 지휘하겠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전당문’을 보면 여러 장수에게 내린 명령은 최종결단의 순간에 작성한 서면(新書)으로 전달됐다고 한다. 전체적인 지침은 이렇다. “먼저 적이 생각지도 못한 기이한 전술을 적용하지만 이로 인한 전체적인 기제(機制) 변동은 억제하라. 다음으로 이세적은 총관 장사귀 등 ‘마보군(馬?軍)’ 14총관은 적의 서남면을 맡고, 장손무기는 ‘마보군’ 26총관을 이끌고, 동쪽 계곡으로 나와 길이 합쳐지는 곳에서 적의 뒤쪽을 막아 그 목을 잡되 그 귀로를 좀 틔어 줘라. 마지막으로 짐(태종)은 대장기를 쓰러뜨리고 몰래 북산에 올라 말 고삐를 잡고 싸움이 시작되는 것을 기다리겠다.”
세계적으로 강력한 두 군대의 대결이 임박했다. 날이 밝자 고연수는 이세적의 1만5000의 병력이 서쪽에 진을 친 것을 보았다. 말갈 기병을 대거 동원하면 쉽게 섬멸할 수 있는 위치였다. 곧장 병력을 출동시켰다.
이적의 군대는 수적으로 월등히 많은 말갈 기병에게 곧장 포위돼 하늘을 가릴 듯한 화살 세례를 받았으리라. 이어 말갈 기병들이 가까이 들이닥쳐 창과 칼을 휘둘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천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세적의 병력은 말갈기병에게 포위됐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세적이 반격할 때 병사는 1만여로 줄어 있었다.
유속의 ‘수당가화’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주필의 싸움에서 황제의 군대(육군:六軍)가 고구려에 제압되어 거의 위세를 떨치지 못하게 되었을 때 태종이 명하여 이세적의 깃발인 흑기를 자세히 살피게 했다. 척후병이 고하기를 이세적의 검은 대장기가 포위되었다고 하니, 태종이 크게 두려워했다(帝大恐).”
위의 기록을 표절한 유공권의 ‘소설’을 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와 같이 논평하고 있다. “이세적이 결국 스스로 빠져나갔지만 (당 태종의) 두려워함이 이와 같았는데 ‘구당서’ ‘신당서’,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이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자기 나라를 위해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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