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kindSeq=1&writeDateChk=20111228 

<50>제국의 오만
신용불량자 된 唐 `무한전쟁' 불붙이다
2011.12.28

몽골 초원(아래)과 중국 사이에 있는 고비사막.  


구원 요청을 하는 신라 사신이 다녀간 직후 당 태종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가만히 두면 신라가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시간이 촉박했다. 신라를 분할 점령하기 위해 현재 연개소문은 백제와 손을 잡았고, 신라를 협공할 시점이 임박했다. 

643년 9월께 장안을 출발한 당나라 사신 상리현장은 그해 초겨울에 요하를 건넜다. 국경인 요하의 소택지, 이른바 요택(遼澤)을 넘어서자 연개소문이 이미 신라 북쪽 변경에 위치한 성 2~3개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리현장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연개소문은 남쪽 전선에 가 있었다. 고구려 보장왕을 만난 상리현장은 당 태종의 서한을 전했다. ‘삼국사기’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우리 당나라 왕조에 충성을 다짐하며 조공을 그치지 않으니, 고구려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거둬야 한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군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백제의 의자왕도 같은 내용의 서신을 당나라 사신을 통해 받았다. 그는 신라 침공을 포기했고, 사과 서한까지 당 태종에게 보냈다. 하지만 당나라와 국경을 접한 고구려는 달랐다. 실질적인 결정권자는 보장왕이 아니고 사령관 연개소문이었다. 그는 신라전선에서 당 사신의 도착 소식을 들었고, 보장왕의 소환장을 받고 평양으로 들어왔다. 둘은 대면했다. 상리현장이 먼저 당 태종의 말이라 하며 신라를 더 이상 공격하지 말라고 말했다. 연개소문의 답변을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옛날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신라는 요동에 전력이 집중된 상황을 이용해 고구려의 남쪽 영토 500리를 탈취했다. 신라가 그 영토를 돌려주지 않으면 이 전쟁은 멈출 수 없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수가 통일을 이룩한 589년 직후 고구려는 신라의 영토를 침공했다. 온달 장군은 강원도 영서지역을 차지하고 현 충북 단양지역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612년 이후 수나라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신라가 상실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북진했고, 강원도 지역을 대부분 수복했다. 서북에서 고구려와 중원 통일왕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신라는 언제나 고구려의 남쪽지역을 침탈했다. 당이 향후에 고구려를 침공하면 수나라 때처럼 신라가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다시 침공할 것이 확실하다. 요구를 들어준다고 한들 당이 고구려를 침공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마침 그 직전 당 태종은 자신이 한 타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신용불량자가 돼 있었다. 

앞서 642년 10월 설연타에 잡혀간 부하 계필하력을 빼내오기 위해 당태종은 자신의 딸 신흥공주를 설연타 이남 칸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바가 있었다. 이듬해인 643년 6월 설연타의 칸 이남이 조카 돌리설(突利設)을 시켜 결혼을 약속하는 사주단자와 함을 보냈다. 어마어마한 폐물이 따라갔고 말 5만 필, 소와 낙타 1만 두, 양 10만 마리가 예물로 증여될 것이 약속됐다. 또한 음식을 준비해간 돌리설이 태종과 그 신하들을 위해 화려하고 풍성한 잔치를 베풀었다. 당과 설연타의 국혼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신의 딸을 이역만리 몽골리아에 볼모로 보내기 싫었던 태종은 꼼수를 부렸다. 사자를 시켜 이남 칸에게 친영(親迎)의 예를 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전했다. 사위가 될 사람이 신부를 데리고 가기 위해서는 신부의 아버지를 직접 만나 인사하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남 칸이 장안까지는 올 수 없으므로 설연타와 인접한 당의 변경 도시인 영주(靈州 : 영하성 연무현)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남 칸은 영주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이남 칸이 당태종에게 빙례(聘禮)를 치를 때 예물을 바치기 위해 휘하 여러 부족에게서 거둬들인 가축들이 사막을 건너 영주 방면으로 향하다 과반이 죽었고, 약속 기한도 놓쳤다. 당 태종에게 혼례를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예물이 다 갖춰지지 않았는데 그들과 통혼을 한다면 다른 융적(戎狄)이 당나라를 가볍게 볼 것이라는 것이다. 태종은 파혼을 선언했다. 

저수량이 당태종에게 간언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근래 설연타와 혼인할 것을 허락했는데 서쪽으로는 토번에게 알리고 북쪽으로 아사나사마에게도 전하였으며, 중국의 어린아이도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략) 모두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자 아끼는 딸을 오랑캐 왕에게 보낸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를 물리시니 신은 국가의 명성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저 나라(설연타)는 속임을 당했다는 화를 쌓아 둘 것이고, 중국 백성들은 약속을 어겼다는 부끄러움을 가슴에 품을 것입니다.”

저수량은 당나라의 대외 신인도 하락을 걱정했다. 지금까지 태종이 힘을 키워올 수 있었던 것은 융적들에 대한 철저한 약속 준수 때문이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이라도 신의칙을 지키는 것이 적의 수를 확실히 줄여 왔다. 변칙적 파혼으로 이제 당 태종의 말을 주변 나라와 민족들이 믿지 않을 것이고, 그들에 대한 당 태종의 종용은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미래의 일어날 일들이 불 보듯 뻔했다. 대부분 신하들이 만류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국가는 이미 그에게 혼인할 것을 허락하고 그의 빙례에 따른 예물을 받았으니 융적들에게 신의를 잃어서 변경지대에 걱정거리를 생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당 태종은 신하들에게 옛것을 알면서 지금의 것을 모른다고 힐책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옛날 한(漢)나라 초기에 흉노(匈奴)가 강하여 비단과 자녀들을 그들에게 바쳤소. 하지만 지금 중국이 강하고 융적이 약하오. 우리 보병 1만으로 흉노 (유목민 기병) 수만을 칠 수 있소. 설연타가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는 것도 이 때문이오.”

당시 군부의 수장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강력했다. 이정(李靖)이 만들어낸 진법(陣法)에 의해 훈련된 보병과 당 국가에 포획된 돌궐기병들의 절묘한 결합은 새로운 개념의 군대를 만들어냈다. 완만한 진법을 사용하는 보병의 장점과 속도가 빠른 유목민 기병의 장점이 결합해 전력의 상승효과가 극대화된 무적의 군대였다. 전근대 중국 군대의 전력이 이 시기만큼 절정에 달한 적도 없었다. 절대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고 주변에 정면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지자 당 태종은 오만해졌다. 연개소문도 태종이 뭔가 성급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신라 침공을 중지하라는 태종의 종용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믿을 수 없는 중국 황제의 말을 듣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연개소문을 강경론자로만 몰아붙일 수도 없다. 연개소문은 앞서 수나라 때부터 조공국이 중국왕조에 대해 예(禮)를 갖고 접대해도 이런저런 이유가 붙어 어려움에 처해지고 멸망으로 내몰린 사례를 알고 있었다. 중국 황제에 의한 덕화는 관념적이라 경계가 없기 때문에 항상 또 다른 타국에 의한 병탄의 위기에 방치됐다. 그러므로 주변 나라들은 중국 이외의 세력과도 외교관계를 갖고 때로는 군신관계를 맺었다. 과거 신라와 고구려, 백제와 왜, 신라와 백제의 관계도 그러했다. 

643년 9월 직전에 서로 숙적이었던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 분할 점령을 목적으로 한 군사동맹을 체결한 것은 설연타 이남 칸이 당 태종에게 사기당한 것에 자극을 받아서였는지도 모른다. 고구려의 새로운 실권자 연개소문과 백제의 새 국왕 의자왕의 결합은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무한 경쟁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제국의 오만’을 경계하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645년 요동에서 당과 고구려의 전쟁이 한창일 때 연개소문이 설연타의 이남 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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