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kindSeq=1&writeDateChk=20120104 
<51>전쟁으로
643년 唐 태종 고구려와 전쟁하기로
2012.01.04

643년 말 당나라 사신 상리현장은 고구려에서 살벌한 겨울을 보냈다. 전쟁이 임박한 것을 직감한 고구려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전마(戰馬)들이 국가의 목장에 집결되고, 동원령이 내려졌고, 군구(軍區)별로 병사들이 모여 훈련을 받았다. 군수물자들이 산성창고로 옮겨지느라 모든 간선도로는 북새통이었다. 이듬해 정초쯤 평양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봄이 왔는데도 등골이 오싹하고 추웠다. 그는 자신이 연개소문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하면 당 태종의 결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불 보듯 뻔했다. 

돌아가는 길 압록강을 건너고 요동성에서 투숙하며 잠을 청할 때도 그 걱정뿐이었다. 마음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하필 자신이 연개소문에게 최후통첩을 했고, 태종에게 결전을 결심하게 하는 말을 전하게 됐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비와 남편 그리고 자식을 잃을 것인가. 불과 32년 전 이곳 고구려에서 30만 명의 수나라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중국 요령성 조양(朝陽)에 있는 높이 45m의 북탑, 북위대에 만들어져 수ㆍ당을 거쳐 요나라대에도 보수ㆍ중수됐다. 세상의 끝 고구려로 가던 중국의 병사들이 북탑에 무사 귀환을 기원했으리라. 조양은 수·당의 영주도독부가 위치했던 곳으로 고구려의 습격을 자주 받았다.
 
644년 2월 상리현장이 당나라 장안 궁정에 도착했다. 당 태종을 만나 연개소문의 말을 정직하게 전했다. 듣고 있는 당 태종의 얼굴에 화기가 서렸다. 그가 말했다. “이제 천하가 안정됐는바 오로지 고구려만이 불복하고 있다. 그들은 병사와 말이 늘어나고 힘이 강해지자 신하의 도를 저버리고 주변 나라들에 대한 토벌을 일삼고 있으니 바야흐로 난이 시작된 것이다. 짐은 이제 고구려를 처단해 후환을 없애고자 한다.”

나이 50줄에 든 당 태종은 오직 자신의 보위를 이을 태자 이치만을 염려했다. 나중에 고구려가 우환이 될 것이라 생각한 그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누가 봐도 전사국가 고구려와의 전쟁은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저수량이 당 태종에게 완곡하게 간언했다. ‘신당서’ 저수량전은 이렇게 전한다. 

“폐하께서 깃발을 휘둘러서 가리키자 중원의 깨끗하고 편안해졌으며, 돌아 보니 사방에 있는 이적(夷狄)이 두려워해 복종하고 위엄과 바라는 바가 큽니다. 지금 마침내 바다를 건너서 멀리 가서 작은 오랑캐를 정벌하다가 만약에 기한을 정해놓고 이긴다면 오히려 좋겠습니다만, 만일에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위엄과 바라는 것이 손상됩니다. 한번 싸워서 승리하지 못하면 필시 다시 군사를 일으킬 것이며, 분한 마음으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분병(忿兵)을 일으키면 승리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저수량의 지적은 이전의 수나라가 끝내 고구려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내란으로 멸망했던 일을 연상케 했다. 전쟁의 참화를 아는 자는 전쟁을 결정하기 쉽지 않다. 수말의 동란기에 청춘을 보낸 태종이었다. ‘구당서’는 저수량의 말을 들은 태종의 마음이 흔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자 군부의 수장인 이세적이 입을 열었다. ‘구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이세적이 말하기를 최근에 설연타가 변경을 침범했을 때 폐하는 필시 추격하고자 했으나, 그때 폐하가 위징의 말을 들어 기회를 잃었습니다. 만약 폐하가 계책대로 했다면 설연타 놈들은 하나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며, 50년간 변방은 무사했을 것입니다.”

당 태종이 말했다. “그렇소. 위징의 실수였소. 짐은 후회했소.” 이세적의 말 한마디는 당 태종이 고구려와 전쟁 결심을 굳히는 데 큰 힘이 됐다. 

현재로 말하자면 국방부장관인 병부상서 이세적의 발언은 당나라 군부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당나라 군부는 건국 이래 끝없는 전쟁으로 존재 가치를 입증한 사람들이다. 전쟁이 없으면 그들의 존재 가치는 사라진다. 전쟁은 군인들이 살아가야 할 터전이었다. 군인의 숙명이었다. 

당제국은 팽창과정에서 이미 체질이 육식동물과 같이 변해 있었다. 태종의 젊은 시절 국내 할거 세력을 평정하는 통일전쟁으로 시작해서 사상 유례가 없는 성공적인 북방 이민족 지배를 실현하는 데 이어 서역으로 토욕혼, 고창 정벌 등 잦은 외정을 치렀다. 이뿐만 아니라 원정거리를 보더라도 수나라대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630년 돌궐제국이 붕괴된 직후 당에 항복해 온 10만 이상의 유목민들이었다. 강력한 기동성과 무력을 보유한 그들은 당나라 국가에 의해 포획된 전쟁기계들이었다. 당 태종은 그들을 몰아 제국의 팽창을 지속했다. 태종대 유목전사들이 참여하지 않은 전쟁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전투력은 당제국의 군사체계의 필수적인 부분이 됐다. 

그들은 계필하력과 같이 당 태종 주변에 있던 유목수령들의 휘하에 속해 있었다. 유목수령들의 발언권과 영향력 정도는 그들이 거느리는 유목민 전쟁기계들의 규모에 따라 각기 차이가 있었다. 유목수령들이 존재하는 한 대외전쟁은 유목민들의 단결과 전리품 획득의 기회로 여겨졌음에 틀림이 없다. 당 군부의 수장인 이세적은 물론이고 유목수령들은 당연히 전쟁 우선의 강경책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당 태종은 유목민의 사회 생리, 현재의 이민족 지배체제, 그리고 국내의 사정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한 끝에 결국 국가 전략상 외정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최종적인 결단을 내렸다. 고구려 전쟁의 감행 결정도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 이뤄졌다. 제국경영 전략의 하나였다. 제국 휘하의 전쟁기계의 존재는 외부와 전쟁을 지속하지 않으면 내부로 폭발할 수도 있다. 

당제국은 그 통치 아래 들어와 있는 유목부족들 사이에 전쟁을 허용하지 않았다. 유목부족들의 생리적인 전쟁 및 약탈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약탈의 기회를 마련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중국 변방에 대한 침구를 피하는 길이기도 했다. 결국 태종은 변경의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팽창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전쟁 때마다 유목민들은 빠짐없이 참여했다. 

당 태종이 고구려 전쟁에 자신이 직접 종군하겠다고 선언하자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것은 고구려 전쟁에 친정한 수양제의 실패를 상기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판박이였다. 인간들은 과거의 잘못을 피하려 하지만 결국 그 과거가 되풀이된다. 그것은 구조의 문제다. 고구려가 국제역학 관계에서 통일된 중원왕조와 공존하기 힘든 강력한 존재였음을 의미한다. 

당 침공의 원인은 고구려와 유목제국의 연결

특정 국가 간의 전쟁이 되풀이되는 것은 국제역학의 구조가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644년 고구려가 당을 선제공격한 듯이 보이는 기록이 보인다. ‘신당서’ 장검전(張儉傳)을 보면 “영주도독부에 고구려가 무리를 이끌고 침입해 노략질(侵寇)하므로 장검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격파했다”라고 한다. 이 기록은 ‘책부원구(冊府元)’ 장수부에도 적혀 있다. 이 기록은 그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당을 먼저 선제공격했다는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는 데 문제도 있다. 첫째, 644년 7월, 장검의 고구려 침공 원인을 ‘신당서’에서 ‘신라가 자주 구원을 요청해’라고 기술돼 있다. 둘째, 양국 간의 긴장감이 흐르던 644년 고구려가 선제공격을 했다면 ‘자치통감’이나 ‘구당서’ ‘신당서’ 제기에 그 기록이 보여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셋째, 연개소문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외교를 했고, 마지막으로 644년 9월에 ‘미인’을 당 태종에게 바치기도 했다. 고구려 선제공격설은 그 노력들과 상충된다.

과거 고구려가 수나라를 선제공격한 적이 있다. 598년 2월 고구려가 말갈기병 1만을 동원해 요서를 침공했다. 그해 수문제가 30만 대군으로 보복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동ㆍ서돌궐이 수를 침공해 요하에서 초원으로 군대를 돌려야 했다. 고구려가 유목민을 이용해 수군의 발목을 잡은 듯하다. 이는 645년 당 침공기에도 재현된다. 유목제국과 연화(連和)하는 고구려는 수ㆍ당제국 입장에서 위험한 존재였고, 그것이 수ㆍ당의 고구려 침공의 구조적 원인인 것으로 여겨진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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