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kindSeq=1&writeDateChk=20120328 

<63>요동성 전투
물<水>의 도시 요동성 불<火>에 결정타 맞다
2012.03.28
 
당은 음악·고구려는 굿판으로 병사들 사기 진작 공성기 방어 나무벽이 ‘불난데 기름’… 전열 무너져


요동성 옛 성터 내부에 있는 요양의 백탑. 국가급 문화재로 중국 6대 고탑 가운데 하나다. 높이 71m, 팔각 13층이다.
 
요동성 전투는 많은 희생이 따른 처참한 사투였다. ‘책부원구’는 “용감한 병사들이 몸을 던져 목숨을 잃었다(勁卒勇夫, 輕身效命)”고 기록하고 있다. 요동성의 성벽을 감싸는 그 긴 해자에 쌓여, 썩어 해골을 드러낸 시신들은 당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냄새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고, 해자 앞 성벽을 지키는 고구려 군인들은 악취 때문에 교대근무를 해야 했으리라. 

요동성 자체의 화력은 만만치 않았다. 당나라 병사들은 성벽 위 활, 노(弩), 노포(弩砲) 등 직사화기에서 쏟아내는 화살에 노출돼 있었고, 성안에서 발사된 투석기에도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동성에는 613년 수양제가 남기고 간 장비가 매우 많았다. 

물론 당군의 엄청난 희생으로 요동성의 해자와 성벽도 많이 파괴됐다. 하지만 전투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얼마나 더 많은 전사자를 낼지 몰랐다. 병사들을 죽음의 수렁으로 더 이상 밀어 넣을 수 없었던 당 태종은 다른 방안을 내놓았다. 

당군의 손에는 무기보다 삽과 흙자루가 들려 있는 시간이 많았다. ‘책부원구’를 보면 “성을 포위하고 땅굴(지도)로 아홉 곳으로 공격하였다(於是雲羅四合, 地道九攻)”라고 하고 있다. 엄청난 희생자를 내는 해자 매립을 중지하고 수없이 많은 곳에서 터널이 굴착됐다. 성벽 밑에 굴을 판 후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직사각형의 버팀목 ‘지도(地道)’가 여기에 사용됐다. 

그러나 요동성은 물이 많은 곳이었다. 지하 수십 미터 아래의 암반층을 굴착하지 않은 이상 누수는 피할 수 없었고, 터널 공사는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동성의 굳게 닫힌 철문은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병사들은 지쳤다.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자 당 태종은 마지막 방법을 썼다. 

‘책부원구’는 “명령을 내려 사방에 장졸들을 모았다. 위지경덕에게 황문들을 시켜 ‘현운지아가’를 부르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당 태종은 높은 곳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군악대 구성원들은 거세된 남자 ‘황문(黃門)’들이었다. ‘현운지아가’는 장중하고 엄숙했다. “장수가 듣고 더욱 감정이 복받치고, 사졸들의 사기가 진작되었다”고 한다. 

‘황문’은 내시를 말한다. 거세를 통해 유지되는 그 미성은 관중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미성을 내는 여자를 전쟁터에 데리고 갈 수 없었기에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16∼18세기 유럽에서도 카스트라토(castrato)를 만들어 내기 위해 변성기 이전의 어린 소년들을 거세시켰다. 성대의 순(脣)이 자라지 않아 소년 목소리는 그대로 유지되고, 가슴과 허파는 성장해 어른의 힘을 지녀 맑고 힘 있는 목소리를 낸다. 

당 태종은 왕자였을 때부터 군웅들과 싸우다 폐색이 짙어지면 전투 중에 노래를 지어 병사들에게 부르게 했다. 주로 민간의 가락을 토대로 해 전의를 고양시키는 군악이었다. 당나라 병사들이 군악대와 함께 부르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요동성 안에 있는 고구려인들도 한순간의 소강상태가 왔음을 알았다. 요동성민들도 군중행사를 열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요동성민들도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당군의 공격으로 높은 전루들이 하나둘씩 무너지면서 당나라 전투공병들은 공성탑의 엄호를 좀 더 받을 수 있었고, 그들이 해자를 메우는 작업도 진척됐다. 성 밑 해자가 지속적으로 메워질수록 당군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이 더욱 용이해져 갔다.

성안 고구려 사람들의 불안감은 깊어 갔고, 신앙에 기대려고 한 것 같다. 주민들은 주몽을 모신 신사(神祠)에 소를 잡아 제사를 행하여 예쁜 여인을 단장해 주몽신의 부인으로 삼으면서 성의 안전을 빌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성안에는 주몽의 사당(朱蒙祠)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이 말하기를 전연(前燕)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해지자 미녀를 치장하여 여신으로 만들어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여 성은 꼭 안전할 것이다”라고 했다. 북치고 춤추는 무당의 말이었다. 무당을 통해 자신들의 애타는 바람을 신에게 전하고 얻고 싶은 신의 약속을 전해 받은 한판의 굿이 행해졌다. 

전투가 소강상태로 빠진 직후였다. “차가운 비가 내렸고, 날씨가 맑아지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점차 그것이 거세지기 시작했다”라고 ‘책부원구’는 기록하고 있다. 여름의 후텁지근한 더위를 씻어내는 비가 내린 후 저기압이 고기압으로 바뀌고 하늘이 트이면서 건조하고 시원한 강풍이 불었다. 

바람이 불자 당 태종이 화공(火攻)을 생각해냈다. ‘책부원구’는 “성루의 불을 지르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불이 꺼졌다(聊命縱火, 數處潛然)”라고 기록돼 있다. 비온 직후라 물기를 먹은 나무들이 타지 않았던 것 같다. 

전쟁의 천재 당 태종은 그 순간에 집요하게 생각했다. 풍향도 요동성 쪽으로 바뀌었다. 하늬바람을 맞은 절호의 기회가 왔다. 이 순간을 놓치면 요동성 함락은 어려워진다. 그는 비에 젖지 않은데다 성 외부에서 바람을 등질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았다. 요동성의 서남쪽 전루였다. 지붕이 있어 목재가 젖지 않았다. 당군 공성기의 공격에 살아남은 그 전루가 고구려군에 재앙이 될지는 몰랐다.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는 시점에 당 태종은 소수의 정예 병사들을 선발해 높은 공성탑인 충간(衝竿) 꼭대기 공간을 채웠다. 그들은 불화살을 서남쪽 전루 내부로 집중사격했다. 바람을 정면으로 받고 있었던 고구려의 베테랑 궁수들은 그 장면을 뻔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을 등지고 있는 그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 어려웠으리라. 

당군 공성기의 수없이 반복된 공격을 받으면서 그 전루는 나무로 덧대지고 촘촘하게 보강돼 갔다. 당군의 불화살 세례를 받고 나서야 그것이 장작더미가 돼 있었다는 것을 고구려 병사들은 실감했다. 전루에 발화된 불길은 바람을 타고 건물들이 밀집한 성 내부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자 사람들은 아우성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아비규환의 혼란이 벌어지자 성벽에 있던 고구려 병사들의 전열도 흩어졌다. 거대한 연기기둥과 함께 처절한 소리가 요동의 광활한 들판을 뒤덮고, 불길은 담장에 갇혀 도시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요동성민들을 집어삼켰다. 물(水)의 요새 요동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불(火)로 결정타를 맞았다. 
 
작곡가 당 태종-軍樂 ‘진왕파진악’ 남겨… 후세 큰 영향

당 태종이 지은 군악 가운데 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이 있다. 그것은 무용을 곁들인 아악(雅樂) ‘칠덕(七德)’으로 발전해 당 조정에서 오랫동안 연주되고 일본 궁중악에도 그 영향을 남겼다. 820년대 이 곡을 들은 백낙천(白天)은 칠덕무를 지어 칭송했다. “태종이 열여덟에 의병을 일으켜 백모황월(白?黃鉞)을 치켜들고, 양경(兩京:장안ㆍ낙양을 의미)을 평정하였네, 왕세충을 포로로 삼고 두건덕을 참수하여 사해(四海)를 맑게 하고, 홀로 분전하여 시세를 꿰뚫었고 마음으로 사람을 감동시켜 인심을 끌어안았네.” ‘칠덕(七德)’이란 전쟁에서 감격에 찬 극적인 승리를 다룬 서사시의 보통명사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63>요동성 전투
물<水>의 도시 요동성 불<火>에 결정타 맞다 / 2012.03.28
당은 음악·고구려는 굿판으로 병사들 사기 진작 공성기 방어 나무벽이 ‘불난데 기름’… 전열 무너져

요동성 옛 성터 내부에 있는 요양의 백탑. 국가급 문화재로 중국 6대 고탑 가운데 하나다. 높이 71m, 팔각 13층이다.
 
요동성 전투는 많은 희생이 따른 처참한 사투였다. ‘책부원구’는 “용감한 병사들이 몸을 던져 목숨을 잃었다(勁卒勇夫, 輕身效命)”고 기록하고 있다. 요동성의 성벽을 감싸는 그 긴 해자에 쌓여, 썩어 해골을 드러낸 시신들은 당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냄새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고, 해자 앞 성벽을 지키는 고구려 군인들은 악취 때문에 교대근무를 해야 했으리라. 

요동성 자체의 화력은 만만치 않았다. 당나라 병사들은 성벽 위 활, 노(弩), 노포(弩砲) 등 직사화기에서 쏟아내는 화살에 노출돼 있었고, 성안에서 발사된 투석기에도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동성에는 613년 수양제가 남기고 간 장비가 매우 많았다. 

물론 당군의 엄청난 희생으로 요동성의 해자와 성벽도 많이 파괴됐다. 하지만 전투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얼마나 더 많은 전사자를 낼지 몰랐다. 병사들을 죽음의 수렁으로 더 이상 밀어 넣을 수 없었던 당 태종은 다른 방안을 내놓았다. 

당군의 손에는 무기보다 삽과 흙자루가 들려 있는 시간이 많았다. ‘책부원구’를 보면 “성을 포위하고 땅굴(지도)로 아홉 곳으로 공격하였다(於是雲羅四合, 地道九攻)”라고 하고 있다. 엄청난 희생자를 내는 해자 매립을 중지하고 수없이 많은 곳에서 터널이 굴착됐다. 성벽 밑에 굴을 판 후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직사각형의 버팀목 ‘지도(地道)’가 여기에 사용됐다. 

그러나 요동성은 물이 많은 곳이었다. 지하 수십 미터 아래의 암반층을 굴착하지 않은 이상 누수는 피할 수 없었고, 터널 공사는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동성의 굳게 닫힌 철문은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병사들은 지쳤다.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자 당 태종은 마지막 방법을 썼다. 

‘책부원구’는 “명령을 내려 사방에 장졸들을 모았다. 위지경덕에게 황문들을 시켜 ‘현운지아가’를 부르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당 태종은 높은 곳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군악대 구성원들은 거세된 남자 ‘황문(黃門)’들이었다. ‘현운지아가’는 장중하고 엄숙했다. “장수가 듣고 더욱 감정이 복받치고, 사졸들의 사기가 진작되었다”고 한다. 

‘황문’은 내시를 말한다. 거세를 통해 유지되는 그 미성은 관중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미성을 내는 여자를 전쟁터에 데리고 갈 수 없었기에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16∼18세기 유럽에서도 카스트라토(castrato)를 만들어 내기 위해 변성기 이전의 어린 소년들을 거세시켰다. 성대의 순(脣)이 자라지 않아 소년 목소리는 그대로 유지되고, 가슴과 허파는 성장해 어른의 힘을 지녀 맑고 힘 있는 목소리를 낸다. 

당 태종은 왕자였을 때부터 군웅들과 싸우다 폐색이 짙어지면 전투 중에 노래를 지어 병사들에게 부르게 했다. 주로 민간의 가락을 토대로 해 전의를 고양시키는 군악이었다. 당나라 병사들이 군악대와 함께 부르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요동성 안에 있는 고구려인들도 한순간의 소강상태가 왔음을 알았다. 요동성민들도 군중행사를 열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요동성민들도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당군의 공격으로 높은 전루들이 하나둘씩 무너지면서 당나라 전투공병들은 공성탑의 엄호를 좀 더 받을 수 있었고, 그들이 해자를 메우는 작업도 진척됐다. 성 밑 해자가 지속적으로 메워질수록 당군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이 더욱 용이해져 갔다.

성안 고구려 사람들의 불안감은 깊어 갔고, 신앙에 기대려고 한 것 같다. 주민들은 주몽을 모신 신사(神祠)에 소를 잡아 제사를 행하여 예쁜 여인을 단장해 주몽신의 부인으로 삼으면서 성의 안전을 빌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성안에는 주몽의 사당(朱蒙祠)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이 말하기를 전연(前燕)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해지자 미녀를 치장하여 여신으로 만들어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여 성은 꼭 안전할 것이다”라고 했다. 북치고 춤추는 무당의 말이었다. 무당을 통해 자신들의 애타는 바람을 신에게 전하고 얻고 싶은 신의 약속을 전해 받은 한판의 굿이 행해졌다. 

전투가 소강상태로 빠진 직후였다. “차가운 비가 내렸고, 날씨가 맑아지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점차 그것이 거세지기 시작했다”라고 ‘책부원구’는 기록하고 있다. 여름의 후텁지근한 더위를 씻어내는 비가 내린 후 저기압이 고기압으로 바뀌고 하늘이 트이면서 건조하고 시원한 강풍이 불었다. 

바람이 불자 당 태종이 화공(火攻)을 생각해냈다. ‘책부원구’는 “성루의 불을 지르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불이 꺼졌다(聊命縱火, 數處潛然)”라고 기록돼 있다. 비온 직후라 물기를 먹은 나무들이 타지 않았던 것 같다. 

전쟁의 천재 당 태종은 그 순간에 집요하게 생각했다. 풍향도 요동성 쪽으로 바뀌었다. 하늬바람을 맞은 절호의 기회가 왔다. 이 순간을 놓치면 요동성 함락은 어려워진다. 그는 비에 젖지 않은데다 성 외부에서 바람을 등질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았다. 요동성의 서남쪽 전루였다. 지붕이 있어 목재가 젖지 않았다. 당군 공성기의 공격에 살아남은 그 전루가 고구려군에 재앙이 될지는 몰랐다.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는 시점에 당 태종은 소수의 정예 병사들을 선발해 높은 공성탑인 충간(衝竿) 꼭대기 공간을 채웠다. 그들은 불화살을 서남쪽 전루 내부로 집중사격했다. 바람을 정면으로 받고 있었던 고구려의 베테랑 궁수들은 그 장면을 뻔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을 등지고 있는 그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 어려웠으리라. 

당군 공성기의 수없이 반복된 공격을 받으면서 그 전루는 나무로 덧대지고 촘촘하게 보강돼 갔다. 당군의 불화살 세례를 받고 나서야 그것이 장작더미가 돼 있었다는 것을 고구려 병사들은 실감했다. 전루에 발화된 불길은 바람을 타고 건물들이 밀집한 성 내부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자 사람들은 아우성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아비규환의 혼란이 벌어지자 성벽에 있던 고구려 병사들의 전열도 흩어졌다. 거대한 연기기둥과 함께 처절한 소리가 요동의 광활한 들판을 뒤덮고, 불길은 담장에 갇혀 도시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요동성민들을 집어삼켰다. 물(水)의 요새 요동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불(火)로 결정타를 맞았다. 
 
작곡가 당 태종-軍樂 ‘진왕파진악’ 남겨… 후세 큰 영향

당 태종이 지은 군악 가운데 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이 있다. 그것은 무용을 곁들인 아악(雅樂) ‘칠덕(七德)’으로 발전해 당 조정에서 오랫동안 연주되고 일본 궁중악에도 그 영향을 남겼다. 820년대 이 곡을 들은 백낙천(白天)은 칠덕무를 지어 칭송했다. “태종이 열여덟에 의병을 일으켜 백모황월(白?黃鉞)을 치켜들고, 양경(兩京:장안ㆍ낙양을 의미)을 평정하였네, 왕세충을 포로로 삼고 두건덕을 참수하여 사해(四海)를 맑게 하고, 홀로 분전하여 시세를 꿰뚫었고 마음으로 사람을 감동시켜 인심을 끌어안았네.” ‘칠덕(七德)’이란 전쟁에서 감격에 찬 극적인 승리를 다룬 서사시의 보통명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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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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