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yahoo.com/historybook/articles/285138 

요동성 무너지다

598년에서 614년까지 16년간 펼쳐진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 요동성은 백만의 대군과, 가공할 공성무기에도 함락을 불허한 무적의 요새였다.

그러나 642년 영류왕의 친당정책에 반발한 연개소문이 반정에 성공함으로써, 상황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물론 과거에도세번의무력에 의한 왕권교체(6대 태조왕, 8대 신왕, ,15대 미천왕)가 있긴 하였지만, 그 당시에는 중국에 거대한 통일세력이 존재하지 않을 시기였다.

하지만 당고조 이연이 이끄는 군대가 618년에 당왕조를 세운 이후 불과 8년만에 수나라 대부분의 영토를 장악함으로써, 고구려에겐 엄청난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실질적인 당나라 건국자인당태종 이세민은아버지인 당고조의 유지를 받들지 않고, 형제들을 모조리 숙청하면서 황제자리에 오른야심찬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오르자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수나라가 네번의 대 공략에도 끝내 이루지 못했던 고구려정복이었다.

하지만 당태종은 중국역사상 손꼽히는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다. 그가 수나라의 분열을 곧바로 극복하고 당나라 건국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행운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앞서, 고구려 정세를 치밀하게 살펴 볼 필요가있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당나로부터의 도교 도입을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도교를 국교로 하고 있는 당나로써는, 고구려의 정신을 훼손시키고 손쉽게 첩자를 유입시킬 수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장손무기란 인물은 당나라에서 파견한 8명의 도교전도자중 한명이엇지만, 그의 주요임무는 고구려의 정세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정세를 파악한장손무기는 연개소문이 반정성공에 힘입어 매우 교만해져 있기 때문에, 이대로 둔다면 더욱 방만한 국정운영을 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를 당태종에게 올렸다.

물론 그의 보고는당나라의 입장에서 본 것이지만, 이것은 당시 연개소문이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는것을뜻하였다.여기에 신라 공략을 위해 주요전력을 대거 남쪽 전선에 투입하면서, 당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서쪽의 전력을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의 집중공격을 받은 신라는 643년 당나라에 공식적인 군사원조를 요청함으로써, 마침내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할 수 있는 직접적인명분을 얻게 되었다.



당나라가 고구려로 출병한 것은 신라의 군사요청이 있은지 2년 후였는데 출병시당나라의 총병력은 정확하지 않다. 장량이 이끄는 군대가 43000명 이었고, 이세적이 이끄는 군대가 6만 명이었으며, 여기에 난주와 하주에서 동원된 군사가 수만명이었다. 따라서 총 병력은 15만 ~20만 정도로 추산되는데, 고구려 역시 총 병력이 30만 정도는 되었기 때문에 숫적으로는 대등한 편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군세는 요수 방면에 있던 건안성과 개모성을 그리 어렵지 않게 격파하고 요택을 건너 그대로 신성과 국내성을 압박하였다.

다만 당나라는 너무 빨리 전진한 탓에 도종이 이끈 4천 군대는 국내성과 신성에서 나온 4만이나 되는 고구려군의 공세에 밀려 포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세적이 주력 6만을 이끌고 지원하자, 고구려군은 1천여명의 전사자를 내며 후퇴하여 수성전에 돌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런 전황은 고구려군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었으며, 또 과거 영양왕 시절에는 있을 수도 없는 후퇴전략이었다. 과거 같았으면 당나라 군대가 요택에서 지연되고 있을 때 기습작전이나 게릴라 작전을 통해 충분한 지공전술을 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막상 요동성에 도착하였을 때는 제대로 된 전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 결국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가는 것이 기본 전략이었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군은 이런 지공작전을 펼만한 역량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왜....결국 연개소문의 반정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험란한 요택을군사적 손실없이 통과한 당나라 군사들은, 요동성을 빠른 시간에 겹겹이 포위할 수 있었다.

요동성이 어떤 곳인가? 그곳에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사당이 있는 곳이었다. 주몽이 최초로 고구려를 선포한 졸본에 함께 양대 신성지역이었던 곳이다. 그리고 그 사당에는 주몽이 썼을 것으로 추측되는 강철갑옷과 예리한 창까지 모셔져 있다. 그렇기 때문은 그 성은 결코 무너져서는 안되는 요새였으며, 그곳을 지키는 고구려인의 정신무장도 남다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동성에 대한 공격은 12일이나 계속되었다. 아마 성안의 사람들은, 버티기만 하면 분명 지원군이 오리라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신성과 국내성의 4만 군대는 오지 않았다. 그들의 성도 공격당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모든 성을 동시에 공격하기에는 당나라 군사숫자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마도 영양양 시절에 가졌던 각성간의 유기적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일 것이다. 

요동성의 고립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으며, 또 공성무기를 잘 갖춘 당나라 앞에서 요동성은 방어태세는 점점더 약화되었다. 
 
이세적은 무려 300보나 되는 사거리를 지닌 포차를 동원하여 큰 돌을 쏘아댔다. 300보라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150~200m정도의 거리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어떠한 무기보다도 사거리가 긴 것이었다.

그러니 요동성은 날라오는 엄청난 돌덩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동성의 고구려군민들은, 성벽이 무너지면 나무를 엮어 막았고, 그 나무 성책이 무너지면, 수레를 개조하여 저지선을 만들었다.

이렇게 요동성은 불리한 조건앞에서도,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태종은 또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화공책이었다. 수나라와의 전쟁기록을 살펴보아도, 화공책이 등장한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고구려로써는 맞바람인 남풍이 불어왔고, 당태종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서남쪽의 망루를 집중공격 하였다. 
성벽은 돌이지만 지휘부가 있는 위의 망루는 나무이지 않는가? 고구려 군은 엄청난 매연을 안고 싸워야 했고, 기회를 놓치지 않은 당군은 총공격을 가하였다. 

결국 요성성은 12일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요동성을 지키던 1만의 군사들 역시 최후의 일인까지 싸웠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정규 1만명 외에 승병 1만명이 있었지만, 정규군은이 전멸당하자 항복하고 말았다. 이렇게 2만의 군대가 무너지자 성안에 있던 4만의 민중들은 포로가 되고 말았으며, 성안에 비축해 놓았던 50만석의 군량은 당나라의 것이 되고 말았다.


북한 순천시의 고구려 벽화 고분 요동성 성곽도, 성 남벽의 길이 1.5㎞로 추정.

요동성이 점령당한것은 이후 전개되는 당태종의 고구려 공략에 막대한 이점을 가져다 주었으며, 고구려로서는 대단히 불리한 위치에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우선 군량미와 거점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당군은 장기전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서기 341년 11월고국원왕이 모용씨 선비족에 몰려 도읍 국내성마저 버리고 도망할 때도 그 원인은, 319년 미천왕 20년빼앗겼던 요동성을 끝내 회복하지 못한것이 원인이 되지 않았는가?

만약 요동성이 보름만 더 버티어 주었다면, 아니 차라리 적에게 군량을 내어 줄 바에는 자신과 함께 군량을 모두 태워버릴만한 장수만 있었어도, 고구려가 그렇게 불리한 위치에서 전쟁을 치루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에도 진정한 단 한명의 무장은 존재하고 있었다. 요동성의 점령으로 승세를 타기 시작했던 당태종, 그러나 그 당태종의 야심을 꺽을만한 인물이 여전히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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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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