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yahoo.com/historybook/articles/285058
요동을 지키기 위한 3년간의 전쟁
618년 당나라를 건국한 당고조 이연은 고구려 영류왕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형제들을 모두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당태종 이세민은, 연개소문이 반정을 통해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하였다는 이유와 신라의 군사원조 요청 등을 명분으로 삼아 645년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특히 이세민은 20만에 이르는 잘 훈련된 군사들을 앞세워 요동성을 점령하고, 고구려의 15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초반 기세를 올렸지만, 100여 일에 이르는 안시성의 항전에 밀려 후퇴하고 말았다. 이후 당태종은 수십만명이 동원되는 총력전을 대신하여, 1~3만명 정도의 정예병력만을 동원하는 전술작전을 647년에서649년 까지 3년에 걸쳐 전개하게 된다.
당태종이 이 같은 전술을 펼친 것은 우선 수나라 때 범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수나라는 1차 공격 때 30만 2차 공격 때 110만 3차 공격 때와 4차 공격 때 역시 30만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는 등 총력전을 펼친 결과, 국력의 소모와 지방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여 자멸하고 말았다. 따라서 당태종은 재정과 군역착출에 대한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고구려와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한편, 원정에 대한 당위성과 자신감을 회복하는데 주력하였다.
반면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1차 고당전쟁의 승리에 지나치게 고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고구려로서는 신라가 당과 연합하는 것을 막는 일이 중요하긴 하였지만, 당나라에게 강경외교노선을 펼치고 있었던 만큼 서쪽 전선을 강화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공격에 치중하여 전선을 분산 확대시켰으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서쪽 전선의 전력약화와 병력부족 현상을 초래하였다고 보여진다. 또한 극심한 가뭄과 2년전에 있었던 전란의 영향으로 인해 647년 요동지역은 매우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실정을 파악한 당태종은 우진달을 수군총관으로 삼아 총 1만명의 병력으로, 식량수송 및 주력병력의 지원을 담당케 하였다. 그리고 이세적을 요동대총관으로 삼아 소모전을 펼치게 하였는데, 기록에는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과 합류하였다고 나와 있는데, 아마도 총 병력은 2만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특히 당나라는 지난날 요수강변의 싸움이나 비사성 전투등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모두 수전에 익숙한 병사들만을 특별히 선별하여 뽑은 정예병력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역시 남소성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항전하여 이세적이 이끈 군대를 격파하였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오히려 이세적이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성의 외곽을 불태우고 돌아갔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세적이 고구려 군을 격파하였다면 성을 점령할 일이지 왜 성의 외곽만을 불태우고 돌아갔겠는가? 결국 고구려 군에 밀려나자, 고구려 땅을 황폐화 시킬 목적으로 성 외곽지역만을 방화한 것이다. 반면 우진달이 이끈 1만명의 군대는 석성의 전투에서 100번의 치열한 접전끝에 점령하였다. 이에 고구려군은 1만명의 군대를 증파하여 적리성 인근에서 대 접전을 펼친 끝에, 당군을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3000여 명에 이르는 전사가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당나라의 공세가 점점 격화되고, 전체적으로 고구려가 밀리는 형세가 되자 연개소문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보장왕의둘째왕자를 당나라에 보내는 등 양국간의 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나라는 이러한 연개소문의 화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설만철을 총관으로 삼아수군 3만여 명을 동원하여, 다음해 정월이 되자마자 공격을 재기하였다.
분명 이것은수군은 보조적인 역할만을 담당하고, 주력은 육로를 고집하던 기존의 고구려 원정방식과는 다른 전술이었다.
물론 고구려도 수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전력이나 경험을 비교해 볼 때 당나라 수군을 따라갈 수 없었다. 더구나 수전은 풍속과 파도의 영향을 받을망정 육지전 처럼 요새와 산악을 끼고 싸울수는 없다. 그리고 파도와 바람은 경험있는 자의 편이다. 그런 면에서 고구려는 수전을 통해 중국을 막은 일이 없었다. 그저 해로를 통해 고구려로 침략해 오면 육지 깊숙히까지 끌어들여 싸우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달리 말하면 육지까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상륙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648년에 벌어진 전투는 고구려에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해로를 통해 상륙한 3만명의 당군을 막기 위해, 고구려는 급히5천 보기병을 역산에 배치시켰지만 패하고 말았다. 이에 다시 고구려는 신감을 장군으로 삼아 1만명의 군대를 보냈지만 이마저도 패배하였다. 다만 그 이후 당군 3만명의 행적자체가 분명하지 않은데, 아마도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아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당태종은 이 같은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30만명이라는 대 병력을 모집하고, 1년치의 식량을 확보한 후 고구려에 대한 대원정을 시도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 계획을시행하기 앞서 649년 만철을 장군으로 삼아 해로를 통해 압록강 방면으로 침공을 감행하였다. 649년에 있었던 고구려 원정에 대한 당군의 규모는 정확치 않지만, 적어도 3만 ~5만 정도로 3년동안의 원정중 최대 규모로 보인다. 그것은 역사기록의 상세함이나, 고구려가 이에 대응하기 위해 파병한 군사 숫자를 바탕으로 대체적은 추측을 한 것이다.
만철이 목표로 삼은 것은 압록강을 지키고 있는 박작성이었다. 이 박작성만 점령하면 요동과 고구려 도읍을 분리시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요동반도 일대를 점령하는 일은 훨씬 수월해 질 것이다. 박작성주 소부손도 박작성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박작성이 당군에 포위되기 이전에 1만명의 병력으로 선제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중과부족으로 인해 수성전에 돌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박작성은 산악에 의거하여 만든 천연요새로 압록강이 둘러싸고 있어 대규모 공격으로 함락되지 않았다. 이렇게 박작성에서 당군의 주력병을 잡아두고 있는 동안, 고구려 장수 고문은 3만명의 군사를 모아 구원하러 왔다. 그런데 고문이 이끈 군대는 다시 한번 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안시성 전투 이후 고구려에 대한 기록은, 이상할 정도로 당나라의 승리에 대한 기록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647년의 기록도 그렇지만 648년과 649년 역시 당군 승전에 대한 기록밖에 없다. 이렇게 승전만 거듭한 당군이 아무런 대가없이 고구려 땅에서 물러난 다는 것은 아무리 전술상의 작전이라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결국 고구려 멸망의 당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당태종이 스스로 인정한 패전외의 모든 패전 기록은 누락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고구려의 가장 중요한 곡창지대인 요동지역이 점차적으로 전쟁지역화 되었다는 것과, 당군의 침투가 후방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실권자인연개소문으로서는, 권력계승이나 신라침공보다 당나라의 침공에 대한 방어전략 수립을 더 우선시 했어야만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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