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6202114105&code=960201  

고대 동북아 국경은 ‘선’이 아니라 ‘면’이었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한국역사연구회 학술회의… “발해와 당, 신라 완충지대 크게 형성”

영토를 두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 고구려·백제·신라 등 고대 국가들의 국경선은 ‘목책’이나 ‘성벽’ 같은 것을 흔히 떠올린다. 교과서에도 나라별로 색을 달리해 구분하면서 시기별로 달라진 영토의 넓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은 영토를 하나의 ‘선’으로 인식하는 오늘날의 상식을 기반으로 한 상상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역사연구회는 지난 18일 연세대에서 ‘한국 고대의 국경과 변경’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었다. 그간 논의가 고대국가들의 국경이 어떤 ‘선’에 존재했느냐에만 관심을 두었다면, 이번 학술회는 고대 국가들의 국경선이 ‘면’으로서 완충지대가 넓게 형성돼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한국외대 여호규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가 각자 다르게 국경을 인식했음에 주목했다. ‘광개토왕릉비’ 영락 6년조는 고구려의 정복 범위를 한강하류와 서해안 일대, 북한강 수계까지로 기록하고 있으나 백제 측 사료를 근거로 했음이 추정되는 <삼국사기>는 예성강-임진강 중하류로 한정해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군은 390년대에 한강하류-서해안 일대 및 북한강 수계를 통해 백제 도성까지 진격했으나 반격을 받고 다시 임진강 유역으로 퇴각했다. 한강 하류와 서해안 일대는 다시 백제 영역으로 편입되었으나 이는 완벽하지 못했다. 여 교수는 “ ‘광개토왕릉비’는 정복의 최대 범위를 기술한 것이지만 백제 또한 종래 신성시했던 횡악(북한산·도봉산) 일대에서 더 이상 어렵(왕의 사냥)이나 기우제 등을 거행하지는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백제는 자신들의 중심부였던 한강 북쪽지역이 ‘변경’으로 변모함에 따라 도성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경을 실제보다 위쪽에 설정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양국의 국경은 임진강과 한강의 분수령 지대에서 넓게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6세기 후반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했을 당시 고구려와의 경계도 이와 비슷했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박성현 연구원은 “이 시기 양국의 경계는 북한산 줄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양국의 최전방 거점은 임진강 북안과 한강 남안에 두어진 것으로 보이며 임진강과 한강 사이는 일종의 완충지대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박 연구원은 “자연지형이 느슨한 경계를 짓기도 했지만 6세기 초반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는 단순히 자연경계를 넘으면 상대국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최전방 거점과 관문을 통해 연결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구려 및 발해와 중국 본토의 국가들과의 국경선도 ‘선’으로 긋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성균관대박물관 김종복 연구원은 오늘날의 평안도 일대에 해당하는 한반도의 서북쪽에서 요동지역까지가 발해와 당, 신라의 완충지대였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발해는 757년 안동도호부의 폐지 이후 서쪽으로 진출하지 않고, 신라도 당에 대동강 이남을 인정받은 이후 북쪽으로 진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연구원은 “흔히 발해의 국경을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으로 보지만 신라와 발해는 주로 동북쪽으로 접경지대를 형성하였으며, 사신도 동쪽으로만 움직였다”고 말했다.

경희대 이정빈 강사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의 중국 요서지역이 수와 말갈·거란 등 유목민, 고구려의 3자 완충지대였다고 분석했다. 그는 “580년대 중·후반에서 598년까지 요서 지역의 대부분은 고구려와 수의 완충지대처럼 존재했다”며 “598년 수나라 문제가 30만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군량을 공급받지 못해 회군했다는 사실은 그 무렵까지 요서 지역에 수의 교통로와 거점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수와 고구려 모두 요서를 말갈·거란 세력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배력을 행사했다”며 “7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도 양국은 요수의 중·하류를 중심으로 서쪽에 설치된 양국의 군진을 중심으로 국경을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여호규 교수는 ‘선’이 아닌 ‘면’의 국경 의미에 대해 “현대와는 다른 고대 시기의 국경 개념을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동북아 영토분쟁에 대비할 수 있다”면서 “나아가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에서 국경을 어떤 요소부터 완화시킬 것인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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