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yahoo.com/historybook/articles/285054
백일간의 항전 안시성 전투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이세적으로 하여금 644년 음력 1월에 유주에 군사를 집결시켰고, 자신은 3월달에 정주에서 합류하였는데 총 병력은 20만 내외로 보인다. 그중 4만은 장량이 이끌고 바다 길을 통하여 비사성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며, 당태종 이세민은 본진을 이끌고 과거 수나라의 침공로를 따라 전진하였다.
그러나 3월달에 진격한 당나라 군은 요수를 통과하는 데에만 한달 가량의 시간이 걸렸고, 장량은 5월달이 되어서야 비사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당태종은 신성과 국내성의 보기병 4만 명을 격파한 후, 요동성에서 총력전을 펼친 끝에 12일 만에 점령할 수 있었다. 특히 주필산 전투로 알려진 안시성 인근의 산악전에서 고구려의 15만 군을 대파함으로써, 상당한 승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안시성 뿐이었다. 안시성 전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전투의 경과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이르면 음력 5월 말에서 유월 초순경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당태종은 고연수가 이끄는 15만 대군을 와해시키긴 하였지만, 그것은 전술상의 승리일 뿐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따라서 수만 명의 패잔병들이 건안성과 신성의 군사들과 합류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건안과 신성은 10만명에 이르는 총 병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후방에 대규모 병력이 배치되자, 당군으로서는 안시성으로 모든 전력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었다. 우선 그대로 진격을 감행할 경우 후방에서의 총반격이 예상될 뿐 아니라, 만약 요동성이 고구려 군에의해 탈환된다면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당한 당군은 꼼짝없이 포위당하고 말 것이다.
또한 당군은 안시성을 점령함으로써,고구려군 사이의 간격을 넓혀 둘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중국에서의 군수물자와 병력의 이동로를 확보할수 있을 뿐더러, 고구려 군의 연합체계를 무력화 시키는 2중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따라서 당군은 안시성을반드시 점령해야 되었다.
그러나 안시성은 당나라 군사의 한달간에 걸친 집중공격에도 전혀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삼국사기에는 안시성 성주가 기습작전을 펼치다가 수십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사실만을 집중 부각시켜, 마치 당군은 시종 승리를 거둔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극히 불합리한 서술이다. 수십만명이나 되는 대군을 교란할 목적으로 보내진 그들은, 처음부터 이미 목숨을 내어 놓은 결사대라 볼 수 있다. 또 그런 결사대의 희생으로 인해, 당군은 쉽사리 접근전을 펼치지 못하게 되어, 안시성은 상당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완벽하게 고립된 상황에서 공격측과 수비측 사이에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지구전을 펼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당군은 이 공수간의 공간을 좀 더 밀집시키기 위해 성의 동남쪽 모통이에 토산을 쌓았다. 그리하여 차츰 성벽으로 육박해 오자, 안시성 성주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성벽을 보다 높이 쌓아 올려 항전하였다.
그러자 당군은 대대적인 소모전을 펼쳐, 당군과 고구려군 사이에는 하루에도 6, 7회에 이르는 교전이 일어났다. 더구나 당군은 수만명의 군사들이 돌아가면서 싸웠기 때문에,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공격할 수 있었지만, 고구려군은 2교대로 싸우기도 군사의 숫자가 충분하지 못하였다.
또한 당나라는 각종 공성무기를 총 동원하여 안시성의 성벽과 성루를 여러차례 무너뜨리고 파괴시키기도 하였지만, 안시성은 다시 목책을 쌓아가며 그들의 공세를 막아냈다. 그렇게 한달간의 기나긴 공방전은 펼쳐졌다. 그러나 안시성의 철저한 수비태세에 밀린 당군은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전에 쌓았던 토산보다 훨씬 거대하고 높은 인공산을 쌓는 것이었다. 당태종은 그 일을 위해 무려 60일동안 50만명이나 되는 인력을 동원하였다. 그들이 부역에 동원된 인력이라 보았을 때, 안시성을 포위하고 있던 당군은 대체로 25만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안시성은 지원군이 전혀 합류되지 않았음으로, 2만명 내외였을 것이다. 안시성 성주는 그렇게 불리한 조건에서도 90일 이상을 지켜낸 것이다. 그런데 양측 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당군이 쌓은 흙산이 그만 무너지고 만 것이다. 전혀 기초공사를 하지 않은체 50일이란 단 시간내에 무너지기 쉬운 흙으로만 쌓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예견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무너진 방향이 안시성 성벽이었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고 50만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쌓은 흙산을, 안시성 백성들이 하루아침에 치울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 당군이 흙산의 붕괴로 이루어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수십만의 군대를 일시에 투입한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서 방어해야 되는 안시성 군민들은 더이상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흙산이 갑자기 무너지자 당황하기는 당나라 군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안시성 성주는 그 잠시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즉각 수백명의 결사대를 동원하여 우왕좌왕 하던 당군을 크게 격파한 후흙산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당군이 60일에 걸쳐 힘들게 쌓아놓은 흙산을, 안시성 성주는 단 하루만에 점령하고 만 것이다.
이에 크게 화난 당태종은 전군에 총 공격 명령을 내렸다. 흙산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는 3일동안이나 지속되었지만, 고구려군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안시성과 흙산을 지켜냈다. 이제 당태종은 퇴로를 걱정해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당태종은 요동성 등의 점령으로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였지만, 안시성 전투가 석달가량이나 지속되었기에 식량 부족 현상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추위가 시작되는 음력 9월로 접어 들었다.
당태종은 후퇴를 결심하게 된다. 재차 총력전을 펼친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고, 또 성을 점령한고 해도 성안의 물자가 남아 있을 리도 없다. 그리고 이미 겨울로 접어 들고 있지 않은가? 남은 병력이라도 보전하기 위해서는 후퇴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그리고 당태종은 예외적으로 안시성 성주에게 비단 백필을 주었다. 안시성 전투가 얼마동안 전개되었는지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비단 백필을 내려 준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안시성 전투도 백여일 정도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아무튼 당태종은 요택의 습지를 건너기 위해 많은 수레를 분해하여 임시다리를 만들었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상당량의 군수물자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갔다. 그리고 겨울 10월이 되어서야 철수를 완료하였지만, 그때문에 수만은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하였다.
이렇게 당태종의 1차 침공은 안시성의 분전으로 인해 결국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삼국사기에 나와 있지 않다. 그처럼 훌륭한 전투를 치루어 내고, 그처럼 위대한 승리를 이루어 낸 장군이 이름은, 아마도 당시에는 만천하에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삼국사기에는 전해지지 않는다고만 나와있으니.... 그것은 중국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할 수 밖에 없도록 기술된 당시 사관들의 그릇된 역사관점 때문이리라. 다만 그것이 김부식 단 한명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김부식 역시 통일신라 이후의 역사편찬서를 바탕으로 저술하였을 것이기에...
하지만 조선후기 실학자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와 송준길의 동춘당선생 별전에는 이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이라 전한다. 비록 역사서에는 제명되는 비운을 겪었지만, 역사는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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