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yahoo.com/historybook/articles/285232
그런데 그 계기는 재위 15년인 서기 406년 음력 12월에 갑자기 찾아왔다. 고구려에 대한 공격이 어려움을 깨달은 모용희는 보다 손쉬운 상대인 거란족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는데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퇴각 길에 고구려의 목저성(木抵城)을 기습 공격하였다. 아마도 고구려가 후미를 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작은 성과라도 올리고 돌아가야겠다는 과시욕이 함께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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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후연 원정
고구려와 후연의 관계
*광개토대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 무덤의 기본 형태는 장군총, 즉 장수왕릉과 같은 계단식 피라미드인데 워낙 훼손과 함몰이 심해일반 돌무지무덤으로 보입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현재 장수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공식적으로는 이 무덤이 광개토대왕릉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기원전 4세기가 시작될 무렵, 동방의 역사는 격렬한 분열과 무한경쟁시대에 돌입하고 있었다.
우선 중국은 280년 경 위 촉 오 삼국의 오랜 대립이 끝나고 사마씨에 의해 세워진 진(晉)국에 의해 잠시나마 통일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사마씨 정권은 정통성도 없었을 뿐더러, 조조의 사망한 후 혼란한 틈을 타 왕위를 빼앗았던 만큼 그다지 뛰어난 국가적 역량도 갖추지 못하였다.
따라서 4세기가 시작되자마자 북방계 유목민들은 폭풍처럼 일어나게 되었는데, 사마씨 정권은 별다른 활약도 보여주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고 말아다. 그러나 고구려는 달랐다. 고구려는 위나라의 관구검을 시작으로 비롯된 중국의 침략을 격퇴하였으며, 북방민족과의 싸움에서도 호락호락하게 밀리지 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근 100년간 지속된 북방민족들과의 대립에서 우세를 보였다고도 할 수 없다.
특히 선비족은 고구려와는 오랫동안 대립관계에 있던 유목민족으로, 337년 연나라를 개국한 이래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국내성을 함락시키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국은 고구려 원정에 지나치게 많은 국력을 소모한 탓으로, 막상 장안에 도읍을 둔 전진(前秦)국이 침범해 오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전진국은 중국통일을 꾀하며 동진원정을 단행하였지만 383년 비수의 싸움에서 패하면서, 전진국 지배 아래 있던 각 종족은 일제히 독립하여, 400년에는 9국이 분립하는 극도의 분열 상태를 나타냈다.
이러한 분열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용씨에 의해 선비족은 다시 연국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이후307년에 세워 진연국과 387년 세워진 연을 구분하기 위해 각기 전연과 후연(後燕)으로 편의상 나누어 부르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과 대립하였던 것은 모용수에 의해 건국된 후연이다.
광개토대왕은 초기에는 북방의 거란족과 남방의 백제원정에 치중하면서 남북방향으로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것은 근초고왕 이후 강성해진 백제의 힘과 언제든지 또 다른 유목세력으로 급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거란을 먼저 제압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주와 기주 등 중국의 동북방 일대를 차지하고 일취월장하는 후연을 쉽사리 선제공격할 수는 없었다.
요서를 둘러싼 두 나라의 전쟁
* 현재 북연은 전연이 아래쪽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북연은 말 그대로 연땅의 북쪽에 세워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연이 세워진 그 위쪽으로 올려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
이렇게 양국이 팽팽한 대립관계에 있었지만, 선제공격을 하였던 것은 후연이었다. 후연으로서는 지난날 고구려 원정 후유증으로 인해 결국 패망을 재촉하였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보다 분명한 승리를 거둘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후연의 왕은 직접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재위 9년만에 고구려가 거만하던 이유로 전쟁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신라에 침입한 왜국을 격퇴하기 위해 5만의 대규모 병력을 남방으로 보낸 때였다. 따라서 서쪽 전선은 일시적으로 군사력이 모자라게 되었고, 결국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때 빼앗긴 땅이 700여 리에 이르고 강제로 끌려간 민가만 해도 5천여호에 이른다 고고구려의 피해가 얼마나 극심하였는지 알 수 있다.
여러가지 기록으로 볼 때 광개토대왕이 처음부터 중국의 정세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어떤 이유로도 침략적 전쟁은 정당화 될 수 없고, 광개토대왕이 벌인 전쟁 역시 넓은 의미로 볼 때 대통일 전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후연에 대해서만은 다르다. 대등한 수준에서의 외교관계 체결을 거부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침입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간 그들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은 후연이 침입이 있은 지 2년만인 재위 11년에 적극적인 대공세 정책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이 빼어들은 칼은 예리하고 고구려 군대는 강하였다. 광개토 대왕은 단숨에 대릉하와 난하를 넘어 숙군을 치고 평주(平州)성을 점령하였다. 평주성이라면 지금의 북경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평주성을 지키고 있던 모용귀는 싸워 볼 생각도 못하고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재위 13년에도 후연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여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군이 후연의 허리부분을 가르고 들어오자, 후연 역시 국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응하였다. 그리고 국왕에 오른 인물은 지난 날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은 바 있던 모용희였다. 조심스럽게 기회를 엿보고 있던 모용희는 서기 404년이 백제와 왜국이 평양성을 공격하는 틈을 타 요동성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용희는 고구려가 자랑하는 난공불락의 요새 요동성에서 막히고 말았다. 요동성은 함락위기까지 가긴 하였지만, 모용희가 성을 완벽하게 무너뜨린 후에 자신과 황후와 함께 가장 먼저 수레를 타고 성을 넘겠다는 만용을 부려 결국 패배를 자초하고 말았다.
서기 404년은 광개토대왕으로써는 최대의 위기였지만, 평양성과 요동성에서 동시에 승리를 거둠으로써 위기를 탈 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후연을 원정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원정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국내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전쟁이란 아무리 불가피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수많은 희생이 뒤따르게 마련이고, 아무런 보상없이 목숨을 바쳐야 하는데 다수의 민중들에게는 언제나 꺼려지는 일이었다.
광개토대왕을 흔히 무력군주로만 묘사하고 있지만, 대왕릉비에 보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풍족하게 만들었으며 그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백성을 살핌에도 결코 소흘함이 없었던 왕이다. 따라서 대왕으로서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면서, 후연은기회만 있으면 고구려를 침입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반드시 정벌해야 한다는 원정의 당위성을 심어 줄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잃어버린 역사 후연 원정
그런데 그 계기는 재위 15년인 서기 406년 음력 12월에 갑자기 찾아왔다. 고구려에 대한 공격이 어려움을 깨달은 모용희는 보다 손쉬운 상대인 거란족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는데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퇴각 길에 고구려의 목저성(木抵城)을 기습 공격하였다. 아마도 고구려가 후미를 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작은 성과라도 올리고 돌아가야겠다는 과시욕이 함께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후연이 군대는 많이 지쳐 있고, 또 사기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군에 의해 대패하고 말았다. 이제 후연에 대한 원정에 대한 필요성은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평화정책을 펼친다 하여도 결국, 그들은 고구려 영토를 넘어 선제공격을 가하지 않는가?
그러나 후연은 극심한 내부 혼란 끝에 스스로 패망하고, 북연이 성립하게 된다. 또 고구려가 후연의 패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언급이 없다.
재위17년에는 북연과종족의 예를 나눔으로써 모용씨가 세운 연국과의 기나긴 대립은 마침표를 찍었다. 그것은 북연을 세운 모용운 일족이 고구려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용운은 원래 고양씨였지만, 모용보에 입양된 이후 치열한 왕위다툼 끝에 왕좌에 올라 북연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후연 원정에 대한 원정은 이루어 지지 않았으며, 더이상 유추할 자료는 없을까?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 17년에 나와 있는 기록은 미미하지만 유추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17년(407)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步軍)과 마군(馬軍) 도합 5만명을 파견하여, (....비문 내용이 지워져 알 수 없음)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벌이며, 그 밖의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성, □□□□□□성을 파(破)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대왕의 즉위년도가 삼국사기 보다 1년 더 빠르기 때문에, 능비의 17년이면 삼국사기에는 16년에 해당한다. 즉 재위 15년과 17년 사이의 잃어버린 1년에 대한 기록이다. 물론 이 기록에서 광개토 대왕이 어느 곳을 향하였는지를 예측할 수 있는 결정적인 부분이, 능비의 훼손 혹은 자연적인 마모로 인해 도저히 해석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백제에 대한 원정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후연에 대한 원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정적일 수도 있는 부분이 지워져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단정할 수는 없다.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 밖에는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기록은 후연에 대한 기록이라고 보고 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초년부터 이미 관미성을 확보하는 등 한강유역까지 50여성을 백제로부터 빼앗은 상태였다. 그런데 과연 제차 6여성을 더 빼앗는 다는 것은 백제의 성을 아무리 조밀하게 설정한다고 해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407년 광개토대왕은 군사 5만명과 함께, 요서지방을 넘어 후연의 주요 6성을 격파함으로써 대원정을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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