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menuCnt=30917&writeDate=20121106&kindSeq=1&writeDateChk=20120613

<72>역포위된 고구려군
唐 이세적군 1만 5000명 미끼 ‘삼면 포위’ 
2012.06.13

산위에선 당 태종 공격  후방선 장손무기 ‘진군’

안시성 앞을 흐르는 개울. ‘전당문’에 따르면 645년 안시성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 병사들의 피가 흘러 주변 개울이 붉게 물들었다고 기록한다. 김기동 제공

고구려군에게 포위된 이세적의 병력은 미끼였다. 작전은 그들의 초기 희생을 전제로 기획됐다. 장손무기의 정병 1만1000명이 산(山)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빠져나와 고구려군의 배후를 칠 때까지 이세적의 부하들은 죽어가면서도 그 자리를 지켜야 했다. ‘전당문’은 “처음에 (고구려군에 포위되어 몰려) 하나로 된 이세적의 진(陣)이 4번에 걸친 공격을 받았다(初爲一陣, 四拒勣軍)”고 하고 있다. 

어려움은 예상했지만 이세적의 진영이 고구려군대에 완전히 포위될지는 몰랐으리라. 장손무기의 정병이 도착하기 전에 이세적의 군대가 큰 타격을 입으면 모든 작전은 틀어지고 만다. 순간 당 태종의 염려는 하늘을 찔렀다(帝大恐). 장손무기의 군대가 다가오다 고구려군에 조기에 포착돼 요격을 당해도 마찬가지다. 작전은 그럴듯했지만 타이밍이 한번 빗나가면 참사로 이어진다. 

전날 산위에 올라가 정찰을 하던 당 태종이 그 다음날 날씨까지 예측하고 작전을 수립했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기상은 당 태종의 편이었던 것 같다. 이세적의 군대가 소모되어가는 시점에 날씨가 흐려지고 구름이 잔뜩 끼면서 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땅을 촉촉이 적실 정도는 아니었다. ‘책부원구’는 “그때 번개 치는 소리가 있어 아군(당군을 지칭) 위(威)를 도왔다(時有電雷助我軍威)”고 기록하고 있다. 마른하늘에 벼락 칠 확률은 낮다. 

북쪽 높은 산봉우리에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던 당 태종은 장손무기의 군대가 나타나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시선은 그들이 나타날 남쪽 길목에 고정돼 있었다. 그들이 다가오면서 일으키는 먼지가 보였다. 장손무기의 군대가 남쪽에서 나타나 서진하자 당 태종이 숨겨뒀던 수많은 깃발들을 들었다. 그리고 호각을 불고 북을 쳐댔다. 고구려 군대는 그의 등 뒤를 향해 달려오는 장손무기의 병력보다 소리가 나는 방향의 황제 깃발을 먼저 보았다. 

한참 이세적군을 학살하고 있던 고구려 군대의 일부가 산 아래로 내리꽂히는 당 태종의 군대를 막기 위해 나아갔다. 이세적 군대를 북쪽에서 압박하던 병력이 빠지자 포위가 일부 풀리기 시작했고, 고구려의 공세도 누그러졌다. 새로운 적의 출현 방향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고 낮은 지대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고구려 군대가 한발 늦었다. 

이어 배후 남쪽에서 먼지기둥이 확연하게 보이면서 남쪽에서 이세적 군을 압박하던 일부 병력이 또 빠졌다. 그들은 배후로 다가서고 있는 장손무기의 병력을 상대해야 했다. 포위는 완전히 풀렸고, 반전이 시작됐다. 이제 고구려군은 역으로 포위되고 있었다. ‘전당문’은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당 태종과 장손무기의 병력이 이르자) 저들(고구려군)이 3개로 나누어졌다(及此三分).” 

북쪽 산 정상에서 바로 내려온 당 태종 휘하의 군대는 싱싱했다. 돌아온 장손무기의 군대는 행군 피로는 있었지만 고구려군보다는 훨씬 나았다. 포위당해 있었던 이세적군의 피로가 가장 심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역전되자 사기가 올라 울분에 찬 반격에 들어갔다.

이세적의 병력에 대해 ‘욱기(勖騎) 1만5000명’이라 기록한 ‘책부원구’와 ‘보기(步騎) 1만5000명’이라 한 ‘구당서’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전술상 중요한 현상을 반영하는 단서다. ‘책부원구’의 찬자는 기병 1만5000의 출전 당시의 병종을 기록했고, ‘구당서’ 찬자도 출전당시 1만5000의 숫자는 알고 있었다. 다만 장창보졸(長槍步卒) 1만의 반격 결과를 기록하고 있는 ‘구당서’는 보병이 1만이고 나머지 5000은 기병으로 간주한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구당서’ 찬자는 기병 1만이 말에서 내려 보병이 되는 ‘기보(騎步)’ 복수 기능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641년 장창보병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훈련이 돼 있었던 이세적 휘하의 기병들이 설연타를 격파한 전투를 앞서 33회 글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고구려군에 포위당해 기동성을 잃었던 이세적의 기병 1만여 명이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장창보병의 대열을 지었다. 5명 중 1명이 말고삐를 지키면 나머지 4명은 보병처럼 앞으로 나가 싸웠다. 25%에 해당하는 2500명 정도가 뒤에서 말을 잡고 있었다고 본다면 나머지 2500명 정도가 빈다. 그들은 고구려군과 싸우다 소모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세적의 장창보병 1만이 모루가 되고, 당 태종과 장손무기의 기병이 망치가 되어 압박하기 시작했다. 고연수와 고구려 군대의 상당수가 장손무기가 의도적으로 벌려놓은 남쪽 ‘구멍’으로 달아났다. 

느슨한 포위망에서 빠져나온 고연수와 그 휘하의 3만5000명 고구려군들이 인근 산에 의지해서 진을 쳤다. 빠져나오지 못한 2만 고구려 병력이 당군의 공격을 받고 죽어갔다. 산위에서 그 장면이 보였다. 도와주지도 못하고 모두 소리만 쳤다. ‘책부원구’는 이렇게 전한다. “당군(我軍)이 고구려군(其黨類)을 공격하는 모습을 돌아보고(回望) 슬프게 부르짖으며 서로 불렀다(悲號相召), 그 소리는 심히 슬펐다(其聲甚哀)” 

이 순간 안시성에서 문을 열고 나와 당군을 쳤다면 이러한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까. 확실한 것은 안시성에서 포위돼 죽어가는 고구려 병사들이 목격됐고, 안시성의 지원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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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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