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키 마사오의 ‘생얼’...‘충성혈서’, ‘남로당’, ‘여성편력’
무소불위의 권력 휘두른 박정희의 또 다른 이름...남로당 가입했다 조직원 명단 제공하고 살아남아
정웅재 기자 jmy94@vop.co.kr  입력 2012-12-07 09:51:23 l 수정 2012-12-07 10:47:32

"외교의 기본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는 것이다. 충성혈서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알 것이다. 한국이름 박정희. 해방되자 쿠데타로 집권하고 사대매국 한일협정 밀어붙인 장본인이다."

지난 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최 대선 후보 TV토론회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앞에 두고 1970년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유신정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또 다른 이름 '다카키 마사오'를 언급했다.

외교정책 방향을 묻는 사회자의 공통질문에 대한 답변에서였다. 이 후보는 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좌경용공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며 유신독재 철권을 휘둘렀다. 뿌리는 속일 수 없다. 친일과 독재의 후예인 박 후보와 새누리당이 1년 전 한미FTA를 날치기 통과해서 경제주권을 팔아먹었다. 대대로 나라주권 팔아먹는 이들이야 말로 애국가를 부를 자격도 없다. 날치기 한 뒤에 애국가 부르면 용서되냐. 한미FTA 날치기 동참한 사람은 국정 책임지겠다고 하면 안 된다. 경제주권 포기하고 무슨 염치로 헌법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겠다는 취임 선서를 할 수 있냐"라고 일갈했다.

토론회가 끝나고 트위터 등 SNS에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박근혜 후보에게 '돌직구'를 던진 이정희 후보의 "다카키 마사오", "전두환 6억",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라는 등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특히,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중파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다카키 마사오'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를 정도로 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육사 생도 시절.(앞줄 오른쪽 끝이 박정희)
육사 생도 시절.(앞줄 오른쪽 끝이 박정희) ⓒ친일인명사전

일본군 장교 되기 위해 '충성혈서'까지 써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 혈서를 써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충성혈서'에 대한 조명도 다시 이뤄졌다. 1917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문경면의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박정희는 교사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1932년~1945년 일본이 중국 동북 지방에 세운 국가)의 군관에 지원했으나 탈락했다. 조갑제가 쓴 '박정희' 1권 - 군인의 길'에는 박정희가 교사를 그만두고 군인의 길로 들어설 결심을 하는 과정이 서술돼 있다. 조갑제는 박정희와 함께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유증선과 인터뷰를 해 당시 상황을 파악했다. 

유증선은 박정희가 충성 혈서를 쓰게 된 과정을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1938년 5월경이라고 생각된다.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였다. 박 선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일본 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박정희는 유증선에게 고향에서 면장을 하고 있는 형 박상희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래서 유증선은 형의 도움을 받아서 호적을 고칠 수 있지 않냐고 조언했다. 유증선은 박정희가 며칠 고향을 다녀와서 호적을 고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고민은 남았다. 신원조회를 하면 학교 기록과 호적이 틀려 말썽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유증선과 박정희는 어떻게 하면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 연구를 하고, 유증선이 손가락을 잘라서 혈서를 쓰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자 박정희는 즉석에서 행동에 옮겼다. 

박정희는 충성 혈서까지 작성해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했으나 탈락하고 만다. 당시 정황이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신문인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됐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박정희 편에 만주신문 기사 전문이 실려있다. 

다카키 마사오의 혈서 군관 지원을 소개한 1939년 3월31일 '만주신문'
다카키 마사오의 혈서 군관 지원을 소개한 1939년 3월31일 '만주신문' ⓒ친일인명사전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가 봉입(封入)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만주신문』 1939.3.31. 7면)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시에 소재한 제6관구 사령부에서 4년제 만주국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제2기생 선발 입학시험을 치르고 1940년 1월에 15등으로 합격했다. "긴 칼을 차고 싶은" 꿈을 이룬 박정희는 1940년 2월 문경공립보통학교를 그만두고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박정희는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입학했다.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 1944년 7월 만주국군 제6관구 소속 보병 제8사단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까지 제8단의 2개 대대가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일본군과 싸운 중국공산당 주력부대)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처자식을 두고 있던 박정희(앞줄 오른쪽 끝)는 1948년 이현란(앞줄 왼쪽 끝)을 만나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동거를 시작한다.
처자식을 두고 있던 박정희(앞줄 오른쪽 끝)는 1948년 이현란(앞줄 왼쪽 끝)을 만나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동거를 시작한다. ⓒ박정희(조갑제 저)

일본군 중위에서 광복군으로, 다시 육군 소위로 변신의 귀재?

만주국군 중위였던 박정희는 1945년 8월 광복(일본 패망) 당시 중국 싱릉에 부대와 함께 집결해 있다가 중국 군인들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다.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박정희는 베이징으로 가서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 평진대대의 제2중대장을 맡았다. 1946년 평진대대가 해산한 후 5월 초 천진에서 미국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3개월의 단기과정을 마치고 조선국방경비대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경비사관학교 생도로 재학할 당시 형 박상희가 대구 10월 사건으로 경찰에게 살해되는데, 이 사건을 전후해 남로당의 군 내부 조직원으로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군내 남로당 프락치를 적발하는 '숙군사업'이 진행되면서 박정희는 1948년 11월 11일 체포된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군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제공하고 '숙군사업'에 적극 협력한 점을 인정받아 19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면하고 '파면·무기징역·전 급료 몰수' 선고를 받았다. 1949년 4월 18일 형집행정지와 함께 군에서 파면된 후, 육군본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7월 소령으로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맡으면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처자식 두고 이화여대 1년생 이현란과 동거...여성편력도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와 육영수 결혼식 사진.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와 육영수 결혼식 사진. ⓒ박정희(조갑제 저)

그러나 박정희는 1950년 실연의 아픔을 겪으면서 술로 보낸 나날이 많았다. 박정희는 김호남과 결혼해 딸 박재옥을 두고 있었는데, 처를 탐탁치 않게 여겨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홀로 살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박정희는 1947년 가을 동료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난 이화여대 학생 이현란에게 마음을 뺐긴다. 이현란은 몸매는 날씬하고 얼굴은 이국적으로 생긴 미인이었는데 1948년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고, 약혼식까지 올리고 용산의 관사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박정희는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을 숨겼고, 이현란 몰래 본처 김호남과 이혼을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남편에게 설움을 많이 당한 김호남은 '당신도 당해 보라'는 심정으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던 차에 남로당 사건으로 박정희가 구속되고, 이현란은 박정희가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실망한 이현란은 1950년 2월 동거하던 용산 관사에서 짐을 싸들고 나가 박정희와 인연을 끊는다. 실의에 빠져 생활하던 박정희는 다른 여자를 소개받는데, 그가 바로 육영수다. 박정희는 김호남과는 이혼하고 1950년 12월 12일 육영수와 결혼했다. 모두 1950년 한 해에 벌어진 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임 중 화려한 여성 편력은 잘 알려진 얘기인데, 여성 편력은 이미 육군 초급 장교 시절부터 시작된 오래된 줄거리인 듯 하다. 

(*기사작성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과 '박정희'(조갑제 저)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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