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539323

 

고고자료로 본 백산말갈과 고구려의 책성
강인욱 (경희대학교)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제61호 2018, pp. 43-79 (37 pages)
 
 
문헌사에서는 고구려 성립 초기부터 멸망 직전까지 책성을 중심으로 연변지역으로 경영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실제 연해주와 연변 일대에서 전형적인 고구려의 흔적은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에 필자는 고고학적 자료에 기반하여 백산말갈의 형성과 고구려의 지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2세기경까지 북옥저는 읍루계통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올가문화로 존속했고, 관구검의 침략 이후 기존의 북옥저 계통의 문화가 와해되었다. 이후 4세기이후에 본격적으로 말갈문화가 등장했다. 관구검의 침략은 토착 사회에 큰 위기가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기존의 북옥저 계통의 문화(=크로우노프카문화)가 완전히 없어지고 고지의 방어성 취락과 철제 무기의 급증 등으로 대표되는 말갈문화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잡곡농경에 기반하여 평지에 마을을 이루는 옥저계 주민들의 생계경제 대신에 수렵과 채집을 병행하는 말갈계통의 문화가 연변과 연해주 전역에 확산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연변지역 진출 초기부터 멸망직전까지 이러한 토착문화의 독자성을 유지시키는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한편, 훈춘 고성촌 자료에서 보듯, 이 지역에 부여계 이주민이 들어와서 사원을 건설한 흔적도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 지역 토착민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를 건설하되, 성지, 사원지와 같은 거버넌스를 유지하는 집단은 부여계통의 이주민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6~7세기간에 고구려의 지배 과정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굴한 크라스키노 성지의 최하 문화층의 발굴로 설명할 수 있다. 크라스키노 성지의 주요 사용 시기는 발해시기이지만, 최하층의 존재로 이미 고구려 시기에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크라스키노 최하층에서 출토된 토기의 양상은 말갈계 토기보다는 고구려 계통의 일부 토기와 올가문화(=연해주 폴체문화)와 유사점이 크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바로 말갈계 문화가 일괄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 따라서는 폴체계의 문화계통이 지속적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연희 2년명 토기의 존재로 볼 때 책성의 설치에도 불구하고 연해주와 연변 일대는 지속적으로 주변지역과 교류를 하며 그 존재를 알렸던 것으로 보인다. 관구검의 군대가 철저하게 옥저세력을 파괴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독자적으로 북옥저-백산말갈로 이어지는 토착민의 물질문화가 책성지역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타인의 묘지처럼 이러한 토착문화의 강성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일부로서 강력한 소속의식을 계속 지니고 있었다. 즉, 말갈로 대표되는 고고학적 문화는 결코 하나의 민족집단이 아니었으며, 또 무조건 고구려/발해와 배치되는 세력이라 볼 수 없다. 말갈계 고고학적 문화 역시 시대와 공간적 맥락에 따라서 적극적으로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위한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삼강평원의 두막루-물길문제에서도 제기된 바, 극동지역의 두 민족집단의 계통인 부여-옥저-동예로 이어지는 예맥계와 읍루-말갈로 이어지는 퉁구스계는 서로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 받았다. 비슷한 상황을 책성-백산말갈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문헌에서 제시된 주민집단을 도그마화해서 해석에 집착하기보다 계속 증가하는 고고학적 자료와 비교할 때 한반도 북방의 민족사상이 조금 더 체계적이며 명확하게 보일 것으로 기대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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