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tem/level.do?levelId=ku.d_0001_0070_0030_0240&isViewType=detail 

 
철배산성(鐵背山城)
고구려문화유산자료 > 중국 > 요녕성 무순시(遼寧省 撫順市) > 무순현(撫順縣) > 철배산성(鐵背山城)
 
 
시대 : 고구려
 
위치(출토지) 
요녕성 무순시 무순현 장당향 고력영자촌 철배산 (遼寧省 撫順市 撫順縣 章黨鄕 高力營子村 鐵背山)
랴오닝청 푸순시 푸순시엔 장당샹 가오리잉즈춘 티에베이샨 (辽宁省 抚顺市 抚順縣 章党乡 高力营子村 铁背山)
 
유형 : 성곽>산성
 
형태사항
 
성의 둘레 : 4,612.5m(佟達, 1988; 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라는 기록, |  1.5㎞(孫進己·馮永謙, 1989; 陳大爲, 1995)라는 기록
 
면적 63,000㎡ : 내성 둘레 2,575m, 동서 직선 길이 1,210m, 내성 북벽 길이 1,212.5m, 북벽 높이 50~80m, 경사도 90°│내성 남벽 길이 1,362.5m, 수직고도 40~80m, 경사도 75°이상│내성 동벽 길이 30m, 높이 20m│내성 서벽 길이 60m, 내벽 높이 0.5~1.5m, 외벽 높이 30~70m│동위성 둘레 1,712.5m, 성벽 안쪽 높이 1~2m, 윗면 너비 1~1.5m│서위성 둘레 325m, 성벽 높이 2m, 너비 1.5m  , 20점 
 
 
조사내용
 
1930  와타나베 산조(渡邊三三/도변삼삼), 다카하시 쿄시로(高橋匡四郞/고교광사랑), 
高橋匡四郞, 1941 「소자하유역에서의 고구려와 후여진의 유적(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건국대학연구원연구기보(建國大學硏究院硏究其報)』2, 건국대학연구원(建國大學硏究院) 으로 발표함.
 
1958  무순시의 역사학자들이 산성과 그 주위를 여러 차례 조사하면서 후금(後金)의 계번성(界藩城)으로 확정함.
 
1979  리펑민/이봉민 등(李凤民/李鳳民 等)  
1984  무순시박물관(撫順市博物館)
3월에 장정옌(张正岩/張正巖/장정암), 리지췬(李继群/李繼群/이계군), 정천(郑晨/鄭晨/정신), 장보(张波/張波/장파), 통따(佟达/佟達/동달), 왕핑루(王平鲁/王平魯/왕평로), 주청(朱成/주성), 번양웨이(本杨威/本楊威/본양위) 등이 살이호성(薩爾滸城)과 더불어 조사를 진행함.
 
1984  무순시박물관(撫順市博物館) 10월에 산성 안에서 건물지 2곳을 정리함.
1986  8월 16일에 호소야 요시오(細谷良夫/세곡량부) 등이 조사함.
1987  10월 15일에 호소야 요시오(細谷良夫/세곡량부) 등이 조사함.
1988  9월 3일에 호소야 요시오(細谷良夫/세곡량부) 등이 조사함.  성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
 
 
구조특징
 
전체적으로 산성 북면은 가파른 절벽이고, 남면은 가파른 구릉임. 산에 올라 내려다보면 살이호성(薩爾滸城)보다 더 험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음.
 
혼하를 거슬러 후미의 수풀 속에 선착장이 있는데, 산성으로 올라가는 입구임. 폭 1m의 콘크리트 계단이 산 위를 향해 있음. 그 선착장의 계단은 관광용으로 산 정상을 돌기 위한 산책로로 건설되었다가 산 정상부의 사적보존을 위한 개발중단으로 사용되지 않음.
 
성은 산세를 따라 축조하였음. 내성, 동위성(東衛城), 서위성(西衛城)으로 이루어진 복곽식 산성임(푸순시사회학원/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여호규, 1999;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 2009). 평면은 불규칙형임.
 
철배산성의 내성·동위성·서위성은 동일한 산등성이에 가로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각 성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연계할 수 구조를 갖추고 있음. 내성은 남북이 험준한 지형을 갖추고 있음에 따라 동서 양단(兩端)의 방어에 중점을 두었는데, 동위성과 서위성이 양익(兩翼)에서 내성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였음. 비교적 넓은 동위성은 둔병성(屯兵城)이 되었고, 출병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네 개의 문을 설치하였음. 서위성은 소자하와 혼하 합류지점을 통제하면서 직접 적을 맞이하여야 했음. 내성은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고 적의 공격은 어렵고 수비는 용이한 지형에 위치함으로서 전체 성의 중추가 되었는데, 바로 이 내성에서 전투계획을 세웠고 응전할 수 있었음(佟達, 1988; 푸순시사회과학원/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산성이 위치한 산등성이의 지형이 다양하여 초벽장(峭壁墻)·토축(土築)·석파장(石坡墻)·토석혼축벽(土石混築墻) 등 성벽축조방식도 다양하게 나타남.
 
내성은 철배산 중단 주봉우리에 위치함. 내성은 험준한 산등성이에 축조함. 산등성이는 기복이 심한데, 감제고지(高点) 10여개와 암석이 갈라진 틈이 적지 않게 있음. 암석이 갈라진 틈과 지세가 낮은 곳에는 깬돌과 흙으로 메워 1m 너비의 통로를 만들었음.
 
내성의 둘레는 2,575m이고, 성의 동서 직선 길이는 1,210m임. 그 가운데 서쪽에서 1,120m의 구간은 대부분 산등성이임. 그 가운데 서쪽에서 1,120m의 구간은 대부분 산등성이임. 동쪽 끝 90m의 구간은 너비 18~20m의 평탄한 산등성이임. 남북 너비는 좁은 곳은 1m, 넓은 곳은 85m임.
 
동위성(東衛城)은 내성의 동쪽과 연접되어 있고, 주봉우리의 동쪽에서 남쪽으로 뻗은 주봉우리보다 낮은 산등성이의 움푹 들어간 대지에 축조함.
 
서위성(西衛城)은 철배산 서단 산봉우리에 위치함. 서위성 동쪽의 갑작스럽게 아래로 움푹 들어간 말 안장형(馬鞍形)의 지대는 내성과 서로 마주하고 있음. 남쪽으로 소자하구를 직접 통제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혼하 하곡을 내려다 볼 수 있음. 성내 지세는 서쪽이 낮고 동쪽이 높아서 2단의 대(臺)형태로 나타남. 성 바깥 서쪽 구릉은 약간 완만하고, 성 남측은 절벽임. 성지의 평면은 약간 정방형임. 살이호전투에서 적을 맞이했던 “길림애(吉林崖)”로 추정됨(통따/佟達, 1988).
 
성벽은 산등성이를 둥글게 휘감고 있음. 성벽은 지표면 40m 이상에 위치해 있는데, 최고 높이는 100m에 달함. 성벽은 청대에 중수된 것임.
 
내성의 북벽은 인위적으로 성벽을 축조하지 않고 절벽 낭떠러지를 자연성벽으로 삼았기 때문에 초벽장(峭壁墻)이라고 부를 수 있음(통따/佟達, 1988; 푸순시사회과학원/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여호규, 1999).
 
남벽은 산험장(山險墻)과 석호파장(石護坡墻)이 결합되어 있는데, 대부분 산험장임. 석호파장은 산비탈에 흙을 깎아서 인공적인 험준한 낭떠러지를 만든 후 다시 돌을 쌓아놓고 경사가 매운 가파른 절벽을 만들었음.
 
동벽은 호형(弧形)임. 석호파장임. 서벽은 호형(弧形)임.
 
“행궁(行宮)”에서 남쪽으로 “치”로 통하는 돌로 된 성벽을 쌓았는데, 길이는 42.5m, 너비는 1.5m, 남은 높이는 1m임.
 
동위성의 북부와 동부는 내성의 남벽과 같은 석파장임. 북부와 동부는 내성의 남벽과 같은 석파장임. 남부는 대지 가장자리를 따라 축조하였는데, 흙을 쌓아 심(芯)을 만들고 성돌을 벽체로 한 토석혼축벽임. 동위성의 동벽기단 아래에 쐐기형 돌로 쌓은 고구려 성벽이 있음(쑨진지/孫進己·펑용첸/谦馮永/馮永謙, 1989; 천다웨이/陈大为/陳大爲, 1995; 왕위랑/王禹浪·왕홍베이/王宏北, 2007).
 
서위성 성벽은 토축으로 땅을 파서 도랑(참호)를 만든 다음 외벽 바깥 구릉에 성돌을 박아서 쌓았음.
 
 
역사적 의미
 
철배산성은 청대에 중건되었지만 동위성의 동벽기단 아래에 쐐기형 돌로 축조한 고구려 성벽이 있는 등(쑨진지/孫進己·펑용첸/谦馮永/馮永謙, 1989; 아즈마 우시오/東潮·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 1995; 천다웨이/陈大为/陳大爲, 1995), 고구려성의 특징을 갖추고 있으므로 고구려시대에 시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음(여호규, 1999; 왕위랑/王禹浪·왕홍베이/王宏北, 2007). 반면 고구려의 성벽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입지 또한 고구려성의 특징을 갖추지 않았으므로 고구려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음(샤오징촨/肖景全·정천/郑辰/鄭辰, 2007).
 
철배산성은 명(明)의 변경과 15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등 명(明)과 후금(後金) 방어상의 천혜의 요지임(리펑민/李凤民/李鳳民, 1985)
 
산성은 산맥 돌출부를 선택하여 산성과 주변 산봉우리가 최대한 잇닿지 않게 하였고, 동시에 지표면과 산 사이의 고도차를 이용하여 산성의 세 면에 병풍작용을 할 수 있는 천연성벽을 형성시켰음. 또한 비교적 좁은 봉요부(蜂腰部) 혹은 지세가 낮고 평평한 곳에 인공적으로 높은 벽을 쌓거나 깊은 호를 파서 성과 외부를 완벽히 격리시킴으로서 산맥과 산성의 연결을 차단하였는데, 이를 통해 산성의 네 방위가 모두 격리되고 밀폐적인 방어시스템을 형성함. 계번성 동위성(界藩城 东卫城) 바깥에 부설된 2단 방수대(防守臺)와 인공호(人工壕)는 바로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주위의 산령(山岭)인 철배산의 연접을 차단하기 위함임. 이것은 산성이 독립적이고 완벽한 방어시스템을 갖추는데 있어서 중요한 조치였음(佟達, 1988).
 
철배산성은 거주용이라기보다는 전투용 산성으로 추정됨(細谷良夫, 1991).
 
위치비정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이마시니 하루아키(今西春秋)(1935), 다카하시 쿄시로(高橋匡四郞)(1941), 쑨진지(孫進己)·펑용첸(馮永謙)(1989), 천다웨이/陈大为/陳大爲)(1995), 여호규(1999) 등은 고구려 남소성(南苏城)으로 추정하고 있음.
 
이마시니 하루아키(今西春秋)(1935)은 남소성은 소자하와 혼하 합류지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살이호산성(薩爾滸山城)과 더불어 철배산성이 유력한 후보지가 될 수 있다고 봄.
 
쑨진지(孫進己)·펑용첸(馮永謙)(1989)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남소(南蘇)’는 『한서』지리지 현도군 고구려현조에 처음 나오는데,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고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南蘇水)가 서북으로 새외(塞外)를 경유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음. 요수가 대요수로 들어간다고 한 것으로 보아 소요수(小遼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의 혼하로 추정됨. 즉 남소수는 혼하와 가까운 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임. 또한 서북으로 경유한다는 새외는 신빈 고구려현(新賓 高句麗縣)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임.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남소수는 소자하(蘇子河)로 추정됨. 남소성은 진대(晉代)에 처음 보이는데, 『진서』재기(載記) 권9와 『자치통감』권 97에 ‘모용각(慕容恪)이 고구려 남소성을 차지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원 호삼성(元 胡三省)의 주(注)에는 ‘남소성은 남협(南陜)의 동쪽에 있다. 당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남소주(南蘇州)를 설치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한편 『한원』번이부(蕃夷部) 고려조에는 ‘남소성은 국(國) 서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기』에는 ‘신성(新城) 북쪽 70여 리의 산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요해총서본(遼海叢書本) 『한원』에는 내등호차랑(内藤虎次郎)의 발문(跋文)이 있는데, 『구당서』· 『신당서』의 고려전과 『요동행부지』를 근거로 해서 잡성(雜城)을 신성(新城)으로 정정하였다고 언급하고 있음. 이를 통해 『한원』원문에는 신성이 아닌 잡성으로 기록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즉 남소성 남쪽에 잡성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임. 또한 남소성이 ‘신성 북쪽 70여 리의 산 위에 있다’는 기록은 방위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함. 『자치통감』권96 성제 함강오년(咸康五年 339) 11월 호삼성(胡三省)이 주(注)에는 ‘신성은 고구려의 서비(西鄙)에 있는데, 서남으로는 산을 곁에 두고 있고, 동북으로는 남소·목저(南蘇·木底) 등과 접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음. 즉 남소성은 신성의 정북쪽에 있지 않고, 동북쪽에 있는 것임. 위의 분석을 종합해보면, 남소성은 남소수(소자하)에 있고, 신성(무순 북부)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데, 철배산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볼 수 있음.
 
여호규(1999)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고구려시기의 대중국 전쟁로를 살펴보면, 요동지역과 고구려 국내성 사이에는 신성(新城) - 남소성(南蘇城) - 목저성(木底城) - 창암성(蒼巖城) 등의 고구려 성이 위치한 것으로 나타남. 신성은 무순 고이산성으로 비정됨. 남소성의 명칭은 남소수라는 강명에서 유래하였는데, 남소수는 혼하의 지류인 소자하이므로 남소성은 소자하 연안으로 비정됨. 『한원』에 따르면 남소성이 ‘잡성(雜城) 북쪽 70리 산 위에 위치하였다’고 하는데(『한원』권30 번이부 고려조), 소자하가 신성 동북 또는 동남인 만큼 위의 기사는 ‘신성동북(新城東北)’의 오기와 누락으로 여겨지는 바, 남소성은 신성 동북쪽 70리(31~37㎞) 산 위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됨. 신성 동북쪽 31~37㎞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는 무순에서 32㎞ 떨어진 혼하·소자하 합류지점으로, 그 합류지점 동쪽에 바로 철배산성이 자리 잡고 있음. 철배산성이 좁고 긴 산마루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산 위’에 위치하였다는 문헌기록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음. 그러므로 철배산성이 남소성일 가능성이 높음. 이러한 가능성은 342년 전연(前燕)과의 전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음. 『위서』고려조에 의하면 전연은 ‘남협(南陕)으로부터 들어가서 목저(木底)에서 싸워 검(剑; 고국원왕)의 군대를 대파하였다’라고 함. 목저성은 요동방면에서 신성 - 남소성 다음에 위치한 고구려 성인데, 남협(南陕)에서 시작되는 교통로상에 존재한다고 파악됨. 
 
『자치통감』을 주석한 원대 호삼성(元代 胡三省)에 따르면, ‘남도(南道)는 남협(南陕)을 따라 목저성으로 들어간다(『자치통감』권97 진기19 함강 8년 10월조)’, ‘남소성은 남협 동쪽에 있다(『자치통감』권97 진기19 영화 원년 10월조)’, ‘목저성은 남소의 동쪽에 있다(『자치통감』권114 진기19 의희 2년 2월조)’라는 기록이 있음. 즉 남협은 남도(南道)의 출발점이고, 남소성은 ‘남협’의 동쪽, 목저성은 남소성의 동쪽에 각각 위치하였으며, 남도는 남협에서 목저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임. 이는 혼하·소자하 합류지점 동쪽에 철배산성이 있고, 동남쪽으로 소자하 연안이 펼쳐지는 지형과 일치함. 소자하 연안은 해발 500~1,000m의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협곡이고, 혼하 상류로(上流路)가 종전의 혼하 연안로를 계속 직진하는 북동향인데 비하여 소자하 연안로는 방향을 꺾은 남동향임. 아마도 소자하 연안로가 이전 경로와 방향이 다르고 협곡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남(동)향 협곡로의 입구’라는 의미에서 ‘남협’이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남소성은 345년에 처음 등장하고, 고구려가 혼하 방면으로 진출한 4세기 전반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됨. 그 뒤 신성, 목저성 등과 함꼐 요동에서 국내성 방면으로 침공하는 적군을 방어하고, 요동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중진(軍事重鎭)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고구려는 혼하·태자하 일대의 신성·양성·양곡(新城·梁城·梁谷) 등과 함께 남소성에서 왕릉 수묘를 위한 연호를 차정하는 등 지방지배 및 군사적인 방어역량을 강화함. 따라서 남소성 곧 철배산성은 요하유역의 다른 고구려성처럼 군사기능 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도 수행하였다고 추정됨. 다만 철배산성은 동서 방향의 좁다란 산마루에 위치하여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서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음. 이러한 점에서 철배산성의 동남쪽 15㎞에 위치한 신빈 오룡산성(新賓 五龍山城)이 매우 주목됨. 오룡산성은 둘레 약 2㎞의 포곡식 산성으로서 군사방어적 기능과 함께 거점성의 면모도 함께 갖추고 있음. 두 산성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상호보완적인 관계도 설정할 수 있다고 여겨짐.
 
통따(佟達)(1993)의 견해는 남협(南陜)설로 내용은 다음과 같음. 고구려의 남도와 관련하여 『위서』와 『진서』에 ‘남협으로 들어가 목저에서 전투를 벌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남협이 철배산성으로 추정됨. 철배산성은 영액하(英額河)와 소자하의 분수령이고, 남북교통로의 분야(分野)임. 소자하는 영액문(英額門) 남쪽에 있고 하곡 개활지대는 비교적 적다는 점에서 ‘협(陜)’의 의미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음.
 
佟達(1988)·撫順市社會科學院(1994)의 견해는 계번성(界藩城)설로 내용은 다음과 같음. 1619년 후금과 명의 설이호(薩爾滸)전투가 이루어졌던 계번성으로 추정됨. 계번성은 계번채(界藩寨)라고 부르는데, 건주여진 철진부(建州女眞 哲陳部)의 작은 산채(山寨)임. 계번(界藩)은 만주어인데, ‘하류가 합류하는 곳’이라는 의미임. 계번성 이전의 계번채는 건주여진 통일 전의 초기 산채이기 때문에 누르하치가 축조한 계번성보다는 규모나 축조 수준이 떨어졌을 것임. 서위성은 한 봉우리를 홀로 차지하고 있고, 성벽의 축조방법은 흙을 파서 해자를 만드는 방식을 채용하면서 돌은 일부구간에만 쌓아 보축하는 등 내성 및 동위성과 다름. 이러한 차이는 곧 시대적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위성에 보이는 간단한 성벽축조방식은 여진의 각 부가 통일되기 전의 수준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임. 이로 볼 때 계번성의 서위성을 계번채로 볼 수 있음. 계번채는 늦어도 1584년에는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자연환경
 
무순시에서 동쪽으로 32㎞ 떨어진 무순현 장당향 고력영자촌 대화방댐(大伙房水庫) 동쪽 철배산 위에 위치함. 신빈현 남잡목진 전만자촌(南雜木鎭 轉灣子村) 서쪽 5㎞ 지점에 위치함. 철배촌 정도(丁圖) 맞은편의 산 위에 위치함. 철배산성과 살이호산성(薩爾滸山城)이 소자하(蘇子河)를 사이에 두고(댐으로 인해 수몰된 것임)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데, 사이 간의 거리는 2㎞임. 서쪽으로 32㎞ 떨어진 지점에 무순시가 있음. 동남쪽으로 75㎞(리펑민/이봉민은 60㎞라고 기록함(李鳳民, 1985)) 떨어진 지점에는 후금(後金)의 도성인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이 있음.
 
1958년 대화방댐이 건설되면서 주변일대가 수몰되어 산성 소재지는 3면이 물로 둘러싸인 반도로 변모함. 대화방댐 건설 이전에는 철배산 남쪽으로는 소자하, 북쪽으로는 혼하가 흘렀고, 철배산의 서단에서 두 강이 합류하였음. 즉 철배산성은 혼하·소자하 합류지점 동쪽에 위치하고 있던 것임. 이와 같은 입지에 위치함으로서 혼하와 소자하 연안을 따라 여러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었음. 철배산성에서 혼하를 따라 내려가면 무순을 거쳐 요동평원으로 나아갈 수 있고, 혼하 상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휘발하 일대를 거쳐 부여 중심지였던 송화강 중류지역이나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혼강일대로 진입할 수 있음. 또한 동남쪽으로 소자하를 따라 나아가면 곧바로 혼강일대로 진입할 수 있고, 소자하~태자하의 산간로를 통해서 태자하 상류일대로 나아갈 수 있음.
 
산성이 위치한 철배산은 해발이 283.1m임. 산성은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는 산봉우리에 위치하면서, 동서방향으로 길고 좁음. 철배산은 동․중․서 세 개의 산봉우리가 있음. 서쪽 봉우리는 뾰족하고 남면은 험함. 중간 산봉우리는 좁고 길며, 양측은 가파름. 동쪽 산은 비교적 완만한데 동쪽으로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음. 
 
혼하 일대 성 분포도
 
소자하유역 제성지유적 견취도
 

철배산성 위치도
 
철배산성 주변 지형도
 

철배산성 평면도
 
 
유물정보
 
청색 전돌(靑磚) 1점, 암키와(板瓦) 1점, 못(釘) 1점, 철제 찰갑편(鐵札甲片) 1점, 철제 고리(鐵環/철환) 1점, 철제 탄환(鐵彈丸) 1점, 암막새(瓦當/와당) 1점, 기와(瓦) 1점, 청화자기편(靑華磁器片) 1점, 석환(擂石)9점
 
 
참고문헌
 
· 今西春秋, 「高句麗の南北道と南蘇·木底」『靑丘學叢』 22, 靑丘學會, 1935
· 高橋匡四郞,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期報』 2, 建國大學硏究院, 1941
· 李鳳民, 「淸入關前都城述略」『潘陽古宮博物館文集』, 1985
· 佟達, 「撫順後金界藩城和薩爾滸城調査」『遼海文物學刊』 1988-1, 1988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細谷良夫, 『中國東北部における淸朝の史跡』, 東北大學, 1991
· 佟達,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博物館研究』 1993-3, 1993
· 撫順市社會科學院, 「界藩城」『撫順地區清前遺跡考察紀實』, 遼寧人民出版社,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王禹浪, 「中國東北地區古城文化遺跡概述」『黑龍江民族叢刊』 1995-4,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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