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고학 논문 해제집"에서 "가물哥勿 고찰" (p014-015) 만 가져왔습니다
고구려 고고학 논문 해제집
가물哥勿 고찰
저자 : 량즈룽梁志龙 (본계시 박물관)
연도 : 1994 | 간행물명 『요해문물학간』2 『辽海文物学刊』2
연도 : 1994 | 간행물명 『요해문물학간』2 『辽海文物学刊』2
가물哥勿은 고구려의 성으로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모두 기록이 있으며 당대唐代에 처음 등장한다. 가물성哥勿城이 현재의 어느 성인지에 대해서는 통화현通化縣의 삼합보산성三合堡山城, 신빈현新賓縣의 전산호산성轉山湖山城, 흑구산성黑溝山城이라는 세 가지 견해가 제기되어 있고, 일찍이 진위푸金毓黻는 가물과 국내國內의 발음이 가까워 양자를 동일하게 보기도 했다. 필자는 가물성이 고구려 첫 번째 도성 흘승골성紇升骨城 즉 요령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 오녀산산성五女山山城이라고 생각한다. 조기 사서는 흘승골성으로 썼고, 만기에는 가물성이라 쓴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가물이 다물多勿에서 변화된 것이라고 보고,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삼국사기』에는 주몽朱蒙이 비류국沸流國을 굴복시켜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국왕 송양松壤이 계속 다스리게 했는데, 고구려어로 구토 회복을 다물이라 말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리왕琉璃王 2년(기원전 8)에는 다물후多勿侯 송양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송양의 작위명인 다물후의 다물은 지명으로 비류국의 국도였을 것이다. 역대로 신하에게 작위를 하사할 때는 대부분 지명으로 이름을 붙였다. 전국戰國시대 상앙商鞅은 상商의 땅에 봉해져 상군商君이라 불렸고, 한漢의 한신韓信 역시 제齊의 땅에 봉해져 제왕齊王이라 불렸다. 즉 주몽이 다물을 얻은 후 그 땅을 송양에게 다시 관리하게 하면서 다물후로 봉했던 것인데, 표면적으로는 송양에게 옛 영토의 소유권을 회복시켜 준 것이므로 고구려어로 구토 회복을 다물이라 한다는 말이 등장한 것이다.
다물이 가물이고, 동시에 흘승골성이다. 그런데 흘승골성은 본래 주몽이 건국한 국도인데, 어떻게 송양의 국도가 되는 것일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건국 초기의 역사 사실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주몽이 처음 정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곳은 흘승골성이 아니라 졸본卒本이었다. 또한 고구려 시조묘도 흘승골성이 아닌 졸본에 위치하고 있어 주몽이 창업한 땅이 흘승골성이 아니라 졸본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다. 연구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환인현 하고성자성지下古城子城址가 졸본성卒本城이라고 한다. 한 나라의 정복은 그 나라의 도성 점령에 방점이 있다.
주몽이 원래 졸본에 정착했을 때는 조건이 미비했으나 비류를 얻은 후에는 분명 기세등등하게 비류국 국도를 점령했을 것이다. 주몽 4년에 골령鶻嶺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는 것은 사실 비류국 국도 다물을 대규모로 보수 정비한 것을 의미한다.
그 이후 고구려 국도가 첫 번째 이동 즉 졸본에서 다물(흘승골성)로 옮겨가는 변화가 생겼던 것이다. 천도 시기는 분명 성곽과 궁실을 지은 후의 몇 년 이내였을 것이다. 주몽 6년(기원전 32) 가을 8월에 신작神雀이 궁정에 모였다는 기록은 바로 궁정 건축이 모두 완공되었다는 점을 의미하는 동시에 천도한 사실까지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구려는 새를 토템으로 하는 동이東夷 민족으로, 신작이 궁정에 모였다는 것은 주몽 집단이 골성骨城으로 천도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흘승골성이 비류국의 국도라고 보는 것이 절대 억측이 아님은 다음의 사료에서 증명된다. 『위서魏書』 「고구려열전」에는 주몽이 부여를 떠난 후 보술수普述水에서 3인을 만나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에 도달하여 정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주몽이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흘승골성이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 이 성에 살았던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대대로 왕이 되어 왔던 비류국 국왕 송양이었던 것이다. 『주서周書』에는 주몽이 “토우흘승골성土于紇升骨城”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문장에서 만약 ‘토土’를 ‘왕王’의 오기로 본다면 ‘흘승골성에서 왕이 되었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흘승골성이 주몽 건국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다시 증명하는 것이다.
오녀산산성과 하고성자성지는 모두 혼강渾江 우안에 위치하고 거리는 10여리로 전자가 상류, 후자가 하류에 자리 잡고 있다. 두 성을 각각 다물과 졸본으로 고증하면, 두 성의 지리 위치도 사료와 부합한다. 주몽이 졸본천卒本川에 와서 비류수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는 기록은 졸본이 비류수 옆에 위치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송양이 주몽을 만나, 대대로 왕이 되어왔고 땅이 작아 두 명의 왕이 있을 수 없다고 한 기록은 졸본이 비류국 영토 내에 위치하며 국도 다물과 가깝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비류수에 떠내려 오는 채소 잎을 보았다는 것은 졸본천과 비류국 국도 사이 거리가 매우 가깝다는 점을 증명한다. 실제 오녀산산성과 하고성자성지 사이 거리는 10여 리에 불과하여, 채소 잎으로 비류국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분석에 근거하면, 다물은 바로 흘승골성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훗날의 가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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