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tem/level.do?levelId=ku.d_0001_0070_0050_0210&isViewType=detail

 

온가요서산성; 각이찰아랍성; 하남산성(温家窑西山城; 覺爾察阿拉城; 河南山城)
 
 
다른이름 : 온가요서산성(温家窑西山城), 각이찰아랍성(觉尔察阿拉城/覺爾察阿拉城), 하남산성(河南山城)
시대 : 고구려, 명, 후금, 청

위치(출토지) : 
요녕성 무순시 신빈현 영릉진 온가요둔(遼寧省 撫順市 新賓縣 永陵鎭 温家窑屯)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시엔 영링전 (辽宁省 抚順市 新宾县 永陵镇 温家窑屯)
 
유형 : 성곽>산성
 
형태사항
외성 동벽길이 235m, 남벽길이 53m, 서벽길이 238m, 북벽에서 서단 성벽이 없는 21m의 평대와 휘감고 있는 성벽을 더해서 둘레가 715m라는 기록(촨보/传波/傳波, 1994)│
외성 북벽길이 220m, 동벽길이 236m, 남벽길이 58m, 서벽길이 248m, 둘레 760여m라는 기록(장더위/張德玉·장정옌/張正岩/張正巖·리롱파/李荣发/李榮發·단링/单铃/單鈴, 1996).│
내성 북벽길이 60m, 동벽길이 46m, 남벽길이 30m, 서벽길이 74.5m(傳波, 1994; 여호규, 1999)│내성 서벽길이 75m(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 1996)│
내성 전체길이 210.5m(傳波, 1994; 여호규, 1999; 왕위랑/王禹浪·왕홍베이/王宏北, 2007)│
내성 전체길이 211m(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 1996)│(다카하시 쿄시로/高橋匡四郞은 성의 규모에 대하여 동서 길이 약 60m, 남북너비 40m라고 했는데(高橋匡四郞, 1941), 내성을 가르키는 것으로 추정됨.) , 
5점 
 
 
조사내용
 
1998 무순시박물관(抚顺市博物馆)
여행개발과 맞물려 무순시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실시함. 발굴을 통해 니질의 홍색 호(壺), 단지, 철제 찰갑편, 철제 화살촉 등이 출토됨.
* 호(壺) : 병
 
1930년대  와타나베 산조(渡邊三三/도변삼삼), 다카하시 쿄시로(高橋匡四郞/고교광사랑) 발견함.
高橋匡四郞, 1941, 「소자하유역에 관한 고구려와 후여진의 유적(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켄코쿠대학연구원연구기보(建國大學硏究院硏究其報)』2, 켄코쿠대학연구원(建國大學硏究院)으로 발표함.
 
1990년 초반   무순시사회과학원(撫順市社會科學院) 촨보(传波/傳波/전파) 등(等)
혁도아랍성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이전창평지성(二砖廠平地城), 아화락성(阿伙洛城), 영릉후보동산성(永陵後堡东山城), 두도립자성(头道砬子城), 나가보자성(罗家堡子城), 위가보성(魏家堡城), 역마도반성(驛马道班城), 주자산성(珠子山城), 달자영성(达子营城), 두도보성(头道堡城), 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점장대성(点将臺城), 그리고 온가요서산성(温家窑西山城) 등 10여개의 후금시기의 성(漢, 고구려시기에 축조되어 후금시기에 계속 사용된 성 포함)을 조사함. 이들 성들은 혁도아랍성에서 가까우면 2.5㎞, 멀어도 10㎞ 안에 위치하고 있음.
 
 
구조특징
 
산성 내부는 동·남·서 세면이 높은 반면 개활지로 이어지는 북쪽은 비교적 낮음. 산성 북측에서 산성을 바라보면 포곡식 산성임을 확인할 수 있음. 평면은 표주박형이고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음.
 
성벽은 기복이 있는 산등성이 위에 축조함.
 
성벽축조와 관련해서 토석벽이라는 기록(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 1996), 북벽 인공축조구간은 토축이고 그 나머지는 토석혼축이라는 기록(傳波, 1994), 대부분 토석혼축이고 일부는 돌로 쌓았다는 기록(王禹浪·王宏北, 2007), 토축이라는 기록(高橋匡四郞, 1941)이 있음. 또한 흙을 쌓고 그 위에 돌을 쌓는 축조방법이 고이산성 성벽과 유사하다는 기록도 있음(사오징취안/초경전/肖景全·정천/鄭辰/정진, 2007).
 
외성성벽은 자연 산세를 이용하면서 ‘凹(요)’형이 드러남. 내성을 감싸면서 축조되었고, 성벽 길이는 113m임. 외성 북문 서단은 성벽이 없는 평대(平臺)임. 평대는 길이 21m, 바깥높이 2m임. 문 동쪽에는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벽이 있는데 남은 높이는 1.5m임. 북문 동쪽에 남북방향의 벽이 있이 있는데, 북벽 동단의 27m 지점에서 북벽과 만남. 성문 안쪽의 성벽은 반호형(半弧形)인데 벽의 길이는 88m이고, 높이는 2m임. 외측 높이는 7m임.
 
서벽과 관련하여 북단에서 남단으로 150m 이르는 구간은 외호형(外弧形)이 드러나는데 성벽 안측 높이는 2m, 외벽 높이는 3m, 정상부 너비는 1~1.5m임. 서벽은 전체적으로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음. 서벽 북단에서 남단으로 80m 지점 성벽 바깥에서는 흙을 파서 성벽을 축조한 흔적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음.
 
남벽은 산등성이 위에 축조되어 있음. 동벽은 산등성이 위에 축조되어 있음. 남아 있는 높이는 1~1.5m임.
 
내성은 산성 남부의 높은 대지 위에 축조함. 서벽은 반호형(半弧形)임. 성안 동부에는 초재니(草梓泥)의 홍소토(紅燒土)가 많이 쌓여 있음. 성 바깥 북쪽 구릉 동부에도 소토가 많이 쌓여 있음. 성 안의 ‘U’자형 골짜기는 북문과 연결됨.
* 초재니(草梓泥) : 草 풀초, 梓 가래나무 재, 泥 진흙 니
소토(燒土) : 논밭의 겉흙을 긁어모아 그 위에 마른풀이나 나뭇조각을 놓고 태우거나, 철판 위에 흙을 펴 놓고 불을 때어 살균하는 토양 소독법.
 
 
역사적 의미
 
산성이 위치한 지세와 성벽 축조방법은 고구려의 특징을 갖추고 있으므로 고구려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산성은 명·청대에도 계속 사용되었음(王禹浪·王宏北, 2007). 특히 환인지역에 거주하던 건주여진(建州女眞)이 1433년과 1437년 조선의 침략을 받고, 1438년 소자하 방면으로 피신하여 아화락촌 동쪽의 호란합달(呼蘭哈達; 지금의 烟突山) 아래에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이 무렵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음(傳波, 1994).
 
성곽 규모로 볼 때, 영릉진 일대 전체를 관장하는 핵심성으로 보기는 어렵고, 거점성 주변의 위성산성으로 추정됨. 영릉진 분지에 위치한 영릉진고성·비아랍성, 이들의 북쪽에 위치한 나가보산성(羅家堡山城)·두도립자산성(頭道砬子山城)·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서쪽에 위치한 온가요산성(溫家窯山城)·아화락성(阿伙洛城) 등의 위치관계와 규모를 고려하면, 온가요산성은 대체로 영릉진고성·비아랍성의 소형위성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무순시 사회과학원이 불아랍성을 고찰할 때, 지표하 0.3m 지점에서 도자 접시(瓷碟)를 발견하였는데 온가요서산성에서 출토된 청화도자완(靑花瓷碗)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大明宣德八年’이라는 명문이 있었음. 또한 도자접시(瓷碟锔)에는 철제 못 4개가 있었는데, 아마도 당시에는 진귀하고 희귀한 기물이었기 때문에 깨지면 고쳐서 사용한 흔적으로 볼 수 있음. 그러므로 이 기물을 사용하는 사람은 대호현귀(大户显贵)임(傳波, 1994).
 
산성은 후금대 육조성(六祖城) 가운데 하나임. 육조성은 혁도아랍성을 중심으로 그 성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위성성(衛星城)임. 5개의 성은 혁도아랍성으로 통하는 골짜기(溝谷)의 요충지를 통제하고 있는데, 험준함을 이용하여 쌓았고 수렵 및 농경생활을 영위하는데도 유리함. 또한 각 지역을 차지하면서 성들끼리 서로 호응하면서 지원함으로써 방어력을 더욱 강화하였음. 주위의 그 나머지 10여개의 후금의 성은 ‘육성십이처(六城十二处)’의 ‘십이처(十二处)’가 됨(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 1996).
 
위치비정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통다(佟達/동달)(1993)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온가요서산성은 무순·신빈·본계로 통하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음. 사서를 보면 당군이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倉巖) 순으로 점령하였다’는 기사가 보임. 남소는 신빈현 상협하향 오룡산성(上夾河鄕 五龍山城), 목저는 목기진(木奇鎭) 동남의 평지성으로 추정됨. 이를 고려하면 온가요서산성이 창암성으로 가장 유력함. 대부분의 학자들은 온가요서산성에 대해서 육조성 가운데 하나로, 청 태조의 증조부 흥조 복만(興祖 福滿)의 장자인 덕세고(德世庫)가 살았다는 각이찰(覺爾察)로 추정함(肖景全·鄭辰, 2007). 高橋匡四郞(1941)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성이 위치한 지점은 『정도만주실록(丁度滿洲實錄)』도기(圖記)에 보이는 각이찰성에 부합되므로 각이찰성으로 추정됨. 한편 실록의 도기(圖記)에는 목성채(木城寨) 뿐만 아니라 다른 성채들을 모두 평지에 그렸고, 그 곁에 산을 그리고 있음. 이것은 성채를 산 위에 그리는 것이 곤란하여 편의적으로 그린 것이거나 성지가 평지와 가까운 작은 대강(臺崗)을 이용하였으므로 평지로 간주해서 그렸을 가능성이 있음.
 
촨보(传波/傳波/전파)(1994)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일부 학자들은 온가요서산성에 대해서 각이찰로 추정하고 있음. 성의 규모·구조·특징·방위·거리 등을 고려하면 일리가 있음. 『각이찰씨보서(覺尔察氏谱書)』에는 선인(先人)과 태조황제의 원자(院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위치하였다고 기록됨. 
* 원자(院子) : 집 가운데 마당
 
온가요서산성은 혁도아랍성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함. 또한 온가요성에서 출토된 명대 관요자완(官窑瓷碗)은 성안 거주자에 대한 신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반 백성은 아님을 알 수 있음. 복만(福滿)의 여섯 자손은 소자하 유역의 6대 수령으로, 명관요세자(明官窑細瓷)를 사용할 수 있는 신분임. 다만 설명이 되어야 하는 점은 『만주실록』의 시의도(示意圖)를 보면 각이찰성과 그 서부의 산 사이는 가깝지 않고 중간에 비어있는 곳(空地)이 있는데, 산비탈에 축조된 것이 아닌 평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음. 만약 이 점이 성립될 수 있다면 각이찰성은 이전창평지성지(二砖廠平地城址)일 가능성도 있음.
* 관요자완(官窑瓷碗) : 관립사기소 사발
 
축조연대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佟達(1993)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온가요서산성은 고구려 창암성으로 추정되는데, 창암성은 당대 이전 문헌에는 보이지 않음. 남소성과 목저성보다는 늦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대 혹은 그 이전으로 추정됨. 肖景全·鄭辰(2007)은 출토된 토기로 보아 성의 축조연대를 고구려 후기로 추정함.
 
 
자연환경
 
신빈현 소재지에서 약 23㎞ 떨어진 영릉진 남쪽 온가요둔의 서쪽 산(西山; 각이찰아랍산) 위에 위치함. 산성이 위치한 영릉진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이지만, 북쪽의 초창하(草蒼河)·협하구(夾河口), 남쪽의 이도하가 소자하와 합류하면서 비교적 넓은 충적평지를 형성하고 있음.
 
산성 동북쪽 구릉아래는 온가요둔보(温家窑屯堡)임. 산성 동쪽 구릉아래에는 환인~영릉진 도로가 지나가는데, 신빈 만주족자치현 제2전창(新宾满族自治縣第二轉廠)임. 도로 동쪽의 평지 한복판에는 영릉진고성이 있음. 산성 북쪽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소자하가 있고, 소자하 건너편에는 신빈~심양 도로가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음. 영릉대교(永陵大橋)를 통해 소자하를 넘어가면 영릉진임. 동쪽으로 3㎞ 떨어진 지점에 혁도아랍성(赫图阿拉城)이 있음. 산성 동남쪽으로 비아랍성(費阿拉城)이 있음. 산 정상에 서면 서북쪽으로 하원(夏园)과 청영릉(清永陵), 북쪽으로 영릉진시가(永陵镇市街), 동북쪽으로 가화(嘉禾), 동쪽으로 혁도아랍성(老城), 동남쪽으로 비아랍성을 볼 수 있음.
 
산성은 험한 곳에 위치하며 사방의 교통을 통제할 수 있음.
 
산성은 동서로 길게 뻗은 연돌산(烟突山) 산줄기의 동북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서북 끝자락에 위치한 아화락촌산성(阿伙洛村山城)과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음.
 
산성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소자하가 있는데, 그 양안에는 좁고 기다란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음.
 
산 동쪽은 비교적 가파른 낭떠러지임. 성 남면은 연돌산 산줄기가 펼쳐져 있어 험준하고 가파름. 서쪽에는 산언덕이 연이어 있는데, 이 산언덕과 연돌산이 서로 접해 있음. 북쪽은 완만한 구릉으로 점차 개활해짐. 전체적으로 동북과 서북방면은 개활지로 이어지는 반면, 서남 방면은 연돌산 산줄기가 천연장벽을 이루고 있음.
 
 
유물정보
 
청화도자완(靑花瓷碗) 3점, 호(壺) 1점, 단지(罐) 1점, 철제 찰갑편(鐵札甲片) 1점, 철제 화살촉(鐵鏃) 1점
 

소자하 일대 성 분포도
 

 

영릉진 주변 성 분포도

 

각이찰성 주변 지형도
 
 
참고문헌
 
· 渡邊三三, 『增訂 撫順史話』, 撫順新報社, 1938
· 高橋匡四郞,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期報』 2, 建國大學硏究院, 1941
· 佟達,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博物館研究』 1993-3, 1993
· 傳波, 「六祖城」『撫順地區清前遺跡考察紀實』, 遼寧人民出版社, 1994
· 張德玉·張张巖·李榮發·單鈴, 「“寧古塔”與六祖城考辨」『遼海文物學刊』 1996-1, 1996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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