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랍성; 불아랍성; 이도하자구노성(費阿拉城; 佛阿拉城; 二道河子舊老城)
 
 
시대 : 고구려, 후금(後金)
위치(출토지) 
요녕성 무순시 신빈현 영릉진 이도하자촌(遼寧省 撫順市 新宾縣 永陵鎭 二道河子村)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시엔 영링전 얼다오허즈춘 (辽宁省 抚顺市 新宾县 永陵镇 二道河子村)
 
유형 : 성곽>산성
 
형태사항
외성 둘레 5,660m, 내성 둘레 960m(撫順市社會科學院, 1994)(『盛京通志』에는 ‘성 쪽에서 성의 서남쪽까지 9리 90보’라고 기록되어 있음. 『建州纪程圖記』에는 외성 주위는 10리, 내성 주위는 마장(馬場) 2개 정도라고 기록됨.) 
둘레 5,000m(國家文物局, 2009)│외성 성벽 총 길이 5,660m, 순수 인공벽 길이 3,390m, 고산험장(高山险墙) 길이 900m, 자연 초벽장(峭壁墻) 길이 1,370m, 성벽 높이 0.5m~1m, 성벽 너비 1.20~1.50m  
10점 
 
 
조사내용
 
1939 이나바 이와키치, 다카하시 쿄시료 등 (稻葉巖吉/도엽암길, 高橋匡四郞/고교광사랑 等)
청 태조 누르하치(奴爾哈齊/노이합제)가 허투알라(赫圖阿拉城/혁도아랍성)으로 도성을 옮기기 전인 퍼알라성/비아랍성에 거주했던 때, 조선의 신충일(申忠一)이 비아랍성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비아랍성에 대한 기록을 남겼음. 그 원문·원도(原文原圖)를 기본으로 비아랍성에 대해 탐사·발굴하고, 그 개략적 보고서를 작성함. 원문원도의 해설은 도엽암길, 실제 발굴보고는 고교광사랑이 담당함.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巖吉), 1939 「흥경이도하자구노성(興京二道河子舊老城)」『만주사학(滿洲史學)』3-2 으로 발표함.
 
1941 이나바 이와키치, 다카하시 쿄시료 등 (稻葉巖吉/도엽암길, 高橋匡四郞/고교광사랑 等)
 
1979 심양고궁박물관(瀋陽故宫博物院) 티에위친(鐵玉欽/철옥흠), 선창지(瀋長吉/심장길)) 시굴 등 여러 차례 조사를 진행함.
 
1986 호소야 요시오 등(細谷良夫/세곡양부 等)
8월 15일에 현지를 답사하고 간략한 보고서를 작성함.
 
1987 호소야 요시오 등(細谷良夫/세곡양부 等)
10월 13일에 현지를 답사하고 간략한 보고서를 작성함. 성문물보호단위(省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
 
2000년대  사오징취안(肖景全/초경전), 정천(鄭辰/정진)
성을 여러 차례 조사하였으나, 성 안에서 고구려시기의 유적과 유물을 찾지 못함.
 
 
구조특징
 
비아랍성(費阿拉城)은 이도하자구노성(二道河子舊老城) 외에 불아랍성(佛阿拉城)이라고도 부름. ‘불아랍(佛阿拉)’은 만주어, ‘불(佛)’은 한어(漢語)로 ‘진구(陳舊)’라는 뜻이고, ‘아랍(阿拉)’은 낮은 혹은 평평한 산언덕을 의미함. 즉 비아랍성은 ‘구성(舊城)’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음. 1621년 4월 후금은 요양으로 천도하였고, 8월에는 동경성을 축조하였는데, 그 이후부터는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은 구성(舊城), 불아랍성(佛阿拉城)은 노성(老城)이라고 불렀음.
* 진구(陈旧/陳舊) : 낡다
 
성벽 위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고 주변은 밭으로 개간되어 있음.
 
비아랍성은 외서와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음(푸순시사회과학원/撫順市社會科學院, 1944;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 2009). 외성은 서문에서 남위벽(南衛壁)에 이르고, 내성은 외성의 동벽 중단에서 시작하여 외성 북벽과 하얼사산(哈尔萨山/哈爾薩山/합이살산) 서북쪽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 남벽 중단에 이르는 구간에 축조되었음. 한편 일본측 보고서에서는 외성과 내성 외에 외성 서북벽 안쪽에 외성 북벽 중단과 서벽 중단을 잇는 동북~서남방향의 차단벽을 중성으로 설정하고 있음(건국대학연구원/建國大學硏究員, 1939; 아즈마 우시오/東潮·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 1995). 조선 사신 신충일(申忠一)이 1595년에 비아랍성을 방문한 후 기록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는 내성, 외성, 목책성이 있고, 목책 안에는 노추(奴酋)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함. 외성에는 추첩(雉堞)·사대(射臺)·격대(隔臺)·호자(壕子), 내성에는 추첩(雉堞)·격대(隔臺)가 있었고, 성 위에는 망을 보는 판옥(板屋)이 설치되어 있는데, 개(盖)가 없고 사다리가 있었다고 함(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 노추(奴酋) : 건주위(建州衛) 야인(野人)의 추장을 가볍게 이르는 말.
 
내·외성 두 줄기 성벽의 기초는 모두 산세 방향을 따라 축조하였기 때문에 평면은 불규칙형이 드러남. 외성벽에는 순성(巡城)할 수 있는 길이 있음. 그 가운데 자연적인 산등성이를 이용한 구간은 단지 보행순시(歩行巡视)할 수 있을 뿐임.
 
해발 375m인 합이살산에서 동북과 서북방향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의 자연지세에 따라 성벽을 축조함. 성벽의 구조는 내부에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흙을 쌓은 석축임(건국대학연구원/建國大學硏究員, 1939;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 2009).
 
남벽은 남쪽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되어 있는데, 자연적인 험준함을 이용한 산험장(山險墻) 외에 토석벽(土石墻)이 축조되어 있음. 이후 북쪽으로 뻗어 나가는데 순산척(纯山脊)에 축조된 성벽의 구간 길이는 1,370m임. 그 아래에 접해 있는 토석축 북벽은 길이가 1,100m이고, 남쪽으로 꺾여서 서벽과 연결됨.
* 산험장(山險墻) 
* 순산척(纯山脊) : 능선?
 
불아랍성 내성벽의 기초는 기본적으로 계곡의 자연형세를 따라 축조되었는데, 모두 토석으로 축조함. 전체 길이는 960m임.
 
1939년 조사 때에는 성의 서북쪽, 즉 이도하자 부락에 인접했던 외벽이 잘 남아 있다고 함(건국대학연구원/建國大學硏究員, 1939). 1939년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 보고서에서는 외성벽은 견고하고, 높이는 35m이며, 기저의 폭은 7~11m라고 기록함. 중성벽은 외성벽에 비하여 견고하지 않고, 높이와 폭 모두 외성벽의 반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함. 내성벽은 중성벽에 비하여 견고하고, 파괴된 부분도 적어 양호한 상태를 보여준다고 함.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 의하면 외성은 먼저 돌로 3척 높이 정도 쌓은 후 그 위로 연목(椽木)을 까는 방식을 반복하여 10여척 높이의 성벽을 구축하였고, 외벽에는 진흙을 발랐다고 함. 내성 또한 외성과 같은 방식으로 성벽을 축조하였다고 함. 외성 아래너비는 최대 4~5척, 외성 윗너비는 1~2척, 내성 아래너비는 최대 7~8척, 내성 윗너비는 1~2척이었다고 함. 위와 같은 성벽축조방법을 비아랍성에서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흥경(興京)부근의 민가에 있는 성벽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함(건국대학연구원/建國大學硏究員, 1939). 비아랍성에 보이는 토석으로 기초를 다지고 나무를 교대로 쌓아 올리는 축성방식은 ‘항축포연식축법(夯筑布椽式築法)’이라고 부름. 목연(木椽)을 다진 흙 사이에 쌓으면 연접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작용을 하면서 벽체의 품질을 향상시켜 성벽의 견고함을 증강시킴. 해당지역의 자연자원조건을 이용하여 그 지역의 실정에 맞는 알맞은 재료로써 성을 쌓는 방법은 건주여진(建州女真) 축성방법 가운데 하나임(푸순시사회과학원/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 연목(椽木) = 목연(木椽) : 서까래. 마룻대에서 도리 또는 보에 걸쳐 지른 나무.
 
성내에는 후망옥(候望屋), 한왕전(罕王殿), 서이합제(舒爾哈齊) 거주지 등이 있음(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 2009).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 의하면 내성에는 100여가, 외성에는 300여가, 외성 바깥 네 면에는 400여가가 있었고, 내성에는 친근족(親近族)이 살았음. 외성에는 장수들과 족당(族黨), 외성 바깥에는 군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함.
* 족당(族黨) = 족속(族屬)
 
1939년 조사 때, 8기의 건물지를 발견함. 이 가운데 5기의 건물지는 내성 서북모서리에 위치하는데, 경관상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부락민 사이에 ‘한왕전(汗王殿)’라고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누르하치(奴爾哈齊/노이하제) 일가의 거처지로 추정됨. 이 같은 가정이 맞다면 그 동남쪽에 동생일가의 거처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땅이 평평하고 초석·벽돌·기와가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추정을 뒷받침할 수 있음.
 
건물지들은 모두 흙 속에서 발굴되었고, 초석부는 항부(炕部)에 도달함. 각 건물지들은 넓이는 다르지만 구조에는 큰 차이가 없음. 초석부는 4~5㎝ 전후의 돌을 쌓았는데 대부분 높이는 30~35㎝, 폭은 약 1m임. 기초부에는 벽돌로 만든 벽이 계속되고 있음. 항부(炕部)는 벽돌로 제작되었는데 가로방향으로 쌓아 사용한 벽돌은 32×15×8.5㎤의 흑색벽돌임. 연도는 건물지마다 그 수를 달리하지만 연도 1줄의 폭은 모두 약 25㎝임. 항벽(坑壁)의 두께는 벽돌 한 개인 것(15㎝), 벽돌 두 개인 것(32㎝), 양자를 혼용한 것으로 세 종류가 있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기저부의 2열~3열 뿐임. 벽돌과 벽돌 사이에는 모두 진흙이 붙어 있는데 회반죽을 사용한 것임. 출토된 벽돌과 기와는 무문무유(無文無釉)가 대부분을 차지함. 일부 채와(彩瓦)가 있음. 토기편은 대부분 명대 청와(明代 靑瓦)임. 성 안이 개간되면서 초석, 벽돌과 기와, 토기편 등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음(建國大學硏究院, 1939). 비아랍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비교적 많은데 명대 벽돌, 와당, 청화자기편, 자기편, 백색 절구 등이 출토됨. 그 가운데 서이합제 거주지에서 출토된 명대 접시에는 아름다운 도안이 그려져 있는데 얇은 철국자국(铁鋦子锔)으로 갈라진 부분을 붙였음. 국함(锔含)공예는 매우 정교함. 수공업 기술수준은 전반적으로 매우 높음. 바닥에 ‘대명선덕팔년(大明宣德八年)’이라고 적힌 자기가 있는데, 명대 관요산품(官窑産品)임을 알 수 있음. 벽돌 가운데 연화문벽돌이 출토됨.
* 관요산품(官窑産品) : 국립사기제조소 제품
 
고구려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함(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역사적 의미
 
비아랍성은 후금의 누르하치가 1587년부터 1603년 혁도아랍성으로 옮길 때까지 16년 동안 거주하였던 성임. 1424년 건주위 수령 이만주(建州衛 首领 李满柱)는 자신의 부(部)를 이끌고 파저강(婆猪江; 현재 환인현 혼강유역 중류)으로 옮겨와서 옹촌(瓮村) 등처의 올랍산성(兀拉山城/오녀산성) 남쪽기슭(지금의 환인현 혼강댐 수몰지구의 原長崗村/원장강촌)에 거주하였음. 1433년 4월 조선이 건주 여진인이 국경에 들어온다는 구실로 전쟁을 일으키고, 명도 건주위에 대하여 세 차례 전쟁을 벌이면서 건주위는 큰 타격을 입었음. 전쟁 후 이만주는 옹촌에서 북쪽으로 올미부(兀弥部; 桓仁縣 東古城子/환인현 동고성자)로 옮겼음. 1437년 9월 조선은 건주위 이만주에 대하여 두 차례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만주는 조선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신빈현 소자하 상류의 후란하다/호난합달(呼蘭哈達; 지금의 煙筒山/옌통산/연통산) 산 아래로 진입하였음. 이때 누르하치의 조상인 동산(董山)이 비아랍성을 축조함. 비아랍성은 명 성화(明 成化) 연간(1465~1487) 두 차례 훼손되었음. 1466년 동산은 요동지역을 공격하다가 살해되었고, 1467년 2월과 9월에는 건주삼위(建州三卫)와 명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면서 전투가 벌여짐. 이후 1473년과 1479년에도 잇달아 침입을 받았음. 이러한 전쟁 등을 통해 비아랍성은 폐허가 되었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게 되었음. 후에 누르하치가 군사를 일으켜 건주여진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1587년 정월, 성지와 궁실이 축조됨. 『흥경현지(興京縣志)』에 의하면 ‘구노성(舊老城)은 이도하 남산(南山)에 있는데, 누르하치가 혁도아랍성을 도성으로 삼기 전까지의 도성이었다. 흙으로 축조하였는데, 고지(故址)는 구부러져 있었다’라고 기록됨. 『만주실록』권2 7항에는 ‘태조가 석리구 호난합달(碩里口 呼兰哈达) 아래 동남쪽의 지아하허/가합하(嘉哈河)와 슈리지아허/석리가하(碩里加河) 중간의 평대(平臺)에 3층으로 성을 쌓고 누대(楼台)를 축조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여기에 기록된 성이 바로 비아랍성임. 비아랍성에서 누르하치는 법제를 정립하고 사회질서를 정리하였으며 군대를 부설하고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명·조선과 통상무역(互市贸易)을 함.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 후금의 기초를 다지게 됨. 즉 비아랍성은 건주여진 초기의 큰 본영(本營)과 수부(首府)로 건주여진인들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음(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여호규, 1999).
 
비아랍성은 포곡식산성임. 성벽 축조방식에 있어서는 자연석을 쌓은 다음 그 위에 성토함. 그리고 성벽라인보다 안쪽에 성문을 설치하여 ‘U’자형 옹성구조를 갖추고 있음. 이러한 점들은 고구려산성의 주요 특징임. 또한 지리적으로도 소자하 연안의 영릉진에서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환인지역으로 진입하는 교통로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음. 위와 같은 여러 면에서 비아랍성은 고구려 산성으로 추정됨. 실제 거대한 산성을 축조한 경험이 거의 없던 건주여진족이 조선군에게 쫓겨 소자하 방면으로 피신한 급박한 상황에서 거대한 산성을 축조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움(여호규, 1999). 또한 성내에서 고구려 유물이 발견된 적이 있다고 함(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그리고 서남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에서 고구려 적석묘가 대량으로 발견되었음.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비아랍성은 본래 고구려산성이었고, 15세기 중반 조선군에 쫓겨 소자하으로 피신한 건주여진족이 고구려산성을 개축하여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됨(高橋匡四郞, 1941; 渡邊三三, 1940; 張正巖·王平魯, 1994; 東潮·田中俊明, 1995; 여호규, 1999). 반면 성 안에서 고구려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보이지 않으므로 고구려성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음(肖景全·鄭辰, 2007).
 
비아랍성 서북쪽으로 4㎞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영릉진고성에서 한대의 문화층과 뚜렷이 구별되는 고구려 시기문화층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고구려가 제2현토군올 혼하 방면으로 구축한 다음 군치였던 영릉진고성을 상당기간 사용하였음을 보여줌. 그런데 영릉진고성은 평지성일 뿐 아니라 이도하자의 서안에 위치하여 서북방면에서 침공하던 중국측 세력을 방어하는데 상당한 취약점을 안고 있었음. 영릉진고성의 취약점과 거리나 위치관계로 볼 때 비아랍성은 영릉진고성의 방어용 산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음. 규모가 큰 대형 산성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방어용 산성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추정됨. 즉 모용선비들과 각축전을 벌이던 4세기 내지 당이 혼하 안의 신성을 거쳐 소자하 연안의 남소성·목저성·창암성 등을 침공하던 660년대에는 소자하 연안에서 주요한 거점성으로 기능하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위치비정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와타나베 산조(渡邊三三)(1940)은 고구려의 창암성(苍岩城)으로 추정함. 다카하시 쿄시료(高橋匡四郞)(1941)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흥경가도(興京街道; 혼하 상류 소자하유역)에서 발견된 고구려식 산성 가운데 살이호성(薩爾滸城)·목기성(木奇城)·비아랍성(費阿拉城) 등은 각각 고구려시대의 남소성·목저성·창암성으로 비정됨. 먼저 이 견해에 대한 전제는 고구려 서북변에 위치했던 신성의 정확한 위치임. 신성에 위치와 관련하여 마쓰이 히토시(松井等)이 봉천(奉天; 선양/심양) 동쪽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와타나베 산조(渡邊三三)이 고이산성을 발견하면서 학계에서는 고이산성을 신성으로 비정되고 있음.

한편 남소성과 관련하여 『진서』모용성조(慕容盛條)에서는 ‘慕容盛率衆三萬 伐高麗 襲其新城南蘇 皆剋之 散其積衆徒其五午餘戶遼西’라는 기록이 있고, 4년(400)조에는 ‘高句麗王安事燕禮慢 二月丙申燕王盛將兵三萬襲之 以驃騎大將軍熙爲前鋒 拔新城南蘇’라는 기록이 있음. 또한 『당서』고려전 당태종 정관 21년(647)에는 ‘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右武衛將軍 孫貳朗 右屯衛大將軍 鄭仁泰副之 率營州都督兵 繇新城道以進 次南蘇木底 虜兵戰不勝焚其郛’라는 기록이 있음. 『구당서』설인귀전의 당고종 건봉(乾封) 2년(667) 고구려 연개소문의 장자 남생이 동생 남건·남산과의 내홍으로 666년에 국내성을 탈출하여 당에 내부한 내용이 서술된 조에 ‘高麗大將泉男生率衆內附 高宗遣将军庞同善高等迎接之 男生弟男建率国人逆击同善等 诏仁贵统兵为后援 同善等至新城 夜为贼所袭 仁贵领骁勇救 斩首数百级 同善等又进至金山 为贼所败 高丽乘勝而进。仁贵横击之 贼众大败 斩首五萬余级 遂拔其南苏木底苍岩等三城 始與男生相會’라는 기록이 있음. 위의 사료를 종합해 보이는 남소는 신성에서 멀지 않고, 신성에서 목저에 이르는 길에 있음이 확연히 드러남. 한편 국내성(집안)에서 나왔던 남생이 당에 내부하기 위해 신성방면으로 나아갔을 때, 설인귀(薛仁貴)와 동선(同善) 등이 그를 영접하기 위해 나아갔던 길에 차례대로 남소, 목저, 창암이 있기 때문에 그 세 성은 반드시 혼하~소자하 일선에 있어야 함. 무순에서 동북 약 35㎞에 있는 살이호성(薩爾滸城)은 고구려식 산성이고, 그 동쪽 35㎞의 목기(木奇)에도 고구려산성이 있으므로 살이호성을 남소성, 목기에 있는 성은 목저성이라고 할 수 있음. 그러므로 창암성 또한 소자하유역의 목저성 동쪽에 있는 성이라고 추정되므로 목기에서 동쪽으로 25여㎞ 떨어져 있는 고구려식 산성인 비아랍성으로 비정하는 바임. 현재 비아랍성 부근은 무순에서 집안방면으로 이르는 분기점으로 요충지라고 할 수 있음. 이것은 자연적 지리에 따른 것인데, 아마 옛날에도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됨. 고구려의 압박으로 현토군이 함경 방면에서 여기로 이동했던 것도 요충지라는 방증일 것임. 집안에서 당으로 내부하기 위해 서북방 무순을 향하여 간 남생 등을 영접했던 설인귀의 군사 등은 무순에서 소자하를 따라 나아갔고 살이호성(남소성), 목기(목저성), 비아랍성(창암성)를 격파하고 그 근처에서 남건의 군대를 만났다고 이해하면, 『구당서』설인귀전의 기록은 매우 원활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됨.

한편 『진서』재기(載記) 모용황 함강(咸康) 7년 조의 ‘皩遷都龍城 率勁卒四萬 鹹康七年 入自南陝, 以伐宇文高句麗(중략) 勒衆萬五千從北置而進 高句麗王釗 謂皝軍之從北路也 乃遣其弟武 統精銳五萬距北置 躬率弱卒以防南陝 翰與釗戰于木底 大敗之 乘勝遂入丸都’라는 기록, 『위서』고구려전의 ‘建國四年 慕容元眞率衆伐之(高句麗) 入自南陜 戰於木底 大敗釗軍 乘勝長驅 遂入丸都’라는 기록, 『자치통감』 晋紀 顯宗下 咸康 8년 10월조의 ‘皩曰善(장군 한翰의 진언에 대하여) 將擊高句麗 高句麗有三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北道從北置 南道從南陜入木底城), 衆欲從北道 翰曰虜以常情料之 必謂大軍從北道當重北而輕南 王宜帥銳兵 從南道擊之 出其不意 北都不足取也’라는 기록은 모두 진 함강(晋 咸康) 8년(342) 전연의 모용황의 고구려 정벌을 서술하였는데, 그 사료들은 동일계통의 기록에 기초한 것임이 명확함. 그러므로 『진서』재기(載記)와 『위서(僞書)』고구려전에서 보이는 남합(南陜)과 『자치통감』진기(晋紀)에 보이는 ‘남도험협(南道險狹)’은 동일한 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길의 상태를 알려 주고 있음.

마찬가지로 ‘북치(北置)’, ‘북로(北路)’, ‘북도평활(北道平濶)’도 동일한 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음. 여기에서 ‘북치’는 소자하 유역의 길, 즉 지금의 구흥경가도(舊興京街道)이고, 남소성과 목저성도 이 길을 따라 존재하다고 추정됨. ‘남합’은 평상시의 길이 아니고, 혼하·소자하 남방 일대에 연결된 산악지대의 사잇길(間道)를 가르킨다고 추정됨. 『자치통감』 진기(晋紀)에 보이는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은 비유적 표현으로 정상적인 길은 북도이고, 남도는 험준하고 좁은 사잇길(間道)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됨. 한편 『진서』載記 慕容熙 燕昭文帝 光始 8년(406년)조에 ‘熙興苻氏襲契丹 憚其衆盛將還 苻氏弗聽遂弃辎重, 轻袭高句骊 周行三千余里 士马疲冻死者属路 攻木底城 不克而还’이라는 기록이 있음. 이 기록에서 신성과 남소성을 볼 수 없는데 6년전 즉, 진 안제 륭안(晋 安帝 隆安) 4년에 이미 『진서』모용성조(慕容盛條)에 보이는 것처럼 신성과 남소성 두 성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음.

장정옌(張正岩/張正巖)·왕핑루(王平魯/왕평로)(1994)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647년 당의 이적(李勣)이 고구려 정벌에 나섰을 때, ‘영주도독병(營州都督兵)을 이끌고 신성도(新城道)로 진입하여 차례대로 남소·목저에서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함(『신당서』권220). 이로 볼 때, 신성도의 기점에는 신성·남소성·목저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당대의 신성도는 동진시기 고구려의 남·북도 가운데 남도, 수대의 ‘남소도(南蘇道)’에 해당함. 그 길은 신성에서 시작하여 남소·목저를 거쳐 환인·집안으로 들어감. 이 가운데 남소성은 동진대에도 보임. 395년에 ‘모용각(慕容恪)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남소를 점령했다(『자치통감』 권97)’는 기록이 있음. 즉 고구려를 공격할 때 먼저 남소성을 점령하였음을 언급하고 있음. 그리고 339년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 병사가 신성에 이르렀다’는 기사와 관련하여 원대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에는 ‘신성은 고구려의 서비(西鄙)로, 서남쪽으로는 산을 곁에 두고, 동북쪽으로는 남소·목저 등의 성과 접해있다(『자치통감』권 96)’라고 기록되어 있음. 이로 볼 때 남소성은 신성과 목저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음. 

 

* 서비(西鄙) : 서쪽 변방
 
한편 남소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남소수(南蘇水)임. 남소수는 『한서』지리지, 남소성은 『진서』에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함. 고대의 성 이름은 강의 이름을 따서 정하는 경우가 많음. 그러므로 남소수는 남소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으로 추정됨. 『한서』지리지 고구려현조에 주(注)로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고,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가 서북으로 새외를 경유한다’라는 기록이 있음. 이 기사에서 보이는 요수는 혼하이고, 고구려현의 위치는 신빈현 영릉진 남쪽의 한대 고성부근으로 추정할 수 있음. 이로 볼 때, 남소수는 혼하 지류와 한의 고구려현 할경(轄境) 내에서 찾을 수 있음. 
 
그리고 신성·남소·목저를 거쳐 국내성으로 진격하는 기사를 참고해 볼 때, 남소수와 남소성은 무순의 동남지구에서 찾을 수 있음. 즉 남소수는 혼하(요수)의 지류이고 고구려현과 그리 멀지 않으며 무순 동남방향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강은 소자하임. 그렇다면 남소성은 득승보산성(得勝堡山城)으로 볼 수 있음. 목저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각종 역사서를 살펴보면, 신성·남소·목저 순으로 기재되어 있음. 이로 볼 때 목저성은 남소성 동쪽에 있다고 볼 수 있음. 『자치통감』함강(咸康) 8년조에는 ‘고구려에는 남도·북도 2도가 있는데, 북도는 평탄하고, 남도는 험준하다’는 기록이 있고, 호삼성의 주(注)에는 ‘북도는 북치(北置)에서 나아가고, 남도는 남합(南陜)에서 목저성으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이 있음. 이로 볼 때 목저 역시 고구려 남도상의 중요한 성이라고 볼 수 있음. 하서촌고성(河西村古城)은 남소성으로 추정되는 득승보산성에서 동남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목저성으로 볼 수 있음. 또한 성의 사용연대가 비교적 길다고 볼 수 있는데, 당이 설치한 목저주(木底州)와 발해가 계속해서 사용했다고 하는 문헌기사와도 부합함. 당 건봉(唐 乾封) 원년에 ‘고구려의 연남생이 당에 귀부하려 할 때, 동생인 남건·남산의 공격을 받게 되자 당에 구원을 요청한 바 있는데(『구당서』권119), 이때 당은 설인귀의 군대를 보내어 신성에서 승리한 후, 남소·목저·창암을 점령하고, 남생군(男生軍)을 만났다’고 함. 이 기사들을 볼 때, 창암성 또한 신성도 상에 있고 남소와 목저의 동쪽에 있다고 볼 수 있음. 목기 동쪽 약 25㎞의 영릉진 남쪽에는 후금시기의 비아랍성이 있는데, 성의 내성이 산을 따라 축조하였다는 점에서 고구려산성과 유사함. 성의 서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유수향(楡樹鄕)에서는 많은 고구려적석묘들이 발견됨. 대형묘장이 있는 곳 부근에서는 반드시 대형유적지가 있는 사례를 볼 때, 비아랍성이 고구려 창암성일 가능성이 높음.
 
 
자연환경
 
신빈현 영릉진 이도하촌 동남 1㎞ 지점에 위치함(國家文物局, 2009). 영릉진 일대는 요녕 동부산구(東部山區)의 협곡 작은 평지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소자하 양안에는 좁고 기다란 충적평지가 펼쳐져 있는 등 소자하 일대에서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임. 비아랍성은 바로 작은 평원의 남단에 위치함.
 
산성 서북쪽에 이도하자촌이 있음. 산성 서쪽 아래로 환인~영릉진 도로가 지나가고 있음. 영릉가의 동남 1㎞, 환인가도(桓仁街道)를 따라가면 온가요성(溫家窯城)이 있음. 성의 서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지점에 유수향(楡樹鄕)이 있는데, 이곳에는 많은 고구려 적석묘들이 분포함. 북쪽으로 4㎞ 떨어진 지점에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이 있고, 다시 북쪽 소자하 건너편에는 신빈~심양 도로가 지나가고 있음. 서북쪽으로 4㎞ 떨어진 이도하자 서안(西岸)에 영릉진고성이 있음.
 
성 남쪽은 합이살산(哈爾薩山)이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계명산(鷄鳴山)이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호난합달(呼蘭哈達; 지금의 煙筒山)을 볼 수 있는 등 세 면은 천연병장(天然屏障)으로 둘러싸여 있음(撫順市社會科學院, 199). 동북기슭에는 황토강자하(黃土崗子河; 옛 명칭은 首里口河/수리구하)가 북쪽으로 흐름. 서쪽에는 이도하(옛 명칭은 夾哈河/협합하)가 동북쪽으로 흐름. 이도하는 산성 북쪽 약 2㎞의 지점에서 황토강자하과 합류하고 소자하로 유입됨. 산성의 남쪽~동남쪽 기슭에는 하가하(夏家河; 옛 명칭은 里加河/리가하)가 동북쪽으로 흘러 황토강자하로 유입됨(建國大學硏究員, 1939). 비아랍성은 동·남·서 세 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북 방면은 시내와 강으로 가로막힌 천혜의 요새지임.
* 병장(屏障) : 담, 병풍
 
성의 동남쪽은 3개의 높은 봉우리가 있는 산등성이임. 여기에서부터 서북·서·북·동북쪽에 네 줄기의 지맥이 뻗어 있음. 외측의 지맥 두 줄기는 급하고 가파른 반면 내측의 지맥 두 줄기는 완만하고 넓어서 궁전 혹은 주택지가 자리 잡기에 적합함. 각 지맥의 골짜기는 넓어서 부락민의 통로로 이용되고 있음.
 
 
유물정보
 
초석(礎石) 1점, 명대 벽돌(明代 磚) 1점, 기와(瓦) 1점, 토기편(土器片) 1점, 와당(瓦當) 1점, 청화자기편(靑花瓷器片) 1점, 자기편(瓷器片) 1점, 백색 절구(白色 臼/백색구) 1점, 명대 접시(明代 盘子/반자) 1점 
 

 

소자하 일대 성 분포도  
 
영릉진 주변 성 분포도 

 

 
소자하유역 제성지유적 견취도  

 

이도하자구노성 주변 지형도 
 
 이도하자구노성 조감도  
 
이도하자구노성 지도 (1966년)  
 
이도하자구노성 지도
 
 
 
참고문헌
 
· 稲葉岩吉·建國大學, 『興京二道河子舊老城』, 建國大學, 1939
· 稲葉岩吉, 「興京二道河子舊老城」『滿洲史學』 3-2, 1939
· 渡邊三三, 『增訂 撫順史話』, 撫順新報社, 1940
· 高橋匡四郞,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期報』 2, 建國大學硏究院, 1941
· 李鳳民, 「淸入關前都城述略」『潘陽古宮博物館文集』, 1985
· 細谷良夫, 『中國東北部における淸朝の史跡』, 東北大學, 1991
· 撫順市社會科學院, 「佛阿拉城」『撫順地區淸前遺迹考察紀實』, 遼寧仁民出版社, 1994
· 張正巖·王平魯, 「新城道及新城道上諸城考」『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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