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7959
태영호와 지성호 그리고 선배 탈북자 이수근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이수근과 처조카 배경옥의 기구한 삶
20.05.06 18:53 l 최종 업데이트 20.05.06 18:53 l 김성수(wadans)
▲ 이수근 망명 직후 ⓒ 진실위 자료사진
1967년 3월 22일, 북한 김일성의 수행기자 출신이자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이수근은 판문점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한다. 이수근의 뜻하지 않은 망명은 당시 대선을 앞둔 박정희에게 엄청난 호재였다. 박정희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즉각 이수근을 중앙정보부(아래 중정) 1급공무원인 판단관으로 특채하고 국민들의 반공의식을 높이는 대국민 반공강사로 활용한다.
한편 베트남 주재 미1사단 소속 파월 기술자로 베트남에 살던 이수근의 처조카 배경옥은 1968년 여동생의 결혼식 때문에 잠깐 귀국한다. 여동생의 혼인을 앞두고 배경옥은 자신의 이모부 이수근이 지난해 북한에서 탈북한 고위인사이며, 현재 중정에서 고위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남한에 친척이라고는 아무도 없던 이수근은 그 후 배경옥을 자주 만나 식사도 하고 술도 몇 잔하며 고달픈 인생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배경옥은 이모를 북한에 두고 혼자 탈북한 이수근이 달갑지 않았다. 가족을 떼놓고 혼자만 살겠다고 탈북한 이모부가 배경옥의 상식으로는 좀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탈북 후 평생 가족을 그리워한 이수근
여동생의 결혼 이후 베트남으로 돌아가려던 배경옥은 우연히 택시에서 여권을 잃어버려 난감한 상황이 된다. 당시에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라 요즘처럼 여권을 다시 신청할 수 없었다. 여행사를 통해 부랴부랴 위조여권을 만들던 중 배경옥은 이수근으로부터 자신의 위조여권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유는 한국을 탈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수근은 1967년 탈북 후 북한에 '인질'로 있는 가족들 생각에 대중강연에서 김일성 비판을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이 보복 당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중정은 그런 이수근의 소극적인 태도가 못마땅했다. 배경옥은 지난 2007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관련기사 : "짐승처럼 벌거벗긴 채 고문당해... 그러나 '고문관' 복수는 잊었다" http://bit.ly/5cMsp0).
"이모부는 늘 술에 취해 살면서 가족을 그리워했어요. 당시 중정 감찰부장이었던 방준모씨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토로했었습니다. 이모부가 반공강연에서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면 방씨가 찾아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윽박지르고 때렸던 모양입니다. 이모부 발밑에 대고 권총을 쏘며 협박했다는 거예요. 자유를 찾아 귀순했는데 자유 없이 괴롭힘을 당하니까 차라리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가서 북한에 있는 가족을 초청해 글이나 쓰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습니다."
배경옥은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북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세월을 보내는 이모부가 딱해 보였다. 그래서 이모부가 차라리 사상이 자유로운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서 이모랑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여행사에 이수근의 위조여권을 부탁했다.
1969년 1월 27일, 마침내 이수근은 배경옥과 함께 위조여권으로 홍콩으로 출국한다. 그러나 4일 후인 1월 31일, 두 사람은 베트남 사이공 공항 기내에서 중정직원에게 체포돼 한국으로 압송된다.
▲ 이수근 체포 후 ⓒ 진실위 자료사진
김일성 수행기자 출신의 고위급 인사인 이수근이 판문점을 통해 남한에 '귀순'한 사건은 북한과 사상, 경제 등 모든 측면에서 대립과 경쟁의 관계에 있었던 박정희에게는 체제우위를 나타낼 호재였으나, 이수근의 탈출사건은 호재가 악재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박정희는 그런 이수근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크게 분노했던 것 같다.
중정은 이수근을 체포한 지 13일 뒤인 1969년 2월 13일 탈출사실을 발표했고 언론 보도는 이수근의 위장귀순과 배신에 대한 규탄으로 모아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수근이 자유를 찾아 귀순했으나, 한국에도 자유가 없어 탈출하였다는 점은 일체 지적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수근이 한국을 배신한 위장간첩이라는 점과 중정의 해외 활약상이 부각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위기가 선전의 호기로 반전되었다.
발가벗겨져 묶인 채 고문받다
중정으로 끌려온 이수근과 배경옥은 40일 동안 중정 조사실에 불법 감금된 상태에서 온몸이 완전히 발가벗겨진다. 그리고 몸이 의자에 묶인 채 건장한 10여 명의 중정요원들에게 둘러싸여 무차별 구타, 몽둥이찜질,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으며 온몸이 걸레처럼 늘어진 상태에서 자신들이 '간첩'임을 거짓자백해야 했다.
이수근의 고문수사 과정에서 그가 숙청을 피해 북한을 탈출했다는 초기진술서가 수사기록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그리고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수사관들이 불러주는 대로 쓴 '위장귀순'이 진술서로 대체되었다.
배경옥은 수감기간 중 가족들의 면회가 일체 금지되었다. 변호인 접견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기간 고립된 구금상태에서 두 사람은 가혹한 고문수사와 재판을 받아야 했다.
배경옥은 지난 2018년 YTN과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쓰라린 경험을 이렇게 회고했다.
"검찰이 서울구치소 소장실로 와서 소장실 옆에 방에서 조사를 받았는데요.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한 서류 가지고 물어보는 것을 아니라고 하니까 검사가 일어서서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중정 애들이 바깥에 서 있다가 들어와요. 그래 가지고 왜 다른 소리를 하느냐, 그냥 중정에서 한 얘기대로 해라, 그리고 또 나쁜 짓(고문)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받아쓰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재판정에서도 중정요원들이 둘러서 있었고, 전혀 다른 말을 할 수 없게끔 만들어 그대로 한 것뿐이지 다른 것은 하나도 없어요."
결국 이러한 고문조사를 거쳐 1969년 5월 10일, 이수근은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위반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가혹한 고문에 지친 이수근은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과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 있는 남한의 사법제도를 전혀 믿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항소를 포기했고 두 달 후인 1969년 7월 2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1969년 당시 신문 기사 ⓒ 진실위 자료사진
배경옥은 간첩방조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상했다.
"사형 선고받았을 때 어머니한테 제일 죄송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야 하는 어머니 마음이 어떠셨겠습니까. 한낱 미물의 생명도 존중해야 하는데 그때 당시 사람 목숨을 너무 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누구나 귀중한 것 아니겠습니까. 새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그 누구든 내가 뭘로 태어나야지 작정하고 나온 사람은 없잖아요."
배경옥은 항소심에서 다행히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도 같은 형이 확정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당시 그에겐 아내와 어린 아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이 있었다. 수감 후 1969년 어느 날, 아내는 갓 태어난 딸아이를 낳아 면회를 왔다. 그러나 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당시 박정희 정권하에서 '빨갱이'로 종신형을 받은 남자를 평생 기다리며 싱글맘으로 살라는 것은 여성에게 가혹한 것이라고 배경옥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여성과의 불가피한 '이별'을 원망 없이 차분히 받아들였다.
한편, 배경옥은 감옥살이 처음 5년은 독방에서 보냈다. 발을 펴면 벽에 닿을 정도의 작은 방이었다. 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어 겨울밤 그릇에 물을 떠 놓으면 얼음덩이가 되는 감방에서 옥살이를 했다.
추위에 혀가 굳어 말이 안 나온 적도 있었다. 마음 속으로는 말이 되는데 정작 말을 하려니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그때부터 그는 독방의 작은 창문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독백을 했다. 추위에 혀가 굳게 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혀 운동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배경옥은 무기징역형으로 복역하다가 수감된 지 무려 21년 만인 지난 1989년 12월 22일 감형을 받고 출소했다.
출소하고 나서 무려 21년 만에 배경옥은 아들과 딸을 만났다. 그가 처음 감옥에 갔을 때 엄마와 함께 면회 온 아들은 네 살이었다. 30대, 40대를 감옥에서 다 날려버리고 21년에 만난 아들이 배경옥은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또 서먹서먹했고 '간첩' 아비를 두고도 건강하게 자란 아들을 보니 너무 미안했다.
21년 만에 만난 아들 그리고 자살
20대 중반 청년으로 자란 아들은 결혼을 앞뒀지만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어느 날 아들은 전화를 통해 "그냥 남남처럼 이대로 살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그것이 배경옥이 들은 아들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가 석방된 지 9개월 만인 1990년 8월 어느 날 아들은 자살했다. 결혼하면 '간첩의 아들'이라고 처가에서 좋지 않은 소리를 듣게 될까 봐 고민하던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지난 21년간 아들은 아버지가 죽은 줄 알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간첩'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와 자신을 찾으니, 결혼을 앞둔 아들이 고민을 많이 했던 것같다고 배경옥은 생각했다. 그렇게 먼저 간 아들을 생각하면 배경옥은 지금도 속이 미어진다. 배경옥은 "나는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준 죄인"이라고 말한다.
30~40대의 청춘을 감옥에서 다 보내고 세상에 나온 배경옥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간첩'이었던 그가 지구상의 유일한 '냉전' 국가인 대한민국 하늘 아래서 취직할 곳은 하나도 없었다. 그 후 그는 그저 죄 없는 동생들한테 도움받고 신세 지며 근근이 죽지 못해 질긴 목숨을 유지하며 하루살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지난 2005년 배경옥은 '이수근 사건'이 중정에 의해 간첩사건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필자가 한때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2006년 배경옥은 진실위에서 1969년 이수근 사건 당시 "(중정의) 수사과정에서 의자에 앉혀놓고 잠 안 재우기, 야전용 전화기에 의한 전기고문, 구타 등의 고문을 당했고, 물고문, 몽둥이 구타, 반복 질문에 의한 암기화 과정을 거쳐 수사기관이 암호문을 조작했으며,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을 입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진실위는 이수근 사건을 조사하던 중 당시 중정 월남책임자였던 이대용으로부터 "(당시) 김형욱 중정부장에게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다'라는 말을 직접 들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보안유지를 부탁받은 바 있다.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 중정 안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북쪽이 싫어 내려왔는데 남쪽도 자유가 없다
▲ 이수근은 아직도 270여명이 뒤엉킨 서울구치소 자리 합동묘지 안에 묻혀있다. 묘비 옆은 배경옥씨. ⓒ 진실위 자료사진
이대용은 또 "이수근이 '북쪽이 싫어 내려왔는데 남쪽에서도 자유가 없다. 중정 감찰실장이 나를 일일이 감시하고 수시로 불러서 북쪽과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면서 때리고, 내 발을 향해 권총을 쏴 위협을 했다. 남쪽이 북쪽보다야 백번 낫다.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북한이 바로 지옥이다. 그래서 탈출했는데 남쪽도 틀렸다. 자유도 없고, 독재이고 해서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가서 살려고 했다'라고 했다. 그러니 결국 중정 감찰실장이 이수근을 달아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더욱이 당시 중정 5국 대공수사과장이었던 이병정은 이수근의 귀순 경위에 대해 "이북에서 김일성한테 신용을 잃고 더 이상 중앙통신 부사장 자리도 위태롭고 신변이 위태로워서 기회를 봐서 탈출했다. 우리가 잡아와서 역(逆)조사를 하니까 위장탈출이 됐다, 처음에는 위장귀순 여부를 분명히 판단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잠입으로 변경시켰다, 간첩이면 부호를 받아야 하는데 이수근은 아무런 부호명이 없고 북한에서 이수근에게 내려온 무전도 없었다, 당시 시중에 이수근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고 화장실에서 무전을 한다는 루머가 돌아 직접 가택수색과 처 이강월 및 운전기사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사실무근임을 확인했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위와 같은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2006년 진실위는 이수근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북한을 탈출한 자가 다시 북한의 지령을 받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 등은 이수근이 중립국에서 책을 쓰면서 살려고 출국했다는 점에 부합하고, 달리 이수근이 북한의 지령을 받기 위해 탈출하였다고 인정할 근거가 없다. 간첩으로 인정한 수사 및 판결은 이수근의 임의성 내지 신빙성 없는 일부 자백에 의존하고 있으나 이수근의 자백은 가족들의 면회가 금지되고 변호인 접견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장기간 고립된 구금상태에서 변호인 조력을 받거나 방어권이 제대로 행사되지도 못한 상황에서 구타나 강요 등으로 인하여 자백하였을 개연성이 있다."
위와 같은 진실위 결정을 바탕으로 배경옥은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 2008년 12월 19일, 배경옥은 39년 만에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날 "이수근씨가 위장간첩이라거나 배씨가 이씨의 탈출을 도왔다는 등의 공소사실은 고문과 조작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밝혀졌다"며 "중앙정보부는 불법구금과 구타·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고, 이를 감독해야 할 검찰은 오히려 중정요원들의 감시를 받았으며, 법원 역시 배씨 등이 범행을 부인하는데도 형식적 재판만 진행하다 결국 오판을 내렸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당시 법정에서 배경옥은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동안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석방 후에는 아들을 잃었다. 기쁠 것도 없다"며 씁쓸한 감회를 밝혔다.
이후 배경옥은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모부 이수근을 위해 다시 한번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 2018년 10월 11일, 재판부는 위장간첩 누명을 쓰고 사형 당한 고 이수근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이씨는 베트남 공항에서 체포돼 연행된 이후 40여 일간 불법구금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각종 고문과 폭행 등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 자백을 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채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낙인찍혀 생명을 박탈당했다.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 이씨와 유가족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구할 때"라고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자유를 찾다가 가혹한 고문 끝에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수근은 오늘도 말이 없다. 그리고 이모부의 자유를 돕다가 억울하게 21년을 감옥에서 보낸 배경옥의 세월은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이것이 박정희-전두환 시대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태영호와 지성호 당선인에게
▲ 왼쪽부터 지성호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당선인, 태구민(태영호) 미래통합당 당선인. ⓒ 연합뉴스
이수근의 기구한 삶을 돌아보다 불현듯 태영호와 지성호 당선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최근 근거 없는 김정은의 건강이상설을 제기해 우리 사회 큰 파장을 일으켰다. 나는 태씨와 지씨가 선배 탈북자 이수근의 정신을 배웠으면 한다.
이수근은 탈북 후 북한에 있는 가족을 생각해서 중정의 협박과 구타에도 불구하고 대중강연에서 북한을 비판하지 않았다. 자신의 경솔한 발언이 북한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의 행복을 파괴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또 하나 아이러니한 것은 태씨와 지씨가 오히려 그들의 선배탈북자 이수근의 생명을 앗아간 박정희-전두환의 후예당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수근은 자유가 없는 북쪽이 싫어 내려왔는데 남쪽에도 자유가 없어서 번민했다. 그리고 결국 자유를 찾아 제3국으로 도피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그런 면에서 지금 진정한 자유대한에 사는 태씨와 지씨는 정말 운이 좋고 복이 많은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이 경솔한 언행으로 굴러들어 온 복을 차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토사구팽'되지 않고 '해피엔딩'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왜냐하면 이수근과 같은 비극적 삶이 자유대한민국에서 반복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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