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이 매소성에 진을 치자 공격하여 내몰다 ( 675년 09월 29일 )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신라본기 제7 > 문무왕(文武王) > 이근행이 매소성에 진을 치자 공격하여 내몰다
二十九日, 李謹行率兵二十萬, 屯買肖城. 我軍撃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稱是.
29일에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200,000명을註 001 이끌고 매소성(買肖城)註 002에 머물렀다.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고 전마(戰馬) 30,380필을註 003 얻었는데, 남겨놓은 병장기도 그 정도 되었다.註 004
주
註 001 군사 200,000명: 675년 매소성전투(買肖城戰鬪)에 투입된 당군은 무려 200,000명에 이른다. 일부 학자들은 매소성전투에 당군 200,000명이 참가한 것은 신라측 기록의 과장이라고 설명한다(민덕식, 1989, 171쪽; 안국승, 1997, 277쪽). 200,000명은 엄청난 과장이며 당시 고간(高侃)과 이근행(李謹行)이 거느렸던 40,000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이호영, 1997, 247쪽; 바이건싱/拜根兴/拜根興, 2003, 101~104쪽). 하지만 나당전쟁에 참가하였던 확인가능한 당나라의 행군총관(行軍摠管)은 고간, 이근행, 설인귀 등 3명이며, 복수의 행군(行軍)을 거느린 유인궤(劉仁軌)는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이었다. 당의 표준 행군 병력은 20,000명이며, 행군대총관이 거느린 병력은 최소 40,000명 이상이다. 행군총관 3명이 거느린 병력이 60,000명, 대총관이 거느린 병력이 40,000명 이상이므로 100,000명을 상회하게 된다.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산하의 병력과 지원부대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매소성전투에 투입된 당군 200,000명을 문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나당전쟁 수년간 투입된 당군의 전체 규모는 200,000명에 달할 수 있다(이상훈, 2012, 211~212쪽). 나당전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장(戰場)이 매소성이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에서 당군 200,000명이라고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 문면 : 문장이나 편지에 나타난 대강의 내용
〈참고문헌〉
민덕식, 1989, 「나·당전쟁에 관한 고찰」, 『사학연구』 40
안국승, 1997, 「매소성연구」, 『경기향토사학』 2
이호영, 1997, 『신라삼국통합과 여·제패망원인연구』, 서경문화사
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拜根興, 2003, 『七世紀中葉唐與新羅關係硏究』, 中國社會科學出版社
註 002 매소성(買肖城): 매초성이라고도 부른다. ‘肖’는 ‘초’와 ‘소’의 두 가지 음이 있는데, 본서 권제43의 ‘매소천성(買蘇川城)’과 권제35의 ‘매성현(買省縣)’과 같은 곳으로 판단되므로 ‘소’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정구복 외, 2012, 242쪽). 매소성은 대체로 지금의 경기 연천의 대전리산성(大田里山城)으로 비정된다. 경기 양주의 대모산성(大母山城)이라는 설도 있지만, 당시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경계였던 임진강에서 너무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전투 상황상 그대로 따르기 어렵다. 연천 대전리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성터 둘레가 약 670m이며, 성을 감싸고 흐르는 한탄강과 서쪽으로 뻗어있는 능선으로 인해 방어면에서 성의 기능성이 강화되어 있다(민덕식, 1989, 658쪽). 특히 연천 방면으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는데 유리하게 축조되었다(포천군, 1984, 94쪽). 매소성은 성의 규모는 작지만, 성 부근에 대군을 수용할 만큼 넓은 산야(山野)와 들판이 있으며, 한탄강을 도보로 도섭(渡涉)하기 용이하다(안국승, 1997, 276쪽). 한탄강 하류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임진강 유역 최대의 요충지인 칠중성(七重城)으로 접근이 편리하며, 육로를 따라 남하하면 한강 이북의 주요 거점인 양주(楊州)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이어진다. 이렇듯 매소성은 기병을 상당수 보유한 대규모 당군이 임진강을 도하하여 주둔하기 용이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도섭(渡涉) : 물을 건넘
〈참고문헌〉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포천군, 1984, 「삼한의 삼국통일과 신라시대」, 『포천군지』
민덕식, 1989, 「라·당전쟁에 관한 고찰」, 『사학연구』 40
안국승, 1997, 「매소성연구」, 『경기향토사학』 2
註 003 전마(戰馬) 30,380필: 신라군은 매소성전투(買肖城戰鬪)에서 당군이 보유했던 전마 3만여 필을 노획하였다. 획득한 말을 통해 그에 상응하는 무구류를 획득한 것으로 보아, 엄밀히 말해 3만여 필은 전마가 아니라 수송용 말인 태마(駄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태마 30,000필을 보유한 병력 규모는 세 가지 정도로 추산해 볼 수 있다. 첫째, 전투 참여 인원이 전원 부병(府兵)이라고 가정할 경우, 이들은 10명당 6필의 태마를 보유해야 하므로(천췬/陳群, 1989, 161쪽), 30,000필의 태마를 보유한 병력 규모는 50,000명에 해당한다. 이들이 태마를 모두 버렸다는 가정 하에 50,000명을 산출할 수 있다. 둘째, 전투 참여 인원이 말갈·거란 등 번병(蕃兵)과 한병(漢兵)이 혼재할 경우, 즉 기본적으로 번병은 기마를 하고 한병은 태마를 모두 버리고 도보로 이동할 경우 최소 한병(漢兵) 50,000명과 번병(蕃兵) 수만 명이 될 것이다. 셋째, 전투 참여 인원이 말갈·거란 등 번병 위주일 경우, 기병 위주의 번병은 개인 식량과 무구류를 개인 휴대하므로 태마는 생각보다 많이 소요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30,000필의 태마가 버려졌다면 앞의 두 경우보다 더 많은 병력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떠한 경우를 상정해 보더라도 태마 30,000필을 보유한 병력 규모는 최소 50,000명 이상이라는 결과가 나온다(이상훈, 2012, 210~211쪽).
* 태마(駄馬) : 짐을 나르는 데에 쓰이는 말
* 부병(府兵) : 농민병
* 번병(蕃兵) : 오랑캐 나라 군사
〈참고문헌〉
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천췬/진군(陈群/陳群), 1989, 『중국병제간사(中國兵制簡史)』, 군사과학출판사(軍事科學出版社)
註 004 29일에 이근행(李謹行)이 …… 병장기도 그 정도 되었다: 문무왕 15년(675) 9월에 발생한 매소성전투(買肖城戰鬪)는 나당전쟁의 핵심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매소성전투에 참가한 신라의 장수, 병력 규모, 적군의 전사자수 등에 관한 기록이 없어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이종학, 1984, 196~197쪽; 이호영, 1997, 247쪽). 매소성전투에 대한 국내연구들은 본서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나당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사건들에 대한 중국측 사료는 미비한 것에 비해, 본서를 비롯한 한국측 사료는 상대적으로 자세하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John C. Jamieson, 1969, 1~3쪽). 최근에는 중국측 사료와 한국측 사료를 비교 분석하여, 675년 매소성전투의 상황 자체를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우에다 키헤나리치카/植田喜兵成智, 2014; 윤경진, 2017; 김병희, 2018; 권창혁, 2019).
945년에 편찬된 『구당서』 권제5 고종본기제5 상원(上元) 2년 2월조에는 “유인궤(劉仁軌)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신라를 대파(大破)하였다”고 전한다. 961년에 편찬된 『당회요』 권제95 신라전, 979년에 편찬된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제174 사이3 동이3 신라국, 1013년에 편찬된 『책부원귀』 권제986 외신부제31, 1060년에 편찬된 『신당서』 권제220 동이 신라전, 1084년에 편찬된 『자치통감』 권제202 당기18 고종 의봉 3년 9월조 등에는 모두 『구당서』와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책부원귀』·『신당서』·『자치통감』에는 『구당서』의 기록 외에, “말갈 군사가 바다를 통해 신라의 남경을 공략하여 크게 승리하였고,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매소성에 주둔시켰으며, 3번 싸워 3번 모두 이겼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7 문무왕 15년(675) 2월조에 “유인궤(劉仁軌)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신라) 군사를 대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말갈 군사가 바다를 통해 신라의 남경을 공략하여 크게 승리하였다.”는 부분은 누락되어 있다(김병희, 193~197쪽). 또 본서에 “이근행이 안무진무대사가 되어 매소성에 주둔하였다.”는 내용은 수록되어 있으나, 당나라가 “3번 싸워 3번 모두 이겼다”는 부분은 누락되어 있다. 반면 중국측 기록에는 본서에 신라가 “매소성에서 승리하여 전마(戰馬) 3만여 필을 획득하였다.”는 부분과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신라가 “18번 싸워 모두 이기고 6천여 명을 목 베었다.”는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이렇듯 중국측 기록과 한국측 기록은 서로의 전승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지만, 각자 유리한 부분은 남기고 불리한 부분은 생략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675년 2월부터 9월 29일까지 일련의 본서의 기록을 재정리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675년 2월 칠중성전투 기사, 675년 9월 매소성전투 기사, 675년 9월 29일 기사 등 월일이 직접적으로 명시된 기사 외에는 대부분 그 시계열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우에다 키헤나리치카/植田喜兵成智, 2014; 윤경진, 2017; 김병희, 2018; 권창혁, 2019). 하지만 학자별 이해하는 방식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며, 또한 사서에 기록된 기사를 임의로 시기를 변경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도 적지 않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매소성전투 기록의 의문점과 중국측 기록의 신빙을 전제로 매소성전투는 당이 패배한 전투가 아니라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즉 당의 군사전략이 토번(吐蕃)을 중심으로 전환되어 필요 없는 물자와 전마(戰馬)들을 포기하게 되었고, 이를 신라 군사가 뒤를 쫓아가면서 수습하였기 때문에 구체적인 전황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바이건싱/拜根兴/拜根興, 2003, 101~104). 하지만 당의 군사전략이 토번을 중심으로 전환된 시기는 676년 윤3월 이후이므로, 매소성전투가 발생한 675년은 당이 공세를 지속하던 시점이었으며, 나당전쟁의 분수령으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이 제시되어 있다(이상훈, 2012, 222쪽). 즉 신라 군사는 675년에 당의 육상 작전기지이자 보급기지인 매소성을 탈취함으로써, 당군의 차후 공격계획에 차질을 초래시켰고, 결국 당군의 철수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당시 당나라는 본토에서 신라 전선까지 보급로가 상당히 신장되어 있었고, 이마저도 신라 수군의 활동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소성전투를 전후해 전세를 만회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신라의 공격과 방어에 막히면서 당의 대군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한반도 장기 원정은 당나라의 재정을 지속적으로 압박하고(김택민, 1998, 362쪽), 당나라 국내 여론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대규모 병력의 한반도 장기 주둔은 그만큼 당 자체에 대한 힘의 공백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이호영, 1997, 『신라삼국통합과 여·제패망원인연구』, 서경문화사
김택민, 1998, 『중국토지경제사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바이건싱(拜根兴/拜根興), 2003, 『7세기중엽 당과 신라관계연구(七世紀中葉唐與新羅關係硏究)』, 중국사회과학출판사(中國社會科學出版社)
John C. Jamieson, 1969, 「나당동맹의 와해 -한중기사 취사의 비교-」, 『역사학보』 44
이종학, 1984, 「신라삼국통일의 군사사학적 고찰」, 『군사』 8
윤경진, 2017, 「매소성 전투와 나당전쟁의 종결 -『삼국사기』 신라본기 675년 2월 기사의 분석-」, 『사림』 60
김병희, 2018, 「나당전쟁의 종료 시점에 대한 재검토 및 매소성 전역의 과정 연구」, 『한국고대사탐구』 30
권창혁, 2019, 「나당전쟁 시기 매소성 전투와 신라의 북방전선」, 『한국고대사연구』 95
우에다 키헤나리치카(植田喜兵成智), 2017, 「나당전쟁 종결기기사에서 보는 신라의 대당의식(羅唐戰爭終結期記事にみる新羅の對唐意識) -『삼국사기(三國史記)』문무왕14,15,16년조의 재검토(文武王十四·十五·十六年條の再檢討)」, 『사적(史滴)』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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